#141
“대체 어떤 새끼가, 하얀색 드레스를 입혔어.”
권채우가 장범희의 가슴팍에 태블릿을 퍽 내던지며 눈빛을 번뜩였다.
“내가 요즘 어떤 생각까지 하는 줄 알아?”
“예?”
“죽을 만큼 싫었던 짓을 해 볼까 종종 생각해. 시간이 없으니까.”
알아들을 수 없는 말에 장범희는 부연해주길 기다려봤지만, 권채우는 말을 삼키듯 목울대만 움직였다.
앞으로 권 가(家)와 반대 세력 간의 다툼은 물밑에서 더욱 치열해질 텐데, 이연을 안전한 곳에 둔다 한들 그녀에게 돌아갈 수나 있을까.
권 가(家)가 해체되기까지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한지 감히 셈해볼 수조차 없었다.
아이가 태어나고, 자라는 동안 곁에서 함께 할 수 없다면. 그 모든 고됨을 그녀 혼자서 겪게 만든다면. 권채우는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주먹을 고집스레 쥐었다 폈다.
“앞장서.”
“도련님. 지금 잘 움직이시지도 못하시면서―!”
“다리가 절단됐으면 기어서라도 갔어.”
집착이 묻어나는 그 말에 장범희는 결국 두 손 두 발을 다 들어야 했다.
연회장의 문은 출입 금지구역처럼 보안이 철저했으나 권채우는 거리낌 없이 곧장 들어갔다.
조명이 어둡기 때문인지 분위기가 오묘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는 목마른 사람처럼 이연을 찾느라 눈이 벌게져 있었다.
멀끔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동공을 풀고 비척비척 걸어 다니는 꼴이 신경에 거슬렸다. 하지만 팔뚝을 붙이고 나란히 선 권기석과 이연을 발견한 순간, 머릿속은 깨끗이 비워졌다.
왜인지 두 사람에게만 희끄무레한 막이 씌워진 듯 특별하게 보여서.
“하…….”
권채우는 서버가 들고 있던 술잔을 신경질적으로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총을 맞은 것보다도 더 좆같은 기분이었다. 형수라는 말로 사람 속을 긁어놓더니 기어이 하얀 드레스를 입혀 놓은 심보엔 욕이 나왔다.
그렇게 홀로 화를 삭이던 권채우는 인상을 찌푸린 채 술잔을 더 비웠다. 그는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목발에 의지해 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묘한 각도로 얼굴이 밀접하게 붙어있는 그 틈새를 뚫듯 목발을 집어넣었다.
“두 사람, 좀 떨어지지 그래.”
그 순간, 바닥이 튀어나오고 천장이 무너질 것 같은 전복감이 덮쳐왔다. 몸이 기울어지다 뒤집히는 몹시도 기묘한 느낌에 권채우는 멈칫한 채 흰자위만 꾹꾹 눌렀다. 하지만 두개골이 쪼개지는 듯한 두통이 몰아치면서 돌연 연회장이 씻겨 나가고 새로운 시야가 펼쳐졌다.
비록 가난했지만 어머니가 있었고, 음악이 있었던 그때로.
권채우는 작아진 두 손을 오므렸다 펴 보며 어느새 낮아진 눈높이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별안간 신선한 공기가 콧속으로 화악 들어왔다.
동시에 매일 오후, 나무 아래로 숨어들어 훌쩍훌쩍 울던 소녀가 이연 위로 서서히 겹쳐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권채우는 순식간에 열셋의 과거로 빨려들어 갔다.
“오늘은 교복 어쨌어?”
그는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퍽 순진하게 물었다. 제가 뭐라고 말하는지도 모른 채 그저 그립고 몽롱한 감각에 몸을 내맡겼다.
“내 연주 안 듣고 싶었어?”
“뭐라고요? 지금 무슨―”
“흐응, 이런 목소리였구나. 더 말해 봐.”
이연은 내심 당황하여 벙찐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권채우는 걱정과 황당함으로 얼룩진 소녀의 눈망울을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는 것도 처음인 것 같은데.”
“…….”
“정확히 몇 살이야?”
“어……”
“누나인 건 아는데, 어느 정도로 누나냐고.”
“―…해요? 뭔가 잘못 됐…―”
소녀의 목소리가 드문드문 끊겼다.
매일같이 첼로 연주를 그렇게나 들려줬는데도 소녀는 저를 못 알아보는 것 같았다. 권채우는 어린애답게 볼이 부루퉁해졌다.
나는 진짜로 너를 만나고 싶었는데. 동네 사람들과는 절대로 말을 나누지도 말고, 혼자 돌아다니지도 말라는 엄마의 신신당부만 아니었다면, 진작에 모습을 밝히고 생색을 냈을 것이다.
