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
“한번 웃어 보세요, 환하게!”
메이크업 아티스트의 말에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자 그곳에 끈적한 뭔가가 발라졌다.
이연은 아침 댓바람부터 방문을 두드리는 사람들로 인해 하루를 정신없이 열었다.
그들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이연을 꼼꼼히 살피더니 그대로 차에 태워 샵으로 데려갔다. 그곳에서 그녀는 이브닝드레스만 수십 번 갈아입어야 했고, 부스스한 머리는 어느새 아래로 둥글게 말려 있었다.
“이미지가 워낙 깨끗하셔서 액세서리는 화려한 걸로 골랐습니다.”
마침내 눈을 뜬 이연은 거울 속에 갇힌 낯선 자신을 보았다. 눈두덩에 은은하게 올라간 색조, 선명해진 눈매, 물기를 머금은 피부외 입술.
진녹색의 크리스털 귀걸이는 움직일 때마다 시시각각 다른 빛을 냈고, 허리 아래로 풍성하게 떨어지는 순백의 드레스는 우아했다.
“이사님도 보시면 아마 깜짝 놀라실 거예요.”
그러나 한껏 꾸며진 제 모습을 보는 이연의 기분은 한없이 가라앉아 있었다. 권채우는 팔다리, 옆구리 할 것 없이 전부 하얀 붕대가 휘감고 있는데, 그녀는 흰 드레스를 입고 누군가와 입장을 한다.
“소이연 씨.”
마침 거울 속에서 권기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이연의 차림새를 훑으며 커프스단추를 잠그고 있었다. 거울을 통해 상대를 떠보고 경계하는 각기 다른 시선이 마주쳤다.
“기념식 도중 힘들면 말씀하셔도 됩니다.”
그는 서늘한 눈빛을 하고 있었지만, 어떤 위협이나 악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정중하다면 정중한 편이었다.
“제가 어제 제안한 건에 대해서는, 마음을 정하셨습니까?”
“……아니요.”
“시간이 더 필요하신 거라면 충분히 고민하시고 알려주십시오.”
별안간 권기석이 그녀의 어깨를 꽉 잡아 눌렀다. 맨살에 와 닿는 손길이 차가웠다.
“그리고, 웃으십시오.”
화이돔 개관 기념식 파티.
이연은 권기석을 따라 화려한 샹들리에 아래를 누비며 미소를 꾸며내느라 입가에 경련이 일 지경이었다. 그는 시시때때로 힘들지는 않으냐고 살뜰히 물어왔지만 이연은 그런 친절이 전혀 반갑지 않았다.
개장을 앞두고 있는 국내 최대 규모의 식물원. 식은 차분하고 상식적으로 진행되었다.
화양시의 시장, 기획재정부 장관, 건설회사 대표 등의 주요 관계자들이 단상 위로 올라가 기념사와 축사를 읽었다.
기품 있는 박수가 쏟아질 때도 이연은 다소 뚱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완공된 화이도의 모습이 홀로그램으로 연회장을 가득 메우는 순간, 작은 감탄을 숨처럼 틔울 수밖에 없었다.
“와…….”
화이돔은 마치 지상낙원 같았다. 처음 보는 듯한 외국의 값비싼 나무들과 꽃, 완벽하게 구현해낸 열대 우림과 폭포가 태초의 동산을 떠올리게 했다.
그렇게 가상의 화이돔을 구경하며 박수를 치다 보니 기념식은 별다른 소동 없이 끝이 났다.
그동안 원치 않아도 별의별 일을 겪어야 했던 이연은 그제야 바짝 세우고 있던 어깨를 편히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녀는 연회장을 빠져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도 되나요?”
어수룩한 질문에 권기석은 픽 웃음을 흘렸다.
“아니요, 진짜 볼일은 지금부텁니다.”
“네?”
“기억 안 나십니까?
“무슨―”
그 순간, 연회장을 밝게 비추고 있던 반원형의 창문들 위로 새까만 블라인드가 내려왔다. 샹들리에의 조도가 낮아지고, 빠져나가는 사람들을 거르던 문도 서서히 닫혔다.
기념식에 비한다면 이제 남은 사람은 반절 정도. 그들은 하나같이 무언가를 기대하는 눈빛으로 권기석을 쳐다보고 있었다.
