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
이연은 개들이 파헤친 정원 때문에 늦은 밤이 되어서야 퇴근을 했다.
직접 쭈그리고 앉아 작업을 하진 않았지만, 혼자만 쏙 빠지기가 면구스러워 늦게까지 함께 대기했다. 그렇게 뻐근한 어깨를 주무르며 방으로 향하는데 별안간 이연의 다리가 우뚝 멈추었다.
웬 시커멓고 커다란 덩어리가 방문 앞에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꼭 그림자를 뭉쳐 만든 것 같은 그것을 자세히 보니, 몸을 구긴 채 주저앉은 사람이었다. 정확히는 권채우가 이연의 방문 앞에 기대앉아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언제 권채우가 불쑥 찾아올지 몰라 일을 하는 동안에도 긴장을 늦추지 못했었는데, 이렇게나 꾸깃꾸깃해져 있다니.
권채우는 피곤에 절었다는 듯 녹아내린 상태로 이연의 방문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기울어진 머리 쪽으로 쏠린 머리카락은 폐수처럼 무겁게 흘렀고, 몸에 딱 달라붙은 검은색 옷에서는 묘하게도 피비린내가 났다.
하지만 실핏줄이 비칠 만큼 희멀건 피부는 꼭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아서. 그 이질적인 모습 때문에 선뜻 다리가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연은 그가 자고 있을 거란 순진한 생각은 이제 하지 않았다.
“시간도 늦었는데 돌아가요.”
그녀가 권채우의 정강이를 툭 발끝으로 쳤다. 다행히 목소리는 차갑게 나갔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그쪽 방으로 가라구요.”
“…….”
그러자 죽은 듯 감겨있던 그의 눈이 느릿하게 끔뻑, 끔뻑 움직였다. 홍채가 옅은 덕분에 어두울수록 더욱 선명하게 보이는 눈동자가 이연을 정확히 향했다.
“나 들어가야 하니까 비켜요.”
이연이 방문을 턱짓하며 말했다. 그러자 쿵―! 하고 권채우가 뒷머리를 방문에 박았다.
“이연 씨, 나 졸려요.”
남자는 웃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바람 소리를 내뱉었다. 늪처럼 눅눅하게 젖은 음성이 그녀까지 쭉 잡아끄는 것 같았다.
대체 밤마다 무슨 일을 하길래 이렇게나 녹초가 돼서 돌아오는 걸까. 이연은 눈앞의 도련님에 대해 처음으로 호기심이 일었다.
그러나 권채우가 숨 쉬듯 자연스럽게 발휘하는 어떤 인력이 지긋지긋하기도 해서.
“……졸린다고 나한테 기어 오기 전에 충분히 시도는 해 봤어요?”
“뭘요?”
“다른 여자 옆에서는 자 봤냐구요.”
“…….”
권채우는 말문이 막힌 듯 대답하지 못했고, 한순간 상처를 받은 것처럼 얼굴이 확 우그러졌다.
하얗고 정적인 얼굴이 소리 없이 마구 흔들리자 이연은 가슴 속 어딘가에서 내밀한 희열이 솟구치는 것 같았다.
‘―소이연, 씹질이 그렇게나 좋았어?’
이연은 뇌리를 스치는 그 말에 혀 안쪽을 깨물고 똑같이 되풀이했다.
“그쪽도 좋아했잖아요, 씨, 씹질. 그러니까 재주껏 뭐라도 해봤어야죠.”
권채우는 주먹을 쥐고 바닥을 한 차례 쿵, 짚었다. 힘줄이 팽팽하게 올라온 손이 미약하게나마 떨리고 있었다. 발톱을 세우고 싶어도 세우지 못하는 남자를 보며 이연은 속까지 일렁거렸다.
“나 그런 말은 듣기 싫어요.”
그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지독히도 서늘해진 목소리로 투정 아닌 투정을 부렸다.
“내가 왜 이연 씨를 두고 다른 여자랑―”
“왜냐뇨? 나한테 그쪽을 받아줘야 할 의무라도 있어요?”
“…….”
“졸린다고 곧장 나부터 찾는 건 염치없어요. 그거, 쉽게 해결해 보려는 심보잖아요.”
그가 바들들 떨리는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매끈한 미간이 구겨지며 “하―.”하고 열없는 웃음도 흘러나왔다.
이연의 환각을 보고 난 다음부터는 수면을 자발적으로 거부했다. 그에 장범희는 매번 얼굴을 굳히고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았지만, 권채우는 지금이 퍽 만족스러웠다.