늘 외롭고 울적해 보이던 소녀는 종종 아쉬운 얼굴로 나무에 노란색 포스트잇을 붙이고 갔다. 그러면 권채우는 모두가 잠든 밤, 몰래 숲으로 나가 그것을 꽃처럼 따오곤 했다.
“내가 너무 어리고 작아서 실망했어?”
“―…정상이 아니…―”
소녀는 아직까지도 당황하는 것 같았다.
“집에 밥이 부족해서 그렇지, 나 엄청 클 건데. 엄마가 그랬어. 유전적으로 키가 아주 많이 클 거라고.”
엄마는 가끔씩 흐릿한 눈으로 자신이 모르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지금보다 더 자라면 키가 얼마나 클지, 이목구비는 어떻게 변할지, 목소리는 얼마나 두꺼워질지. 엄마의 눈빛은 썩 밝지 못했지만 왜인지 확신하는 어투였다.
“그런데 오늘은 안 우네?”
권채우는 멍해 보이는 소녀의 얼굴을 진득하게 훑었다. 그러자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고 숫제 불이 난 듯 두 뺨이 아렸다. 첼로를 연습하면서 굳은살이 박이던 시간들을 전부 합친 것보다도 훨씬 아팠다. 온몸이 쿡쿡 쑤셨지만 딱히 멈추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가까이서 보니까…… 더 예쁘다.”
“―…완전히 맛이 갔…―”
“근데 왜 나는 안 보고 자꾸 다른 데만 봐?”
권채우가 까치발을 들고 저보다 키가 큰 소녀를 잡아당기는 순간이었다.
“채우야!”
찢어질 듯한 외침에 고개가 절로 돌아갔다. 다급하게 들어온 엄마는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얼굴이 새파랬다. 아이의 어깨를 짚은 손이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에 권채우는 내심 눈치채고 있던 그들의 비정상적인 일상이 박살 나기 일보 직전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우리 지금 도망쳐야 돼?”
“일단 어디로든 가요, 여기서 이럴 문제가 아니에요!”
얼굴은 굳힌 이연이 그를 잡아끌었다. 권채우는 엄마가 이끄는 대로 딸려갔다. 산속을 얼마나 정신없이 달렸는지 다리가 아프고 숨이 찼다. 얼굴을 험상궂게 구긴 아저씨들은 생각지도 못한 방향에서 계속해서 쫓아왔고, 막내 도련님, 채우 도련님―! 따위의 말이나 해 대며 엄마가 아닌 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윤주하는 아이의 어깨뼈를 잡아 빼기라도 하듯 거칠게 팔뚝을 당겼다. 공포에 질리다 못해 잔뜩 일그러진 콧잔등은 꼭 짐승의 그것 같아서. 권채우가 여인의 손을 먼저 놓은 게 본능인지, 이성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이번엔 소년이 엄마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엄마, 엄마는 먼저 도망쳐……!”
“권채우 씨, 정신 좀 차려 봐요―!”
“저 아저씨들이 내 이름을 알아, 엄마가 아니라 나를 쳐다봐!”
엄마, 있잖아. 왜 나는 학교에 못 다녀? 나는 왜 친구를 사귀면 안 돼? 우리는 왜 숨어서 사는 거야? 엄마……, 대체 무슨 잘못을 한 거야?
“산 바로 밑에 집이 그 누나네 집이야. 다른 데 말고 그 집부터 가. 만약 누나가 모른 척하면 그동안 나한테 들은 음악 값 전부 내라고 해……!”
“권채…―”
“나무 밑에 내가 좋아하는 씨디 묻어놨어. 내가 노래하는 나무야, 그게 증거야! 얼른 가, 조금 있다가 다시 만나……!”
그 순간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됐다. 열셋의 아이는 어느새 사라지고 키가 훌쩍 큰 권채우가 윤주하의 손을 꽉 붙들고 있었다.
이렇게 헤어지면 그들은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한다. 그 미래를 이미 겪고 온 권채우가 어두운 표정으로 멈칫했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어머니를 눈앞에 두었지만, 남자는 간신히 숨만 내뱉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끅끅 우는 윤주하는 지금의 소이연과 한두 살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나이였다. 그 때문일까, 그는 잠시 새삼스러운 감상에 빠졌다. 윤주하는 기억 속의 어머니보다 훨씬 젊고 대책 없으며 어리숙해 보였다.
친가족을 만난 뒤, 그들은 하루라도 빨리 유괴범의 세뇌에서 벗어나야 한다며 아이를 들들 볶았다. 세뇌 해제라는 웃기지도 않는 말과 함께 권채우는 정신과 의사들에게 내내 시달려야 했다. 그렇게 의사들은 번갈아 가며 윤주하의 사랑을 한 꺼풀씩 벗겨내고 폄훼했다.
