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
이연은 빈 도시락 통을 들고 사무실을 털레털레 나섰다. 혹시나 저번 파티에서처럼 누군가의 눈에 띌까 싶어 건물을 빙 돌아 산책로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2만 평은 족히 넘어 보이는 야외 정원을 힐끗 곁눈질하니 미술품과 도자기를 소개하는 경매 사회자의 목소리가 마이크를 통해 드문드문 들려왔다.
제일 앞줄에는 권기석도 보이는 듯했지만 애초에 이연은 이번 행사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오늘은 제법 시간이 남으니 규백이랑 같이 놀아야지, 기껏해야 그런 생각이나 하며 산책로를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어……, 괜찮으세요?”
이연의 시야에 나무를 짚고 숨을 몰아쉬고 있는 한 노부인이 걸려들었다.
이내 당황한 그녀가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도움을 줄 수 있는 사용인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이연은 조금 머뭇거리다가 그녀에게 다가갔다.
“저기…….”
노부인은 후― 하고 깊은숨을 내쉬며 허리를 곧게 폈다. 고급스러운 차림새에 서릿발 같은 기백. 이연은 빠르게 부인의 상태를 살폈지만 상대는 묘하게 인상을 쓰며 떨떠름해 했다.
이연도 괜한 오지랖은 넣어둔 채 조용히 노부인을 지나치려 했지만, 몇 발자국 가지도 못하고 뒷머리를 긁적이며 되돌아왔다. 그녀의 기준으로, 이건 나무에 관련된 일이기 때문이었다.
“저기, 지금 짚고 계신 그게 옻나무거든요.”
입가에 흰 손수건을 댄 노부인이 이쪽을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알레르기가 돋으신 것 같은데.”
노부인이 딱딱했던 표정을 깨고 눈을 깜빡거렸다. 팔뚝과 목덜미에 오른 붉은 발진이 심상치 않았다. 옻나무를 접해 보지 않았다면 충분히 모를 수도 있다.
“제가 의무실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항히스타민제나 약부터 발라야 할 것 같아요.”
“……아니, 내 주치의에게 가겠네.”
목이 붓기라도 하는지 그녀의 목소리가 호흡에 짓눌려 나왔다.
“아무래도 오늘은 일찍 돌아가는 게 좋겠어. 콜록……!”
“돌아가는 길은 아세요?”
섹스 파티 참석자들에 비한다면 부인들은 점잖았고, 행사는 이제 막 시작이었다.
그러니 이 정도는 괜찮을 것이다, 정원에 깊이 들어가지만 않는다면. 이연은 노부인의 팔을 부축한 채 걸음을 내디뎠다.
“마르크 샤갈의 ‘초상화’입니다. 러시아에서는 3천 루블로 공식 평가됐으나 서방으로 밀반입된 이후로는 55만 달러에 거래되었고, 다시 저희 쪽에서 선보이게 됐습니다.”
정원과 가까워질수록 활기가 느껴졌다. 따뜻하게 내리쬐는 햇살과 우아한 웃음소리가 값비싼 테이블보처럼 엮여 들었다.
이연은 아스팔트와 잔디가 극명히 나뉘는 부분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선을 넘지 않는 적당한 곳에서 노부인과 인사를 나누고 그녀의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았다. 그녀의 동행인이 걱정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까지 확인한 후에야 비로소 시선을 뗄 수 있었다.
그리고 아스팔트 쪽에 있던 서버, 사용인, 그리고 낯익은 정원관리사들과 눈인사를 나누며 걸음을 돌릴 때였다.
“―끼아아아악!”
누군가의 찢어질 듯한 비명에 돌연 다리가 얼어붙었다. 심장이 발등까지 쿵 내려앉은 이연이 떨리는 눈으로 돌아본 순간, 시간은 느릿하게 흘러갔다.
그곳엔 외국인으로 보이는 부인 한 명이 이마가 꿰뚫린 채 피를 흘리고 있었다. 부인은 채 눈을 감지도 못한 채 앞으로 고꾸라졌다.
“……!”
모두가 얼어붙고 만 끔찍한 침묵이었다.
하지만 상황 파악을 하기도 전에 두 번째, 세 번째 총알이 쉬지 않고 날아들었다.
어딘선가 다다다다―! 연사되는 총알에 테이블이 쓰러지고, 유리병이 깨지고, 단상 위 밀수품들은 너덜너덜 숫제 벌집이 되었다.
“대체 이게 무슨……!”
“흐아악!”
정원에 있던 부인들은 사색이 되어 헐레벌떡 도망을 쳤고, 건물 안에 있던 경호원들이 뛰쳐나왔다. 개는 컹컹 요란하게 짖어댔고 누군가는 고함을 쳤다.
