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권채우는 곯아떨어지는 순간에도 이연에게 매달려 왔다. 그녀가 훌쩍 가버릴 것을 걱정하듯 손목을 수갑처럼 옥죈 채 잠이 들었다.
이연은 다짜고짜 그에게 삼켜졌던 귀와 입술이 아직도 욱신거려 살이 까진 것처럼 홧홧했다. 그는 애처롭게 굴다가도 기회가 생기면 이렇듯 콱 물어버리는 남자였고, 이연은 휘둘리지 않기 위해 더욱 강하게 맞불을 놓아야 했다.
손바닥이 화끈거려 펼쳐보니, 초승달 모양의 손톱자국이 새빨갛게 나 있었다.
‘어후……. 고단해……. 개운한데 고단해…….’
기가 팍 꺾었다가도, 다시 사람을 씹어 먹을 듯 휙휙 돌변하던 권채우의 눈빛이 잊히지 않는다.
그럼에도 가슴 한편에 방치해 두었던 새까만 기름때가 조금은 씻겨나간 것 같아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정말이지 진이 다 빠지는 기 싸움이었다.
말 뿐인 제약은 특히나 힘을 갖춘 사람들에겐 언제나 떼어버릴 수 있는 하찮은 스티커나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권채우가 언제 어떻게 달려들지 몰라 손바닥이 갈리고 내내 식은땀이 났지만, 놀랍게도 그는 끝까지 장단을 맞춰 주었다.
그 뜻밖의 동기를 여러 갈래로 의심해 보던 이연은 어느 순간 졸다 깨기를 반복했다.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권채우의 숨소리가 들렸고, 편안하게 풀어진 얼굴이 보였다.
그렇게 몇 번을 더 되풀이 할 때쯤―
“이런 게 좋은 아침이었네요.”
“……!”
“이연 씨가 내 옆에서 자고 있길래 또 환각인 줄 알았어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차분하게 말하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어제처럼 수면제를 맞아 반밖에 뜨지 못하던 혼곤한 눈꺼풀이 아니다. 퀭하거나 피로했던 기색은 사라지고 또렷하게 이연을 담고 있었다. 창밖을 보니 어느덧 날이 밝아 있었다.
“……환각이요?”
그녀가 어색하게 몸을 일으키며 물었으나 권채우는 말없이 입꼬리만 당길 따름이었다.
“어젠 재밌었어요?”
“……네?”
“나는 미쳐도 몇 번을 미쳤었는데.”
그건, 권채우 씨가 먼저 내 귀를……! 또 무슨 꼬투리가 잡힐까 싶어 숨을 크게 들이쉴 때였다.
“또 하자고 하면, 나랑 계속 놀아줄 거예요?”
“……!”
기가 죽기는커녕, 완전히 살아난 남자를 보며 이연은 기가 막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노랗게 아침 햇살이 스며든 눈이 어여삐 휘어졌다.
“아―, 이연 씨 앞에서 재롱떠는 게 너무 좋더라고.”
* * *
“요즘 계속 도시락이시네요?”
점심시간, 우르르 사무실을 빠져나가는 직원들 속에서 홀로 도시락을 꺼내자 누군가 아는 체를 해 왔다. 이연은 다소 겸연쩍은 미소로 그들을 배웅하며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보온통에는 훈훈하게 김이 올라오는 된장국이 담겼고, 반찬은 총 일곱 개였으며, 흰쌀밥은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며칠 새 이 도시락 때문에 조금 살맛이 났다. 권채우의 솜씨인지, 다른 사람에게 대신 일을 시킨 건지는 먹어보면 안다. 그는 약속대로 착실히 도시락을 직접 싸 주었고, 밤이면 또 다시 그녀의 문 앞을 지켰다.
후룩―.
국물을 호호 불어 먹으니 속을 데우는 온기가 둥글게 퍼져갔다.
이연의 출근시간에 맞춰 직접 도시락까지 배달해 주는 권채우는 항상 무언가를 기대하는 눈빛으로 처량하게, 혹은 직설적으로 그녀를 응시해왔다. 흰 마스크 위로 보이는 눈빛은 이연이 기억하는 남편의 것이었고 그래서 오래 마주보고 있기가 힘들었다.
