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
“눈이 발에 달렸어?!”
별안간 터진 고함에 정신없이 도망치던 이연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무슨 정신으로 본채를 빠져나왔는지 모르겠다. 수분이 빠져나간 입술은 허옇게 말라붙었고, 심장은 기억도 나지 않는 순간부터 거칠게 뛰고 있었다.
권기석의 협박과 권채우의 애원 중, 무엇이 더 충격적인지 가늠해 볼 여유조차 없었다. 그저 똑같은 구렁 속에 또다시 빠지면 안 된다는 공포가 그녀의 다리를 움직이게 했다.
이연은 구겨진 옷자락을 꽉 쥐며 소란이 난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숨어든 것은 무의식적인 선택이었다.
“얼른 잡아 오지 않고 뭐하냐고!”
푸르기만 했던 정원이 볼썽사납게 파헤쳐져 있었다. 나무 밑이 뭉텅 파이고, 기둥은 긁혔으며 화단은 완전히 쑥대밭이 되었다. 꽃들의 모가지가 전부 꺾인 꼴을 보니 이연의 눈가도 설핏 찌푸려졌다.
그녀는 형광 조끼를 입은 경비팀 직원들이 정원을 내달리고 있는 개들을 죽어라 쫓는 광경을 보며 이게 어찌 된 일인지 대충 감이 잡혔다.
누군가의 관리 미흡과 통제가 안 되는 개들이 만들어 낸 작품이었다.
“욕구 불만이었나 본데요?”
이제는 눈에 익은 관리팀 직원이 한숨을 쉬며 울퉁불퉁해진 땅을 발로 꾹꾹 눌렀다.
“하아……. 이거, 오늘 안으로 치워야 되겠죠? 아, 정말 싫다…….”
역류하듯 뒤집힌 고동색의 흙이 푸른 잔디를 덮고 있었다.
“참, 당장 다음 주에 여기 야외에서 미래회 자선 경매 잡혀 있던데, 일정 확인하셨어요?”
“미래회요?”
이연이 영문 모르겠다는 듯 묻자 직원이 엄지손톱으로 이마를 긁었다.
“정재계 여성들이 하는 자선 경매인데요, 안목이 조금 까다로우셔서요. 그래서 준비할 게 산더미 같은데, 저 개놈들 때문에 짜증 나 죽겠네요.”
“차라리 잘 됐어요.”
“네?”
“아니, 아니에요.”
권채우 생각을 억지로라도 밀어 넣을 수 있어 좋다는 뜻이었는데, 말이 배려 없이 잘못 나왔다.
이윽고 온몸에 흙을 묻힌 개는 어느새 입마개를 한 채 지난번에 보았던 훈련사에 의해 끌려오고 있었다. 이연과 눈이 마주친 남자는 민망하다는 듯 너털웃음을 쳤다.
“보셨죠? 이래서 훈련이 중요한 겁니다.”
이연은 입마개 사이로 보이는 이빨이 무서워 은근슬쩍 거리를 벌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참, 그 집 개는 훈련 잘 되고 있나요?”
“네? 아…….”
이연의 표정이 굳어지자 훈련사는 알만 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도중에 마음 약해지는 보호자분들이 의외로 많으시거든요. 원래 처음엔 미친 듯이 낑낑댑니다. 그래도 무시하세요. 이때 안 잡아놓으면 보호자님 일상생활만 힘들어지니까.”
이연은 왜 키우지도 않는 개 이야기에 이렇게나 집중이 되는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꼭 남을 속이고 있는 듯한 기분에 안절부절못하면서도 자꾸만 귀가 쫑긋 섰다.
“중요한 건 끈기 있게 길들이는 거예요. 많이 놀아 주시구요. 공격성이 높은 애들은 산책도 꼭꼭 시켜 줘야 합니다. 무시와 격려, 보상도 적당하게 잘 따라와 줘야 하구요. 사람 냄새도 자주 맡게 해 주세요.”
이연은 무심코 본채를 돌아보았다. 놀란 심장은 여전히 세차게 뛰고 있었다.
* * *
좁은 통로를 지날 때마다 낡아빠진 전등이 깜빡거렸다. 조명 빛이 떨어질 때마다 검은 복면을 쓴 권채우의 얼굴이 드러났다 어둠 속에 다시 잠식되기를 반복했다.
그는 낮은 천장 때문에 목을 다소 꺾고도 흐트러지지 않은 자세로 거침없이 코너를 돌았다.
퀴퀴한 곰팡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이미 까맣게 타들어 간 제 속에 비한다면 저건 차라리 깨끗한 편이었다.
그는 이틀째 쉬지도 못하고 밤길만 나도는 이 순간에도 이연이 보고 싶어 심장이 시도 때도 없이 파르르 떨렸다.
현재 그녀가 허락한 것은 딱 두 가지였다. 첫째, 함부로 그녀 몸에 손대지 말 것. 둘째, 쫓아오지 말 것.