핏기가 싹 가셨던 이연도 조금씩 뒷걸음을 치기 시작했다. 올곧게 세워져 있는 것은 모두 박살이 나고 있었다.
그때, 싸늘하게 굳은 권기석이 한쪽 귀를 누르고 입술을 움직였다.
―문 닫히기까지 3분. 거기서 얼른 빠져나와.
웃음기가 한가득 배인 권이준의 음성을 들으며 저격수는 마침내 방아쇠에서 손을 뗐다.
그는 권이준의 명령대로 정원을 파괴하듯 총알을 연사하며 반원형의 단상을 반파시켜 놓았다.
그렇게 1.5km 거리를 조준경으로 확인하고 있는데, 별안간 주위를 훑는 권기석과 눈이 스치듯 마주쳤다.
“……!”
권기석은 총알이 쏟아진 방향을 말미암아 저격수의 위치를 대강 솎아내는 중인 듯했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난 남자는 빠르게 총을 해체하며 자리를 벗어났다.
그 시각, 주변을 경호한다는 명분으로 오히려 저격수를 지키고 있던 권채우가 귀에 손을 댔다.
파키스탄 대사관 부인이 죽고, 정원이 쑥대밭이 된 초미의 상황에서 권기석은 조금 숨 가쁜 목소리로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죽여.
주어가 불분명했다. 권채우가 미간을 구기며 달려오는 저격수를 차에 태운 순간.
―눈에 보이는 저택 직원들을 사살해라.
“……!”
―이 시간부로 권 가(家)도 총기 난사의 피해자로 전환한다.
권 가(家) 내에서 벌어진 총기 사건.
그러나 사망자는 고작 한 명.
의심의 눈초리를 피하기 위해 권기석이 찰나에 선택한 방법이었다. 권 가(家)를 향한 예고 없는 공격에도 권기석은 빠르게 퇴로를 마련했다.
파키스탄 측에서 문제를 키울 것을 우려하여 기왕에 살점을 내준 김에 뼈까지 내어 주자는 심산이었다.
―대사 부인 목숨값으로는 차고 넘칠 정도로 죽여.
“……!”
싸늘한 엄명이 귓속을 재차 파고들었다. 하지만 권채우의 명령을 기다리느라 사냥개들이 어쩔 수 없이 침묵만 지키고 있자, 권기석은 그 즉시 다른 언어로 지시했다.
―Shoot any staff on sight. (눈에 보이는 저택 직원들을 사살해라.)
―حسنا (알겠습니다.)
―Roger that.
이죽거리는 소리와 함께 분부에 반응한 건 사냥개가 아니었다. 권채우의 입술에 비뚜름한 미소가 걸렸다. 마침내 권기석의 새로운 패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두세 발 앞서 생각하라는 둘째 형의 조언에 따라 권채우는 이때를 내심 기다려왔다.
권이준의 판은 이미 끝났다. 그렇다면 이제 권채우의 목표는 제집 앞마당에 들어와 있는 악명 높은 용병들을 한 번에 처리하는 것.
그는 속도를 높여 지정된 장소에 저격수를 떨군 뒤 거침없이 후진을 했다.
이상하게 심장이 술렁거렸다. 사살 시간이 빨라도 너무 빨랐는데, 이연 씨는 잘 들어가 있겠지.
권채우는 초조한 마음을 간신히 억누른 채 운전대를 크게 꺾었다. 이내 좌석 밑에 있던 자동소총과 탄창을 꺼내고, 인이어까지 갈아 끼웠다.
그리고 웅크려있던 사냥개들에게 곧장 명령을 내렸다. 지독할 만큼 표정이 없었다.
―단 한 마리도 남기지 마.
“흐아아악! 도망쳐……!”
“으씨, 걸리적거리게……! 저, 저리 비켜!”
남녀노소 할 것 없는 비명이 엉망으로 섞인 자리에 총알이 푹푹 박혔다. 푸르고 깨끗했던 잔디밭은 연신 흙과 함께 튀어 올랐다.
커다란 정원이 한낱 사육장처럼 변질된 건 눈 깜짝할 새의 일이었다.
경호원들이 미래회 부인들을 모셔간 이후, 소강기에 접어든 듯 잠시나마 고요해졌던 이곳에 다시 한번 총알이 빗발쳤다.
탕 탕 탕 탕―!
생전 처음 맡아보는 탄약 냄새가 콧속을 강압적으로 틀어막았다. 그에 사람들은 달렸다. 몸을 숨길 수 있는 엄폐물이라곤 저택뿐인 이 너른 정원을 필사적으로 가로질렀다.