‘여전히 이연 씨 남편이라면요? 화이도를 떠나던 날, 내가 이연 씨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면요.’
이제와 그래 봤자.
‘……하아, 이연 씨는 나를 묻어야 살 수 있었겠지만, 나는 곧 죽어도 이연 씨를 끄집어내야 숨이 쉬어졌거든요. 그렇다면 둘 중에 누가 더 독한 걸까요?’
묻은 자와 꺼내려는 자의 알력 다툼은 정신력을 상당히 소모하는 일이라 둘 중 한쪽이 포기하지 않는 이상,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았다.
그렇게 답 없는 문제에 골몰해 있던 이연은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간신히 죽은 셈 쳤는데, 왜 이제야 나타나선 사람을 머리 아프게 해?
그녀는 젓가락질을 멈추고 물만 벌컥벌컥 들이켰다. 입에 딱 맞는 음식이 필요했던 것과는 별개로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정성을 씹어 넘기는 일은 버거워졌다.
그렇게 잔뜩 찌푸려진 눈썹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중, 활짝 열어둔 창밖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넘어왔다.
“팀장님, 저번에 주문해 뒀던 건 어디 있어요?”
“아니요, 그쪽 말고 여기요―! 열 맞춰서 놔주세요!”
오늘은 미래회의 자선 경매가 있는 날.
정원관리사들은 반원형의 아치를 들여놓고 단상과 테이블을 꽃으로 꾸미느라 작업 케이스를 든 채 정신없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미리 해충을 박멸해 두었던 이연은 더 이상 신경 쓸 업무가 없어 의자에 등을 깊숙이 기댔다.
꽃향기가 더해진 가을 날씨가 참으로 좋았다.
* * *
―이야, 사람 죽이기 딱 좋은 날씨네.
손톱 밑에 흙이 껴 있던 정원관리사는 모두에게 지급되었던 흔하디흔한 작업 케이스를 열었다.
―그동안 흙장난 하느라고 고생 많았어.
어딘지 여유롭고 능글맞은 권이준의 목소리가 인이어를 통해 흘러나왔다.
케이스 안에는 저격용 소총이 분리되어 들어 있었고, 남자는 그것을 하나씩 조립해 나가기 시작했다. 차가운 금속이 철컥, 철컥, 익숙한 소리를 내며 이어졌다. 그는 완성된 총을 바이포드 위에 올려놓고 바깥으로 총구를 빼냈다.
저격 임무의 핵심은 사격이 아니라 침투다. 몇 년 전부터 이 한 번의 기회를 위해 정원관리사로 위장해 있던 남자는 마침내 임무를 받았다.
―겸손하게 자금줄 딱 하나만 끊어놓자고.
개요는 단순했다.
파키스탄 대사관 부인을 사살하는 것.
그녀의 본업은 밀수업자였고, 친정은 대대로 밀수업으로 돈을 쓸어 담아온 집안이었으며, 파키스탄을 마약 중독이 가장 심한 국가로 만드는데 일조해 온 권세가였다. 현재는 권 가(家)의 중요 고객으로서 마르지 않는 돈줄의 역할을 해주고 있었다.
미래회는 단지 결속을 위한 모임이었을 뿐, 자선 경매는 처음부터 표면상의 명목에 불과했다.
그에 권이준은 공범으로 묶인 사람들의 신뢰에 금을 내고 싶었다. 군림하던 무언가도 쉽게 깨질 수 있다는 것을 권 가(家)의 견고한 파트너들에게 제대로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 이곳의 보안을 뚫고 기다린 기간만 몇 년이었다.
―권 가(家) 앞마당도 더는 안전하지 않다는 걸 몸소 깨우치실 때가 됐지.
귓속을 파고드는 권이준의 서늘한 웃음소리에도 정원관리사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이윽고 남자는 조준경에 눈을 대고 숨을 천천히 골랐다.
사람들이 입장하고 있었다.