그녀의 환각을 붙들고 함께 눕고 싶다는 유혹에 시달리면서도, 며칠, 혹은 몇 주간 일어나지 못할 앞날을 생각하며 이를 악물었다. 온갖 것이 득실거리는 권 가(家)에 이연을 홀로 둘 수는 없어서. 그러니 수절이라면 수절이지, 난데없이 씹질이라니.
“이연 씨가 보기엔 내가 걸레 같아요?”
“무슨 말을 그렇게―”
“날 하반신만 따로 노는 새끼 취급하잖아요. 나는 애초에 이연 씨 아니면 발기도 안 돼요. 자는 것도, 밥 먹는 것도, 섹스도, 전부 다 이연 씨가 틀어쥐고 있는데……!”
반질반질하게 그녀만을 올려다보는 눈빛에 힘이 와락 들어갔다.
“듣는 사람 진짜 서럽게.”
턱을 꽉 다물고 말없이 이연을 노려보는 시선이 붉었다. 그 순진하고도 들끓는 감정에 이연은 또다시 제 꾀에 제가 빠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권채우를 대할 때면 언제나 그랬듯이.
“난 이연 씨한테만 닳아빠지고 싶어요. 한 사람한테만 더러워지고 싶다고요.”
“충분히 알아들었으니까 그, 그만해요.”
“나 꼴 보기 싫어서 차라리 걸레로 만들고 싶었어요? 그런데 어떡하죠. 난 한 사람한테만 대 주는 대신, 아무 데서나 세워요. 내 몸을 굴리고 싶으면 씨발, 이연 씨가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내보든가요. 걸레 쓰는 법은 좆도 모르면서―”
“그만 말하라구요!”
이연이 눈을 질끈 감으며 귓불을 신경질적으로 마구 긁었다. 그러자 다시 기세를 죽인 권채우가 이연의 바짓가랑이를 잡은 채 이마를 기대왔다.
“이젠 내 얼굴만 봐도 거슬려요?”
단지 옷자락이 눌렸을 뿐인데도 이연은 화들짝 놀랐고, 그 반응을 기민하게 느낀 권채우 또한 다시 이마를 뗐다.
“그동안 함부로 만지지도 않았고, 쫓아다니지도 않았는데. 칭찬도 안 해 주고.”
재깍 이연의 안색부터 살피는 집요한 시선은 그녀가 기억하는 남편의 것이 맞았다.
순간 이연은 속에서 울컥 무언가가 치받았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지 않았던 이연은 그래서 부러 목청을 높였다.
“방문 앞에 사람이 앉아 있는데, 그럼 그게 안 거슬려요?”
“사람이 아니라고 치면 되잖아요.”
자연스럽게 스스로를 하대하는 말에 이연은 이제 헛웃음이 나왔다.
“어차피 개새끼였는데 그게 싫으면 식물 해요.”
“…….”
“이연 씨 나뭇가지 잘 자르잖아요. 계속 첫째, 둘째, 셋째, 제약 늘리면서 내 손발 다 잘라놔요. 그러다 내가 아무것도 못하게 되면, 이연 씨가 그때마다 조금씩 물 부어주면 되잖아요.”
제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숨을 씨근덕거리는 남자가 불현듯 처연하고 안타까워서.
그녀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의 머리카락을 슥 만졌다. 권채우는 그 즉시 숨을 멈추고 이연을 하늘처럼 올려다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그의 눈가가 곱게 물드는 것이 보였다.
뒤늦게야 정신을 차린 그녀가 흠칫 손을 떼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엄청난 실수고, 낭패였다. 왜냐하면―
“……나도, 한 번만 만지게 해 줘요.”
그래, 이렇게 금세 기어오르니까.
“이연 씨 배 만지게 해 주세요.”
“……!”
이연이 뻣뻣하게 굳어있는 사이, 그의 음산한 목소리가 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권기석은 만졌잖아요.”
그 말 한 마디에 잊고 있던 사실 하나가 그녀를 다시금 강타했다. 권기석에게 제 임신을 들켰다. 이연은 안절부절못하는 손을 뒷짐 지듯 등 뒤로 감추었다.
“다른 데도 아니고 배를 만졌는데, 어떤 남자가 그 꼴을 보고 눈이 안 돌아요.”
“……배가, 왜요?”
“이 배는 내가 채웠는데.”
미비하게 올라간 입꼬리에 이연의 시선이 멎었다.
“무, 무슨 말을―”
이연의 눈이 곧장 경고등처럼 깜빡거렸다. 권채우는 허둥대는 이연을 당장이라도 껴안고 키스를 퍼붓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현실에 애간장이 닳다 못해 얼굴 한쪽이 허물어졌다.