한순간에 뒤바뀐 분위기에 이연은 넣어두었던 경계심이 스멀스멀 다시 올라오는 것 같았다.
권기석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이연을 스쳐 지나가더니, 곧장 단상 위로 올라갔다.
마이크 앞에 선 남자는 짙은 음영에 뒤덮여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오늘, 저희 수국제약이 오랫동안 돈과 시간을 들여 매달려왔던 신약을―”
마침 작은 문이 열리고 단정하게 차려입은 서버들이 샴페인 잔을 들고 일렬로 들어왔다.
“처음으로 공개합니다.”
권기석은 노란빛이 감도는 술에다가 벨벳으로 된 반지 상자를 기울여 웬 가루를 뿌려 넣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가루는 순식간에 기포를 내며 형체도 없이 녹아들었다.
“환각제 마약류인 LSD의 일종입니다. 몇 년 전, 저희는 학계에 등록되지도 않은 희귀식물을 오랫동안 연구, 투자하여 다량 재배하는 데 성공하였고, 기존의 마약 성분보다 무려 35배나 더 높은 수치를 만들어냈습니다. 그 후로도 여러 시행착오 끝에 탄생한 이 신약의 이름은 써머.”
문득 권기석의 눈길이 이쪽을 향했다.
“기억의 왜곡을 통해 당사자가 바라던 것을 시청각으로 재현해주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환각제입니다.”
그 말에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술잔을 단번에 들이켰다.
써머(Summer).
이상하게 뒷머리가 당기는 기분이었다. 이연은 엇박자로 불안정하게 뛰는 심장 박동에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순간 조경천 원장의 말이 중구난방으로 떠올랐다 사라졌다.
‘이연아, 여기서 그만둘 수는 없겠냐.’
‘용케 4차까지 올라오고. 떨어져도 진즉 떨어졌어야지. 나는 여러 번 기회를 준 것 같은데, 이러면 정말 곤란해져.’
‘화이돔에 가까이 갈수록 한 번쯤은 듣거나 만나게 될 거다.’
‘수국 제약, 그 뒤에 있는 권 가(家)’
‘순진한 나무의사는 절대로 감당할 수 없으니까.’
그는 왜 이연을 막으려 들었으며 은근슬쩍 경고를 흘렸을까. 이연은 찝찝하고 달갑지 않은 느낌에 미간을 찌푸렸다.
뭐를 놓치고 있지?
그때 이연의 생각을 방해하기라도 하듯 눈앞에 술잔이 들이밀어 졌다. 어느새 단상에서 내려온 권기석이 그녀에게 써머가 든 잔을 내밀고 있었다. 마실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지만, 이연은 조용히 술잔을 건네받았다.
써머, 써머……. 이연이 생각에 골몰하는 사이, 마침내 약을 받아 마신 사람들에게서 조금씩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허공을 보며 혼잣말을 하고 춤추듯 움직였으나, 대체적으로 반응은 크게 두 가지였다.
울거나 웃거나.
그 단순한 감정의 진폭이 여기까지 느껴졌다. 놀랍게도 과격하게 구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분명 마약을 한 것이 분명함에도 그들은 마치 신을 목격한 듯 두 손을 꼭 쥐고 있었다.
“저마다 보고 싶었던 것을 마주하고 있을 겁니다.”
조경천, 화이돔, 마약밭, 수국제약, 그리고 권기석, 신약 써머. 그 모든 것들이 이연의 신경 어딘가를 예민하게 긁고 있었다. 닿을 듯 말듯, 맞춰질 듯 맞춰지지 않는 그림이었다.
“앞으로 욕망과 향락의 판도가 바뀌는 건 시간문제일 겁니다. 사람들은 현실보다 환상 속에서 오랫동안 머무르려 할 테니까.”
“…….”
“소이연 씨는 그리운 게 있습니까?”
“……윤주하 씨.”
이연의 입이 충동적으로 열렸다.
“혹시 윤주하 씨 이름에서 따온 건가요? 써머라는 건.”
이연은 자신의 직감을 따랐다. 주하의 하. 이 써머란 이름은 여름 하(夏)에서 따온 것이 아닌지.
그 순간 권기석의 기세가 확 돌변했다. 그건 얼어붙어 있던 빙판에 쩌저적 한 줄기 금이 가는 소리였다. 권기석은 온갖 구더기가 들끓는 듯한 눈동자로 이연을 응시했다.