“채우 군, 진짜 아이를 사랑하는 엄마라면 그렇게 산속에 숨어 아이를 방치하지 않습니다. 초등학교도 다닌 적 없다고 했죠? 게다가 채우 군은 영양실조에 신장도 몸무게도 평균보다 뒤떨어져요. 윤주하를 제외하면 제대로 된 인간관계도 경험해 보지 못한 것 같은데. 어제도 형제들을 물었다죠? 과연 이게 건강한 사랑을 받은 사람의 행동일까요? 윤주하는 어머니가 아닙니다, 유괴범일 뿐이에요.”
그때마다 권채우는 강한 반발심과 울분을 느꼈지만, 동시에 심장 안쪽이 까맣게 오염되었다.
어른이 되어가는 시간 동안 그가 한 일이라곤 사랑을 의심하고, 형체 없는 미움을 키워간 것뿐이었다.
외골수처럼 어머니만 그리워하며 산 것 같지만, 실은 그 누구보다 원망하고 있었음을 소이연을 만난 이후 깨달았다.
‘또다시’ 기만당했다는 생각에.
‘또다시’ 누군가에게 휘둘리는 게 진절머리 나게 싫고 무서워서. 애써 덮고 무시해 오던 감정이 들쭉날쭉 거세게 날뛰었다.
이연에게 본능적으로 끌리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이 신경 쓰여 미칠 것 같았으면서도, 애써 부정했다. 그녀가 제 아이를 임신하고도 규백이의 안전을 위해 권 가(家)로 들어왔다는 걸 알게 되기 전까진.
“……어머니.”
비록 도망치며 살아야 했지만, 어머니와 함께한 삶은 풍성했다. 옷은 낡았을지언정 깨끗했고, 권채우는 항상 윤주하보다 따뜻하고 넉넉한 밥을 먹었다.
조그마한 아들을 품에 쏙 안고 손톱과 발톱을 깎아주던 일부터, 노래를 부르다 잠에 드는 일까지 허름한 집에서는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하지만 밤새 열이 치솟아도 병원 문을 두드리지 못할 때면, 윤주하는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전화기를 들었다 놓기를 반복했다. 권채우는 어린 나이에도 죄책감과 고통으로 일그러진 엄마의 얼굴을 보는 게 불안하고 무서워서, 그녀의 옷자락만 꾹 잡아당겼다. 그러면 윤주하는 와락 울음을 터트리며 열꽃이 오른 아이를 있는 힘껏 끌어안아 주었다.
쓴 약을 토하는 바람에 시큼해진 아이의 입에 입을 맞춰 주고, 열에 헐떡이는 가슴과 가슴을 맞대고, 이마와 이마를 딱 붙이면서 윤주하는 “우리 아들이 엄마 기운 다 가져가라, 가져가라.” 하며 밤새 얼러주었다. 아이는 아픈 것도 다 잊고 포근한 냄새에 배시시 웃음을 흘렸다.
“또 유괴 당해 줄게요.”
그는 평생을 그리워했던 어머니를 끌어안고 결국 항복하듯 고개를 숙였다. 이 너절한 순간이 두 사람의 진짜 마지막이어서. 권채우는 울고 있는 어머니의 눈물을 닦아 주며 말했다.
“몇 번이든 날 첼로 가방에 훔쳐 가요. 그 대신……”
그가 고통스럽게 얼굴을 콱 구겼다가 다시 무표정을 가장했다.
“죄송해요, 어머니. 꼭 권 가(家)를 부수어드리고 싶었는데.”
그가 눈을 질끈 감으며 뇌까렸다.
“내가, 씨발, 그 좆같은 집안을 이어받을까 해요.”
그건 권채우가 죽기보다 싫어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를 구성하고 있던 근간을 미련 없이 버리겠다 선언하고 있었다.
“내가…… 어머니를 포기하려고 해요.”
“…….”
“어머니를 잃고는 음악이 잘려 나갔지만, 그 여자가 없으면……”
어느새 다 장성한 아들이 무릎을 꿇고 사죄를 했다.
“……죄송합니다.”
이번에는 반드시. 사랑하는 이의 곁을 오래도록 지키고 싶어서.
“절 훔쳐 주셔서. 사람으로 키워 주시고, 사랑을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
“평생 죄인으로 살아가겠습니다.”
어머니, 이제는 그 여자가 제 어린 시절이고, 새로운 음악이에요.
가장 아팠던 잎을 마침내 떨구고 나아가는 순간, 권채우의 시야가 또 한 번 빙글 돌았다.
한편, 써머를 마신 남자를 데리고 호텔방으로 올라온 이연은 이 모든 상황을 혼란스럽게 목격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