그럼 대체 어떻게 해야 널 붙잡을 수 있지? 대체 어떻게 해야 예전처럼 널 품에 안을 수 있어?
‘내가 아닌 다른 새끼들이었다면 이보다는 능숙하게 방법을 찾아냈을까? 선천적으로 착하고 다정한 그런 종자들이었다면―.’
그로선 도무지 방법을 알 수 없어 막막하기만 했지만, 그럼에도 미약한 여지가 담긴 그 말이 간절하고 또 절박해 하염없이 곱씹었다.
극단적으로 부족한 수면에 섭식에도 문제가 생기면서 신경은 점점 예민하게 갈렸다. 그럴수록 권채우는 깜빡이는 저 전등처럼 생각이 일 초마다 바뀌었다.
이연을 어디 산간 오지에 가둘까, 차라리 무인도를 하나 사들여서 개조할까.
하지만 머리가 사납게 들끓다가도 권기석과 윤주하의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된다는 최소한의 이성이 남자를 막아 세웠다.
강압적으로는 절대 하지 않겠다 했으니, 당장 병원부터 가서 제 장기 상태를 검사한 다음, 이연에게 결과표를 쥐여줄까. 언제든 이연이 필요할 때 쓸 만한 것을 미리 골라두는 것도 나쁘지는 않아 보였다.
그렇게 온갖 것을 궁리하던 그는 이내 복면을 턱 아래로 내리고 허스키하게 물었다.
“어디다 처박아놨어?”
“저쪽입니다.”
며칠 전, 시민 한 명이 클럽 루나에서 시비가 붙어 폭행을 당했다.
피해자 장민수는 곧장 112에 신고를 했지만 오히려 출동한 경찰들이 장 씨를 폭행하고, 체포하고, 무단으로 감금까지 하는 바람에 일이 커지게 되었다.
장 씨가 몰래 켜두었던 라이브 방송을 통해 이 말도 안 되는 상황들이 실시간으로 퍼져 나갔고, 그렇게 클럽 루나와 공권력 간의 유착 의혹이 터져 나왔다. 일반인 장 씨를 조롱하며 폭행하는 과정에서 온갖 높으신 분들의 이름이 흘러나온 탓이었다. 숫제 나라가 들썩거리고 있었다.
단순했던 폭행 사건은 점점 사이즈가 커져 경찰 유착, 마약, 성범죄, 조세 회피까지 아우르는 대형 범죄가 되었고, 이 사건의 진짜 배후에 대해 온갖 추측이 두서없이 난무했다.
그러던 와중, 클럽 루나가 다른 곳도 아니고 현 정부와 관련이 있다는 새로운 의혹이 제기되며 인터넷은 연일 뜨겁게 달아올랐다.
배후세력은 당연히 음지의 실권을 틀어쥐고 있는 권 가(家)였고, 권채우는 이 모든 일의 씨앗이나 다름없었던 일반인 장 씨를 조용히 처리하라는 지시를 받고 직접 나선 참이었다.
그렇게 들어간 독방 안에는 피투성이가 된 남자 하나가 밧줄로 결박당한 채 쓰러져 있었다.
권채우는 뒤따라온 사냥개에게 나가라는 눈짓을 보내고, 이내 홀로 남아 비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일어나.”
감흥 없는 목소리가 적막을 가르자 죽은 듯 쓰러져 있던 남자가 몸을 일으키며 침을 퉤 뱉었다.
“씨발, 존나 아프네.”
“…….”
“내가 이래서 우리 집 개새끼들을 싫어해. 너희가 이렇게 된 건 다 공교육의 부재 때문이야. 어릴 때 사슬에 묶어두는 게 아니라 슬기와 도덕부터 배우게 했어야 했는데, 씨발 새끼들이.”
신랄한 비난에도 권채우의 표정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마침 한쪽 무릎을 세우고 여유롭게 앉은 남자가 엉망인 얼굴로 입꼬리를 씩 당겼다.
“오랜만이다, 막내야. 너 그동안 식물인간이었다매?”
가문을 뛰쳐나간 권 가(家)의 차남이자, 현재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재직 중인 권이준이었다.
무자비하게 얻어맞은 상처 때문에 이목구비는 당최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어올랐지만, 권채우보다 진한 담갈색 눈동자가 익숙하게 번뜩였다.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은 눈썹 아래까지 내려와 있고, 선생님과는 어울리지 않는 피어싱 자국이 한쪽 귀에 선명했다. 몸싸움을 하면서 목이 늘어났는지 티셔츠 아래로는 거뭇거뭇한 문신도 슬쩍 보였다.
권이준은 얼굴 한쪽을 장난스럽게 일그러뜨리며 서늘하게 웃어 보였다.
“그동안 너 때문에 형이 존나 뺑이친 건 알지?”
“선생이란 작자가 말 좀 가려서 해.”
“네가 언제 내 새끼들한테 관심이나 가졌냐?”
