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2화 (133/158)

#132

언제나 강하고 선명했던 남자의 이목구비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건 이연이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사람을 궁지로 몰아넣듯 분노하고 냉정해지던 모습은 익숙한데, 저렇게 손만 대도 바스라질 것 같은 얼굴은 낯설기 짝이 없었다. 권기석 때문에 얼어붙었던 몸이 이번엔 다른 의미로 굳었다.

“……왜 이래요?”

이연은 저도 모르게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권채우는 반사적으로 팔을 움찔거렸지만 이내 주먹을 말아 쥐고 차렷 자세를 취했다.

“내가 저번에 분명히 전달했던 것 같은데요.”

“…….”

“흔들리지 말라고 했잖아요.”

이연이 경계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또다시 제 삶을 밟고 들어오려는 남자를 앞에 두고 그녀는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연의 눈이 완고해질수록 그의 낯빛은 하얗게 질려갔다. 돌연한 병증과 임신은 고집스러웠던 그를 끝끝내 무너뜨렸지만, 이렇게 마주하고 있는 순간에도 이연은 시시각각 벽돌을 쌓고 있어서. 그 격차가 삭풍처럼 불어와 남자의 살갗을 에는 듯했다.

“방금 전은……. 못 들은 걸로 할게요.”

이연이 급하게 시선을 피하며 등을 돌렸다.

“내가……!”

그때, 부서질 듯 확 터져 나온 굵직한 목소리가 그녀를 붙잡았다.

“여전히 이연 씨 남편이라면요?”

그녀가 눈에 띄게 멈칫했다.

“화이도를 떠나던 날, 내가 이연 씨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면요.”

“……!”

이연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가장 연약한 곳이 쑤셔진 사람처럼 초점이 맞지 않는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원래 기억이 돌아오면서, 화이도에서 보낸 시간은 전부 백지가 됐었어요.”

“…….”

“나는 내가, 어떤 여자한테 놀아났다고만 생각했고요.”

권채우는 언제나 날이 서 있던 얼굴의 모서리들을 죄다 일그러뜨린 채였다.

“그때는, 거짓말을 치고 날 제멋대로 주무른 이연 씨가 너무 미워서. 많이 미워해야만 내가 원래의 나로 있을 것 같아서. 아득바득 더 모질게 굴었어요. 나는 기억에도 없는데, 이 빌어먹을 몸뚱이가 이연 씨 냄새에 반응하고, 이연 씨 움직임에만 집중이 되는 게, 무서웠어요.”

“…….”

“내 몸을, 웬 발정 난 새끼가 빌려 쓴 것 같아서 솔직히, 기분도 좆같았어요.”

권채우는 고해성사라고 하기엔 다소 과격한 언사를 해 대며 이연을 주시했다. 붉게 충혈된 눈은 단 한 번도 깜빡이지 않았다. 그녀의 반응을 일 초도 놓치지 않겠다는 어떤 집념까지 느껴졌다.

“그래서 나도 똑같이 남편인 척 연기한 거예요. 같잖은 복수라고, 유치하다고 욕해도 좋아요.”

“…….”

“사실은 그게 내 실수고 패착이었거든요. 남편으로 위장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화이도를 떠나는 게 점점 싫어졌어요.”

“…….”

“이연 씨 남편이 미치도록 부럽고, 죽여 버리고 싶고, 차라리 그 자리를 완전히 빼앗을까 고민했어요. 이연 씨가 나를 쳐다보지도 않는 날엔 화가 치밀어서 떠나는 일정이 몇 번이나 뒤로 밀리기도 했고요.”

권채우는 순간 격해진 숨을 삼키며 가슴을 들썩였다.

“그런 마당에…… 옛날 기억까지 합쳐졌어요.”

“혼란스러웠겠네요.”

퍽 다정한 반응에 권채우가 일말의 희망을 안고 고개를 추켜들었다.

“그런데 그쪽이 뭐든, 누구든, 그게 이제 와서 뭐가 중요해요?”

“…….”

“난 이미 장례식까지 치렀는데.”

권채우가 천천히 미간을 찌푸렸다. 제 귀를 의심하는 멍한 표정이었다.

“장례식?”

난생처음 듣기라도 한 듯 혀에서 까끌거리는 단어를 굴려보았다. 새벽부터 지금까지, 그녀를 둘러싼 날카로운 단어들이 그를 찢어놓는 것만 같았다. 사망, 임신, 그리고 장례식까지.

“네, 미안하지만 그쪽은 죽은 사람이에요.”

뜨겁고 생동하는 감정들로 절절매던 권채우의 낯빛이 일순간 얼어붙었다.