잔뜩 얼어붙어 있던 이연도 도망치는 사람들에게 몇 번이고 치이고 나서야 간신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총성 때문에 귀가 먹먹했다.
“흐으……!”
아비규환이었다.
빨리 저택 안으로 들어가―! 누군가 그렇게 소리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거리가 너무 멀었다. 이미 목 끝까지 차오른 숨 때문에 식도가 따끔거렸다.
“흐으, 으……!”
때마침 앞서가던 사람들이 뚝 잘린 수수깡처럼 고꾸라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무너진 등이 둥글게 피로 젖어갔다.
“아. 아―!”
충격으로 일그러진 동공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연은 도망치는 사람들을 전부 쏴 죽이고 있는 이 끔찍한 정원을 도무지 완주할 자신이 없었다. 그녀의 입에서 새된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그러던 중, 허공에서 거울 같은 무언가가 반짝였다. 이연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순간적으로 몸을 낮추고 머리를 감싸 안았다. 그녀는 엉금엉금 기어가 이미 처참하게 부서진 테이블 안쪽으로 들어갔다.
당장이라도 심장이 터져 죽을 것처럼 온몸이 박동했다. 숫제 처절하기까지 한 피 맛을 목구멍 너머로 삼키고 있는데, 저벅저벅 누군가 붉어진 잔디를 밟고 걸어오고 있었다. 이연은 마구잡이로 내쉬고 있던 숨을 그 즉시 멈추었다.
철커덕, 장전된 차가운 총구가 그림자처럼 그녀를 덮으려 할 때였다.
“―소이연!”
끼이익― 찢어질 듯한 브레이크 소리가 사람을 그대로 들이박고 멈추어 섰다.
“여기까지만 달려와!”
익숙한 목소리에 이연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맺혀 있던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읍…… 윽…….”
“괜찮아. 괜찮으니까 이리 와!”
그녀를 안심시키려는 말과는 달리, 표정을 와락 일그러뜨린 권채우가 차창 밖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부들들 떨리는 무릎을 이 악물고 펴자 때마침 연막탄 두개를 반대편으로 던진 그가 쏜살같이 뛰쳐나왔다.
그러는 동안에도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총알에 차창 유리가 박살이 나고 시트는 너덜너덜해졌다. 다행히도 빠르게 피어오른 연기가 시야를 가렸다.
“씨발, 더는 이 집구석에 너 못 두겠으니까, 내가 어디로 보내든 그런 줄 알아.”
권채우가 이연을 감싸듯 훌쩍 안아든 순간, 그가 몸을 가누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맞닿은 가슴팍에서부터 불길한 진동이 퍼졌다.
‘……어?’
멈칫한 이연이 그를 올려다보았지만, 권채우는 무표정할 따름이었다.
“보고해.”
―타깃 열 명 중 여덟 처리했습니다.
“두 명 위치는.”
―9시 방향 B-1 구역에 한 명, 13시 본채 방향에서 한 명입니다.
“B-1은 너희가 처리하고, 즉시 빠져나간다. 각자 세이프 하우스에서 대기하도록.”
그때, 이미 공포에 질려 넋이 나간 사용인 하나가 운전석에 대뜸 올라타 차를 출발시켰다. 권채우가 버럭 욕설을 내뱉었지만 지그재그로 위태롭게 나아간 차는 결코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집중적으로 쏟아지기 시작한 총알 세례에 결국 타이어가 주저앉고, 앞 유리창이 전부 깨졌다. 문틈으로 피가 새어 나올 때까지 자비 없는 총성은 그칠 기미가 없었다.
“고개 숙여요.”
권채우는 이연을 다시 테이블 안으로 내려놓고 등을 보였다. 피에 젖은 손이 이연의 머리를 툭 밀어 넣었다.
“다시는, 이연 씨 몸에 상처 안 남겨요.”
큼지막한 전신이 이연을 완전히 가리고 섰다. 철커덕, 그가 자세를 잡고 총을 장전했다.
남은 저격수들의 위치를 마침내 파악한 권채우가 한쪽 눈에 조준경을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미안해요.”
……피? 새빨갛게 물든 젖은 그의 흰 와이셔츠를 보며 이연은 사고가 멈춰버렸다. 언제? 어떻게……! 그걸 묻기도 전에 다시 총알이 권채우를 향해 벼락처럼 쏟아졌다.
“그때, 다치게 내버려 둬서.”
낮은 목소리가 신기루처럼 흩어졌다.
탕 탕 탕 탕―!
그가 쏘는 건지, 아니면 맞고 있는 건지 권채우의 몸이 연신 반동으로 들썩거렸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거짓말처럼 총성이 뚝 멈추었다. 그리고 피비린내가 진동을 하는 적막 속에서, 축축해진 권채우가 천천히 무너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