“앞으로는 관심 좀 가져보려고.”
“지랄, 네가 갑자기 그러면 우리 반 삐약이들 멱 따려는 것 같으니까 그만해라.”
그리고 권이준의 진짜 정체는 반(反) 권 가 세력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는 블랙 해커였다.
그는 집안과 철저하게 절연하기 위해 바하마, 산마리노, 사모아, 케이맨 제도 등에 묻어두었던 권 가(家)의 해외 은닉 자금을 24시간마다 하나씩 털었고, 부모는 그때 차남에게서 완전히 손을 뗐다. 그런 비밀 계좌가 수십 개는 더 있었으나 부모는 네 번째 만에 손을 든 것이다.
권이준은 막냇동생의 무심한 낯짝을 오랜만에 빤히 쳐다보았다.
“이제 앞으로 줄줄이 터질 거니까 정신 똑바로 차려.”
성인이 되자마자 집을 나가려 했던 권이준은 때마침 유괴됐던 동생이 돌아오면서 권 가(家)에 조금 더 머물렀다. 그러나 말쑥하게 자란 채우는 형제들에게 결코 곁을 내주지 않았고, 그런 아이를 따뜻하게 품기보다 처치 곤란해하며 해외로 보내버린 부모의 작태에 권이준은 환멸을 느꼈다.
“너만 지금 본가에서 권기석이랑 살고 있잖아.”
“사는 게 아니고, 감시하는 거지.”
“그 새끼, 이젠 사냥개도 안 믿어. 최근엔 시리아 살인범들만 줄줄이 사들였던데.”
“알아, 어제도 몇 놈 처리했어.”
그에 권이준이 날카롭게 경고의 눈빛을 보냈다.
“권기석이 두 수 세 수 앞서 있다고 가정하고 움직여.”
“…….”
“알고 있지? 여차하면 네 목부터 썰리는 거. 형들이 부족해서 너만 본가에 남겨두고 너한테만 의지하고 있지만, 네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지금은 사냥개일 뿐이야. 쓰임이 다하면 가장 먼저 처리된다고.”
그 말에 권채우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좀처럼 보기 힘든 막내의 웃음이었지만 권이준은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저 미소 안에 담긴 잔인함에 치가 떨렸다. 그러나 저 혹독한 기질에 자신 또한 모든 패를 다 걸었다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오히려 바라던 바야. 권기석이 자꾸 깔짝깔짝 내 주변만 건드리는데, 그게 생각보다 더 지루하더라고.”
권채우는 둘째 형을 묶고 있던 줄을 단도로 짧게 끊어주며 말했다.
“권기석은 당장 오늘 밤에도 죽을 수 있어.”
“야, 채우야.”
“그렇다고 권 가(家)가 사라지는 게 아니니까 골치 아픈 거지. 그리고 지금은―”
권채우가 잠깐 망설이다 말을 이었다.
“내 걸 갖고 있기도 하고.”
뒤이어 욕설이 따라붙은 목소리가 끔찍이도 살벌했다.
권이준은 자유로워진 손목을 번갈아 둥글게 굴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어릴 적, 어린 애들을 가둬놓고 권 가(家)의 장기 말로 키우는 개집을 목격한 이후, 사고방식이 완전히 바뀌었다. 게다가 그와 비슷하게 막내를 도둑맞고도 끝끝내 변하지 않는 부모를 보며 역겨움은 더욱 커져갔다.
충격이었던 개집과 막냇동생의 유괴를 겪었기 때문인지, 권이준은 유독 어린애에게 마음이 약했다. 그가 결정적으로 나약하단 평을 듣게 되었던 날생선 사건 때에도 사실은 생선 배 속에 빵빵하게 들어찬 알들 때문에 손도 대지 못한 것이었다.
그 후 권이준은 권 가(家)가 데리고 있는 아이들을 전부 빼내기 위해, 그 악행의 대물림을 끊기 위해 초지일관 움직였다.
마침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사냥개가 합류하면서 계획에도 탄력이 붙었다. 어느새 훌쩍 자라 권 가(家)의 몸통이자 공포가 된 권채우가 접촉해 오면서. 그가 식물인간이 되기 전의 일이었다.
권이준은 붉고 푸르뎅뎅한 입가를 매만지며 얼굴을 찌푸렸다.
“다음 주, 집에서 미래회 자선 경매가 있어.”
“알아.”
“리스트에는 없지만, 그때 파키스탄 대사관 부인도 참석할 거야.”
미래회는 정치인과 기업인들의 부인이나 딸, 며느리 등 소위 정·재계 여성들의 봉사활동 모임이었다. 그리고 분기마다 권 가(家)가 야외 정원을 개방하여 장소를 빌려주었다.
“오랜만에 권기석 좆 될 수 있는 기횐데.”
권이준은 바지 주머니에서 딸기 맛 사탕을 뜯어 먹으며 씩 웃었다.
“집에 중요한 물건은 없지? 있으면 미리미리 치워 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