“검은색 옷을 입고 내가 직접 땅을 파서 당신 조각을 묻었어요.”

“…….”

“그리고 나는, 내가 만든 무덤에서 그쪽을 끄집어낼 생각이 전혀 없어요.”

생매장하던 순간을 들키면서 시작된 그들의 관계는 결국 한 사람이 한 사람을 파묻고 나서야 비로소 끝이 났다.

권채우는 설명할 수 없는 막막함에 고개를 젖히고 눈가를 가렸다. 이렇게까지 무력해져 본 적이 있었나.

성인이 된 이후, 적재적소에 사람을 찌를 줄만 알았지, 죽어버린 마음을 되살리는 법은 배우지 못했다. 그저 덜렁덜렁 몸 한쪽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그렇게 권채우가 조각나고 또 조각날수록 그 틈을 비집고 새어 나오는 건 백치였다.

그를 구성하고 있던 태생적인 거부감과 의심, 고집, 그리고 방어가 박살이 나면서 다시 주도권을 잡은 건 누군가의 남편으로밖에 살아본 경험이 없는 맹목적인 남자였다.

“……내가 어떻게 하면 돼요?”

권채우는 갈퀴 같은 손으로 이연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이연 씨가 하라는 대로 할게요. 밥도 하고, 일도 하고, 살림도 내가 할게요. 원하는 만큼 돈도 주고, 할 수만 있다면 대신 숨도 쉬어 줄게요.”

이연은 주먹을 꽉 쥐고 시선을 피했다. 꾸깃꾸깃해진 옷 끝은 꼭 지금의 그들처럼 볼품이 없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권채우의 얼굴은 그녀가 잘 아는 어떤 것으로 돌아와 있었다.

이연은 따끔거리는 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 번 더 그를 밀어냈다.

“그건, 정말 나를 믿어서 하는 말이에요?”

“…….”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거짓말쟁이인 나를 어떻게 믿어요? 사실은 내가, 진짜로 그쪽 어머니를 팔았다면요?”

이연의 눈이 위악적으로 번들거렸다. 그녀는 작정한 듯 스스로를 폄훼하길 주저하지 않았다.

“나는 그쪽을 대할 때 항상 거짓말로 상황만 모면하기 바빴어요. 나는 늘 그런 사람이었는데, 내가 또 유리한 쪽으로 대충 변명한 거라는 생각은 안 들어요?”

“안 들어요.”

남자의 먹먹한 음성에 이연은 소리만 그럴듯한 웃음을 터트렸다.

“사람이 왜 이렇게 쉬워요?”

“……설령 그렇다 해도 이제는 상관없으니까요. 그걸 감당하는 게 내 몫이에요. 이연 씨가 어떤 사람이든 내가 전부 껴안고 싶어졌어요. 죄가 있다면 죄를, 빚이 있다면 빚을, 그런 구김까지 내가 다 가져요.”

권채우는 그녀의 손목을 아프지 않게 쥐고 제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다시 멍청해지기를 택한 남자는 자연스럽게 한 여자만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부드러운 살결에 땀으로 축축해진 손바닥이 풀처럼 달라붙자 달콤한 한숨이, 나른한 안도가 흘러나왔다.

“내 마음이 나를 이겼고, 그래서 나는 이연 씨한테 졌어요.”

그가 불현듯 이연의 목을 엄지로 쓸어내렸다. 그녀가 흠칫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이연 씨는 나 같은 개새끼도 받아줬는데, 나는 왜 못 할 거라고 생각해요?”

‘나는 죽을 때까지 모른 척하고 살 수 있었어! 그런데 왜……! 당신은 왜 못 해! 나는 권채우 씨가 어떤 사람이라도 감수하고 갈 수 있었는데……!

“이연 씨가 나보다 더럽고 추악할까요?”

통증으로 녹아내린 권채우의 눈과 마주친 순간, 이연은 그의 손을 탁―! 쳐내고 도망치듯 몸을 돌렸다.

이 자리를 피해야 했다, 무조건 피해야만 했다. 그건 머리보다 몸이 먼저 그녀를 긴박하게 충동질하고 있었다.

해가 쨍쨍한 한낮인데도 오늘따라 하늘이 흐렸고, 빛을 받지 못해 우중충한 복도는 끝도 없이 길었다. 이연은 답답하고 복잡한 심경을 꾸역꾸역 삼키며 앞만 보고 달렸다.

언젠가의 뒷산에서 그를 피해 달아났을 때처럼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이번에도 잡히면……. 이번에야말로 잡히면―! 권채우의 얼굴이 떠올라 문득 속이 울렁거렸지만 멈추지 않았다.