“이제는 개나 소나 윤주하를 들먹거리는군.”
뱀 같은 눈이 이연을 역하게 파고들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게 있다. 지금의 권기석에게선 해묵은 악의가 흘러나왔다.
감정보다는 차라리 광기에 가까운 어떤 것. 그 눈빛을 받아내는 것만으로도 이연은 손끝이 굳고 속이 욱신거렸다.
허리를 굽힌 그가 이연의 귀에 낮게 속삭였다.
“윤주하가 왜 죽었는지 아십니까?”
아슬아슬하게 코끝이 맞닿을 정도로 얼굴이 가까웠다. 이상하게 숨이 막혔다.
“내가 왜 그런 지독한 여자 이름을―”
그때 웬 나무막대기 같은 게 맞붙어있는 두 사람 사이를 쑤시고 벌리듯 거칠게 파고들어 왔다.
“두 사람, 좀 떨어지지 그래.”
“……!”
화들짝 눈이 커진 이연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엔 목발을 짚고 비딱하게 선 권채우가 있었다.
심장이 녹을 것처럼 가슴께가 화끈거린 것도 잠시, 이연은 그가 아슬아슬하게 쥐고 있는 빈 술잔에 눈길이 멎었다.
그대로 사고가 정지된 그녀는 아무래도 환자가 엄한 걸 먹어 버렸다는 생각에 울컥 치받는 감정은 잠시 제쳐두고 펄쩍 뛰기부터 했다.
“지금…… 이게 뭔 줄 알고……!”
“오늘은 교복 어쨌어?”
……뭐?
이상하게 순진해 보이는 얼굴로 눈을 끔뻑이던 권채우가 턱을 기울였다.
“내 연주 안 듣고 싶었어?”
뭐라는 거야?
“대체 그런 몸으로 가긴 어딜 가신다는 겁니까!”
장범희는 침대 밖으로 나가려는 권채우를 필사적으로 막았다.
이미 사냥개의 불복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온 상태에서 권채우는 차라리 깨어나지 않는 편이 좋을 것이다. 그래서 어젯밤 내내 자리를 지키던 이연에게도 깨우지 말아 달라 염치도 없이 고개를 숙였는데……!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서봤자 좋을 거 하나도 없습니다!”
“누가 개새끼들 걱정한대? 소이연 어디 있어?”
“예?”
“무사한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으니까 네가 데려올 거 아니면 비켜.”
권채우는 막무가내로 한 사람만을 찾아댔다.
“지금 소이연 씨는……”
순간 장범희가 머뭇대자 권채우의 얼굴이 야차처럼 일그러졌다. 찰나의 침묵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권채우가 그를 퍽 밀쳤다. 순간 식은땀이 흠뻑 날 정도로 온몸이 저릿저릿했지만 그는 어금니를 꽉 문 채 기어이 한 걸음을 내디뎠다.
“아니지?”
“예?”
“씨발, 나만 두고 그 여자 도망친 건 아니지?”
“…….”
“오늘이 며칠이야? 대체 얼마나 잔 거야……!”
권채우가 이마를 붙들고 숨을 거칠게 몰아쉬자 보다 못한 장범희가 빠르게 태블릿을 켜서 들이밀었다.
“도련님, 소이연 씨는 무사합니다. 일단 진정부터 하십시오!”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
과격하게 흔들리던 동공이 이내 화면에 박힌 듯 고정되었다. 그는 숨을 쉬어야 한다는 것도 잊은 채 태어나 처음으로 눈을 떠본 봉사처럼 허겁지겁 사진을 쳐다보았다.
“현재 소이연 씨는 화이돔 기념식에 참석하고 계십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활짝 웃었던 게 언제였더라?
이연은 권기석과 다정하게 팔을 얽고 시종일관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채 수줍게 미소 짓는 여자는 제가 알던 사람이 아닌 듯 낯설기만 했다. 그 사실 하나가 부러진 갈비뼈보다도 아프게 내장을 찔러서. 나란히 선 두 사람을 보면 볼수록 속이 수틀리고 흰자위에 시뻘건 열이 몰렸다.
“대체 어떤 새끼가, 하얀색 드레스를 입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