* * *
고급스럽게 단장된 테이블에 착석하는 손님들은 하나같이 기품이 흘렀다. 이연은 멀리서나마 정원이 채워지는 광경을 구경하며 어느새 바닥난 도시락을 정리했다.
그때, 널찍하게 들어오던 햇볕이 사라지고 별안간 그늘이 지는가 싶더니, 웬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활짝 열린 창문을 그림처럼 채우고 있는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머리에 붙은 나뭇잎을 훌훌 털어내며 햇빛을 등지고 섰다.
“뭐……! 여긴 어떻게……!”
이연이 퍼뜩 자리에서 일어나자 의자가 거칠게 굴러갔다. 그녀는 혹여나 누가 볼세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사무실이 좋아요, 방이 좋아요?”
“네?”
그가 창틀을 붙들고 다짜고짜 물었다.
권채우는 항상 아침과 밤의 차림새가 달랐는데, 아니나 다를까 지금은 깔끔한 슈트를 차려입고 있었다. 해가 떠 있을 때는 누구보다 여유로운 도련님이지만, 밤만 되면 온갖 더러운 침전물에 푹 절여져오는 남자. 그가 묘한 열기를 띤 채 그녀를 응시했다.
“지금부터 이연 씨를 가둬둘 생각인데요.”
“뭐요?”
“그 전에 협상이 가능한지 보려고 왔어요.”
며칠간은 얼굴을 볼 때마다 눈썹을 찡그리고 귀를 붉혔던 남자가 지금은 퍽 냉정하게 이연을 살핀다. 그럼에도 두 사람 사이에는 경계보다 농밀한 어떤 것이 고여 있었다. 그의 일방적인 행태에 더 이상 놀라지 않게 된 이연이 태연히 받아쳤다.
“제발 앞뒤 잘라먹지 말고 설명을 해 줘요.”
“경매가 완전히 끝나기 전까지는 바깥으로 나오지 말았으면 해서요. 참고로 권유는 아니고.”
“……왜요?”
남자는 짐짓 고개를 기울인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말을 해야 할지 말지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좀 시끄러워질 것 예정이라.”
그러자 곧장 이연의 표정이 굳었다.
단순히 소음을 말하는 게 아닌 것 같다면 그녀가 심히 예민해진 걸까.
섹스 파티와 수영장, 아니 수조를 본 이후 이연은 권 가(家)를 제 기준으로 판단하길 포기했고, 권채우의 경고는 언제나 정확했다.
불현듯 가벼운 오한이 들었다. 이곳에서는 최대한 몸을 사리는 게 이득이었다.
“……알았어요. 오늘은 제가 할 일이 거의 없어서요. 사무실만 정리해 놓고 방에 가 있을게요.”
이연이 순순히 대답하자 권채우는 잠시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했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하던 그가 손을 뻗어 이연의 입가를 닦아 주었다.
그녀는 햇살과 함께 그대로 밀려들어오는 남자 때문에 은근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다시 올게요.”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뼈마디가 선명한 주먹이 이연의 손 위에 띄워졌다. 그녀는 얼떨결에 손바닥을 펼쳤고, 동시에 부들부들한 꽃잎들이 이연에게 쏟아졌다. 눈이 커다래진 그녀가 얼른 두 손을 받쳤다.
“이연 씨는 바닥에 떨어진 것도 소중하게 줍길래 한번 따라해 봤어요.”
“…….”
“이러면 나도 다시 주워주지 않을까 해서.”
이연이 뻣뻣하게 굳어 그를 바라보는 순간, 권채우가 훌쩍 뒤를 돌았다. 성큼성큼 멀어져가는 뒷모습이 이상하게 망막에 오래 맺혔다.
서늘하게 불어 닥친 바람에 두 손에 담겨있던 꽃잎들이 전부 날아가 바닥에 떨어졌다. 땅바닥에 점점이 흩어진 모습이 꼭 핏방울처럼 붉었다.
이연은 순식간에 텅 비어버린 손바닥을 황망히 쳐다보았다.
―사냥개 전원 경비 강화합니다.
한편, 권채우는 권기석의 감정 없는 지시를 들으며 얼굴을 차게 굳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