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
어쩐지 뒤통수를 맞은 듯한 아찔함에 손끝이 뻣뻣하게 굳었다.
습관적으로 시간을 확인하며 권채우가 문밖에 있느냐 없느냐를 점쳐보는 건 미리 마음의 준비가 가능했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아니었다.
“도와주시겠습니까?”
“…….”
이연은 샤워 가운만 입고 있는 여자를 보며 꽉 다물린 입술에 힘을 주었다.
자신과 비슷한 신장과 체구, 훌훌 들뜨는 머릿결, 이목구비의 섬세한 모양까지.
굳이 묻지 않아도 눈앞의 여자는 이연과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순간 기저를 알 수 없는 불쾌함이 확 치솟았다. 심지어 침대보는 이연이 화이도에서부터 쓰던 것과 같은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이 권채우를 위한 세트장 같았다.
그녀가 멍하니 서 있기만 하자 장범희가 무뚝뚝하게 속살거려 왔다.
“이 일이 잘돼야 소이연 씨도 편하지 않겠습니까.”
의도가 담긴 재촉에 이연은 심장이 쿵쿵 바닥을 치듯 박동했다.
“수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결국 피곤해지는 건 소이연 씨뿐입니다. 평생 도련님을 끼고 살 게 아니시라면 여기서 응당 도와 주셔야 합니다.”
장범희는 은근히 가시 돋친 말을 하면서도 부탁하듯 고개를 숙여왔다.
맞는 말이었다. 권채우는 하루라도 빨리 새로운 수단과 방법을 찾아내야 했고, 그러면 집착도 덜해질 지 모른다.
게다가 이 상황은 불과 얼마 전, 이연이 직접 권유했던 상황이기도 하니 그녀로선 할 말이 궁해졌다. 이연은 제 앞섶을 움켜쥐고 물었다.
“……옷은 어디서 갈아입으면 되나요?”
“저쪽 방에 들어가시면 새 옷도 두었습니다.”
이연은 침대에는 조금도 시선을 주지 않으며 방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작업복의 단추를 하나하나 끄르고 있는데 문득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아까부터 계속 입이 마르고 심장이 불퉁하게 튀었다.
그래도 이게 맞는 거지. 이연은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자신은 곧 있으면 이곳을 떠날 사람이었고, 권채우는 제대로 잠을 자며 살아가야 했다. 그러니까 이게 맞는 방향이고 옳은 선택이다.
“다 갈아입으셨어요?”
그때 문이 끼익 열리고 작은 틈으로 여자 얼굴이 쏙 들어왔다. 똑같은 눈높이, 저와 비슷한 이미지의 그녀를 보자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여자는 싱긋 웃으며 들어와 대뜸 샤워 가운부터 벗었다. 훤히 드러난 등허리와 엉덩이에 이연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체향이 독특하시네요.”
이연의 작업복을 집어 든 여자가 옷에 코를 박으며 가볍게 소감을 남겼다. 이내 그녀는 능숙하게 다리와 팔을 차례대로 끼워 넣기 시작했다.
“혹시 잠버릇 같은 거 있어요?”
“네?”
여자는 마지막으로 작업복 단추를 잠그며 이연을 돌아보았다.
“아무거나 몸짓도 좋고, 잠꼬대도 좋아요. 무명이긴 하지만 제가 배우라서요. 그래서 기왕이면 한 번에 잘 해내고 싶거든요.”
“…….”
“딱히 힘든 일도 아니고, 그냥 남자 옆에서 얌전히 잠만 자면 된다니. 이게 얼마나 건전하고 일당도 쏠쏠한 줄 아세요? 게다가 사연 있는 남자 같던데, 그게 딱하기도 하구.”
“…….”
“자면서 스킨십은 어떻게 하는 편이셨어요?”
이연이 말없이 굳어만 있자 탐색하듯 노골적인 눈길이 닿았다 떨어졌다.
“별로 적극적인 편은 아니셨나 봐요.”
여자는 하나로 질끈 묶은 이연의 머리카락을 보더니 그대로 따라 묶기 시작했다. 이후 그녀는 꼼꼼하게 이연의 잔머리 모양, 손톱 길이, 습관적인 호흡수까지 정확하게 맞추었다.
이연은 이 상황이 당혹스러운 것과는 별개로 ‘진짜 프로답네.’라고 생각해 버렸다.