그 순간, 이연의 뒤로 묵직한 무게감이 쏟아지더니 누군가 그녀의 온몸을 강하게 결박했다.

“읏……!”

파르르 떨리는 두 팔 때문에 이연의 몸에도 추위와 같은 진동이 퍼졌다.

“나도 권채우인데, 왜 남편을 못 알아봐요!”

“……!”

“나 여기 있어요, 이연 씨. 나 아직 여기에 있단 말이에요.”

“이, 이거 놔―”

“내가 이연 씨 남편인데 도대체 왜 못 알아봐!”

울분에 찬 목소리가 이연의 귓가를 할퀴었다. 이연은 입술을 깨물고 그의 팔을 떨쳐내려 아등바등 저항했지만, 그럴수록 권채우는 더욱더 절박하게 작은 몸을 끌어안았다.

“싫어요, 놓기 싫어요. 이연 씨, 제발. 나만 두고 가지 마요.”

“놔요!”

“놓기 싫어요.”

“…….”

“가지 마요. 내가 잘 할게요. 제발, 나도 데려가요. 내가 뭐든지 다 할게요. 나도 안아줘요. 내가 더 잘 할게요.”

권채우는 똑같은 말만 계속 반복하면서 그녀를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뜨겁고 가쁜 숨이 폭우처럼 떨어졌다. 하지만 처절했던 목소리는 점점 음산해지기 시작했다.

“왜 나만 이연 씨랑 떨어져야 되는데요. 왜 나만 이연 씨랑 한 몸이 아닌데요. 이렇게 가버리면 난 평생 이연 씨만 기다려요. 한 자리에서 죽을 때까지 기다릴 거예요. 씨발, 죽어서도 기다린다고요.”

이연은 권채우가 아무리 꼬리를 내린 척 굴어도 본성은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알았으니, 읏, 이것부터 좀 놔 봐요……!”

“못 놔요, 싫어요.”

“어떻게 하면 되냐고 물었죠? 내가 하라는 대로 하겠다면서요. 내 마음을 조금이라도 돌리고 싶었던 거 아니에요?”

그가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이연이 조용히 기다려주자 남자는 조금씩 팔에 힘을 풀었다.

이윽고 두 사람은 다시 서로를 마주 보았다. 권채우는 목덜미까지 벌게진 채 이연의 입술만 발라먹을 듯 응시했다.

“만약 하나라도 지키지 않으면―”

“지킬게요.”

그가 성급하게 말을 자르고 대답했다.

“첫째, 내 몸에 함부로 손대지 마요.”

바야흐로 우위가 완벽히 뒤바뀌는 순간이었다.

“둘째, 쫓아오지 마요.”

그녀의 명령에는 사슬이라도 깃든 것처럼 정말로 다리를 움직일 수 없었다. 권채우는 멀어지는 이연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지이잉, 울리는 핸드폰을 받았다.

―도련님, 찾았습니다.

수화기 너머로 장범희가 숨을 몰아쉬었다.

―15년 전, 권 가(家)에서 일하던 운전기사 최 씨입니다. 당시 윤주하 씨를 맡았던 회장님 측 개인 비서진은 전부 사망 처리가 됐거나 실종상태여서 다른 쪽을 파보았는데, 그즈음 그만두었다던 운전기사 최 씨를 찾게 됐습니다.

“용건만.”

―소이연 씨가 사례금을 받지 않았답니다.

“뭐?”

권채우의 목에서 억눌린 신음이 새어 나왔다. 언제 여자 앞에서 절절맸냐는 듯 그의 얼굴이 싸하게 굳었다.

―사례금을 준비해 갔지만 여학생이 끝끝내 거절했다고, 일이 귀찮아졌다고 투덜거리는 소리를 들었답니다. 그 후 행선지를 병원으로 틀었고, 병원비를 직접 지불했다고 보고하는 통화 내용을 운전석에서 들은 기억이 난다고 합니다.

핸드폰을 쥔 권채우의 손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장범희는 조심스럽게 사견을 덧붙였다.

―도련님, 이 사건에서 소이연 씨는…….

“……알아. 충분히 알아들었어.”

숨은 쉬어지지 않고 속에선 신물이 치밀었다. 애틋한 마음만 앞서 그녀의 전부를 안고 가려던 것과 사실을 확인받는 건 다른 문제였다.

권채우는 커다란 손으로 제 뺨을 짚고 숨을 몰아쉬었다. 입을 가린 모양새였으나 그 모습이 꼭 쏟아지려는 무언가를 참는 듯했다.

그녀와 재회한지 이제 막 열흘 남짓.

그러나 늦어도 너무 늦은 것 같았다.

눈알이 터질 듯 안압이 몰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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