그래도 그녀에게 겁을 주면 안 된다. 첫 만남에서부터 그랬듯, 겁먹은 그녀가 무슨 짓을 할지는 전혀 예상할 수 없으니까.
변수는 최대한 제거하는 편이 좋았으므로 권채우는 임신에 대해 철저히 함구하기로 했다.
그녀가 완전히 저에게로 돌아올 때까지는.
“내가 밥해 준 건 잊었어요?”
“아…….”
이연은 제가 섣불리 야한 생각부터 했다는 자괴감에 냉큼 문고리를 잡았다. 그러자 바짓가랑이가 팽팽하게 늘어났다.
“가지 말고 허락해 주세요.”
“허락, 안 해요.”
복도에서 얼어 죽든지 말든지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이연은 벌컥 방문을 열고 그의 코앞에서 다시 쾅―! 하고 닫았다.
이윽고 씩씩대며 샤워를 마친 그녀는 침대에 누워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썼다.
신경 안 써. 안 쓸 거야.
이연은 그렇게 끊임없이 되뇌었지만 결국 밤잠을 설쳤다.
그날부터였다.
막내 도련님이 복도에서 잔다는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게.
* * *
“먼저 퇴근할게요, 수고하셨습니다!”
자선 경매 준비로 정원을 새로 꾸밀 꽃들을 선별하느라 오늘도 어김없이 야근 후 퇴근하는 길이었다. 이연은 습관적으로 시간을 확인하며 권채우의 유무를 머릿속으로 계산하고 있었다.
그날 이후, 자정이나 새벽이 되면 어김없이 덜커덩― 하고 큼지막한 무언가가 방문을 강하게 들이받았다. 권채우가 온몸에 힘을 빼고 문밖에 늘어지는 소리였다.
그렇게 며칠째 문밖을 지키는 커다란 개 때문에 이연은 신경이 갉작갉작 깎였다. 그는 요란하게 문을 긁지도, 쾅쾅 두들기지도 않았지만, 오히려 그 고요함이 가느다란 실처럼 그녀를 옥죄어왔다.
특히나 권채우가 이연이 익히 아는 남편의 얼굴을 할 때마다 등허리 어딘가가 뜨뜻해지고 땀이 맺혔다.
“소이연 씨.”
그때, 깔끔하게 슈트를 차려입은 누군가가 그녀의 앞길을 막아섰다. 이연은 아무도 없는 주위를 괜스레 두리번거리며 걸음을 뒤로 물렸다.
“잠시 함께 가 주셔야겠습니다.”
“누구신데요?”
이상하게 낯이 익은 사람이었다. 어디서 봤더라……? 그녀가 고개를 연신 갸웃거렸다. 분명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권 이사님께서 부르십니다.”
장범희는 시종일관 정중했지만 그렇다고 우호적인 눈빛은 아니었다.
일개 을에 불과한 사람에게 무슨 힘이 있을까.
규백이와 임신. 이미 약점을 두 개나 잡혀버린 이연은 찍소리도 못하고 장범희를 따라 별채로 들어갔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배를 감싸며 마른 입술을 연신 짓씹었다.
잠깐, 근데 여기는 권채우가 머무는 곳 아니야?
문득 그런 의구심이 드는 순간, 말없이 앞장서기만 했던 장범희가 별안간 몸을 돌렸다.
“죄송합니다.”
“네?”
“권 이사님이 아니라, 실은 도련님 때문입니다.”
“……!”
그녀의 어깨가 크게 튀자 장범희는 빠르게 덧붙였다.
“안심하셔도 됩니다. 도련님은 모르십니다.”
“예?”
“도련님이 맞는 주사가 종종 있는데―”
“그 사람 설마 마약도 하나요?!”
이연은 기겁을 하며 말을 채갔고, 장범희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대꾸했다.
“아닙니다, 일종의 신경 각성제인데. 화이도에서부터 버티려고 맞던 겁니다.”
“……!”
처음 접하는 말에 이연의 얼굴이 차게 굳었다.
“그런데 그걸, 제가 수면제로 바꿔치기 했습니다. 도련님만 한계에 다다른 게 아니라, 지켜보는 저까지 한계가 와서 말입니다.”
장범희는 웬 방문을 등지고 서서 얼어붙은 그녀를 무표정하게 내려다보았다.
“그러니 부탁드립니다, 조금만 도와 주십시오.”
“대체 뭐를……”
그 순간, 장범희가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곳엔―
정신을 잃었는지 침대에 쓰러져있는 권채우와 처음 보는 여자가 있었다.
“지금 입고 계신 그 옷 좀 빌려주십시오.”
장범희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