이런 사람이라면, 진짜 어쩌면…….
‘좋게 생각하자, 소이연. 이게 진정한 해방의 길이 될 수도 있어.’
침대에 올라간 여자가 무릎걸음으로 권채우에게 접근하고 있었다.
“…….”
“…….”
이연과 장범희는 서로 다른 이유로 바짝 긴장한 채였다. 그녀는 처음 맞닥뜨려보는 이 괴상한 상황에 두 다리가 도저히 움직이질 않았고, 장범희는 사냥개로 훈련받은 권채우의 발달된 감각과 타고난 기질을 끝까지 경계하는 중이었다.
“저기요, 계속 그렇게 보고 있을 거예요?”
“혹시 모를 상황 때문에 대기하는 겁니다.”
여자가 이쪽을 쳐다보며 묻자 장범희가 딱딱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설핏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금세 시선을 거두었다.
“흐음……, 뭐, 관객은 익숙하긴 한데요.”
이내 그녀는 자연스럽게 권채우의 팔을 잡아 벌리고 그 안으로 파고들었다.
이연의 속눈썹이 빠르게 팔랑거렸다. 더 이상 보면 안 될 것 같은 어떤 경고음이 머릿속에서 웽웽 울렸지만, 좀처럼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의 투샷은 꼭 그녀의 추억을 그대로 비춰주는 브라운관 같아서 묘하게 현실감이 없었다.
여자는 권채우의 허리를 끌어안고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그녀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그 미소만큼은 연기가 아니라 손을 녹일 때 드러나곤 하는 본능적인 만족감 같았다.
그때, 권채우가 여자 쪽으로 몸을 기울이더니 그녀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
그러자 목덜미가 차가워지고, 왜인지 속이 얹히는 듯했다. 단순하기 짝이 없는 그 움직임 하나가 벼락만큼 크고 무시무시해서. 조금씩 머리에 열이 오르던 이연은 그 순간 제 단단함의 이면을 알아차렸다.
우리는 각자의 길을 가야 한다고, 그렇게 주장했고 고집했다. 이연이 새로운 삶을 시작한 만큼, 권채우도 새로운 날을…….
‘―살기를 바란 게 아니었나.’
그런 강렬한 감정이 아직도 제 안에 남아있을 줄은 꿈에도 모르고. 느닷없이 툭툭 튀기 시작한 불티에 이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게 바닥난 애정보다도 훨씬 곤혹스러웠다. 결코 무관심이 아니었다. 구원 받지 못한 삶을 살길 바라는 확실한 미움이었다.
마침 이불이 스치고 나른한 숨소리가 들렸다. 널찍한 침대 위에서 조금씩 팔이 엉겨가는 남녀를 보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주먹이 갈렸다.
여자의 허리를 끌어안은 저 견고한 팔이 거슬렸다. 심장이 뚝 떨어졌다 솟구치기를 정신없이 반복했다.
권채우는 익숙한 체향에 이끌리는지 어느새 여자의 목덜미에…….
이연이 질끈 눈을 감아버린 순간이었다.
“꺅!”
“도련님―!”
어떤 비명이 더 먼저였는지는 모른다.
그저 갑작스럽게 터진 장범희의 고함에 이연이 번쩍 눈을 떴다. 그러자 여자의 머리카락을 틀어쥔 권채우가 기다렸다는 듯 시야로 들이닥쳤다.
그는 몽롱하니 반쯤 감긴 눈으로도 여자를 멀찍이 떨어뜨렸다. 그녀는 “아악!” 하고 비명을 지르며 제 두피를 부여잡았고, 권채우는 공격을 이어가듯 멱살을 틀어쥐었다.
눈 깜짝할 새에 이루어진 제압에 여자는 켁켁, 숨을 끊어 쉬었다. 장범희는 이미 권채우에게 붙어 말리는 중이었고, 덩달아 이연도 뛰쳐나갔다.
그렇게 고요했던 침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도련님, 진정하십시오!”
“씨, 발……. 좆같은 수작……”
권채우는 늘어진 테이프처럼 끊어졌다. 잠결인지, 약 기운인지 모를 초점 없는 눈은 그래서 더욱 섬뜩했다.
그는 정신을 차리려는 듯 의도적으로 입 안의 살점을 콱 깨물어 피를 냈다. 이내 시뻘건 혀가 핏자국을 내며 입술을 쓸었다.
그 지독한 성정에 이연은 희게 질렸다. 만약 이곳에 칼이 있었다면 그는 망설임 없이 제 허벅지에 자상을 냈을 것이다.
“도련님, 손 놓으십시오!”
“……범희야, 네가 기어이 솥에 삶아지려고……”
말끝에 돌아버린 웃음이 터져 나왔다.
권채우는 여자의 목까지 쥐고 흔들었고, 그녀는 공포에 질려 울음을 터트렸다.
그는 어떻게든 눈을 제대로 뜨기 위해 몇 번이고 머리를 털었다.
“……이 옷 어디서 났어. 옷 주인은 어디 있어.”
“흐윽, 윽……!”
“웬 판때기가 내 여자 옷을 입고 되도 않는 시늉을 하지.”
권채우는 술에 취한 듯 웅얼거리면서도 얼굴을 싸늘하게 굳혔다.
“웬 잡탕 냄새가……”
“으윽……! 사, 살려 주……!”
“옷 냄새만 똑같으면 뭐해. 아닌데, 씨발. 이연이가 아닌데…….”
그가 숨을 헐떡이며 어지러운 머리를 두어 번 흔들었다.
“이연이는 어디 있어? 이 옷 주인 어디 있어. 옷 뺏었어? 싫다는 거 뺏어왔어?”
권채우의 어깨가 크게 꿈틀거린 순간, 이연이 두 사람 사이로 불쑥 끼어들었다.
“진정 좀 해요!”
그녀가 남자의 양 볼을 짝―! 소리가 날 만큼 아프게 붙들었다. 권채우는 흐릿하게나마 이연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언제 사나운 기세를 흩뿌렸냐는 듯 곧장 얼굴을 무너뜨렸다.
그 변화가 놀라울 정도로 빠르고 야살스러워서. 이연은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움찔거렸다.
그제야 발광을 멈춘 권채우는 이연의 허리를 강하게 옥죄고 새하얀 목덜미에 입술을 파묻었다. 순리에 따라 제 자리를 찾아가듯 당연하게 흘러간 접촉이었다.
“이연 씨, 이연 씨. 나…… 강제로 당할 뻔했어요. 그렇죠?”
“……네?”
“씨발, 어떡해요? 나 혹시 따였어요? 이연 씨 말고 다른 사람이 나 벌렸어?”
살갗에 스치는 입술 표면이 따끔거렸다.
“내 팔 벌리고…… 나 꼼짝없이 먹힐 뻔한 거죠, 그쵸?”
“뭘, 네?”
“저 미친 여자가요, 나 따먹으려고. 이연 씨 옷만 입고. 그래봤자 잡탕 냄새가.”
두서없는 말들이 울음 같은 숨소리와 함께 흩어졌다.
“아니, 아니 그렇게 숭한 의도 아니었고―”
“내가 이연 씨 보지도 핥아먹은 사람인데, 고작 옷 냄새 가지고……”
대꾸할 최소한의 마음도 사라진 이연에게 권채우는 계속 얼굴을 비비고 치대왔다.
“이상해요, 몸에 감각이 없어요. 나 얼마나, 얼마 동안 당한 거예요?”
“…….”
“좆이 이상한데. 씨발, 흐, 갑자기 좆이 이상해요, 이연 씨.”
이연은 사고가 멈춘 듯 눈만 깜빡이고 있다가 장범희를 대차게 노려보았다.
‘대체 무슨……, 이거 수면제 맞아? 수면제 쓴 거 맞냐고! 대체 무슨 약을 처넣은 거야?!’
이연의 급박한 눈짓을 알아들었는지 장범희가 결백을 주장하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웃기지 마……! 이거 잠결 맞아? 자고 있는 거 맞냐고!’
이연과 장범희의 시끄러운 눈짓이 몇 번이나 탁구공처럼 오고 갔다.
그때 권채우가 이연의 옷 속에 불쑥 손을 집어넣으며 울먹였다.
“흐으, 이연 씨. 나 좆이……”
“…….”
“하아, 이연아, 다른 애가 내 좆 넘봤어. 자꾸 나 벌리고 네 꺼 함부로 쓰려고……”
“……나가요. 일단 전부 다 나가!”
이연은 드높아진 목청으로 장범희와 여인을 등 떠밀어 내보냈다.
그때까지도 권채우의 눈가가 철저히 건조하다는 사실을 알아챈 이는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