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1화 (132/158)

#131

짹짹, 기분 좋은 새 소리에 눈을 뜨자 머릿속이 확 맑아져 있었다. 이연은 떼꾼한 눈가를 문지르며 조각난 기억을 이어 붙여 보았다. 

밤새 앓았던 기억은 어렴풋했다. 이마와 몸을 닦아주던 젖은 수건, 자는 내내 온몸을 감싸 안아왔던 뜨거운 온기, 시간마다 규칙적으로 흘러들어온 시원한 물, 그때마다 마주 닿았던 말캉한 감촉과 다정했던 혀.

‘……대체 밤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때마침 문이 열리고 편안한 실내복 차림의 권채우가 걸어 들어왔다. 

부스스한 얼굴로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다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이연은 제 잠옷에 배인 체향이 누구의 것인지를 즉시 깨닫고 말았다.

얼굴이 붉어져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데 그가 침대맡에 다가와 앉았다.

“밥은 먹을 수 있겠어요?”

남자는 자연스럽게 팔을 뻗어 그녀의 이마를 짚었다. 익숙해 보이는 행동 하나하나에 이연은 또다시 말문이 막혔다. 아직도 꿈인가? 그녀가 느릿하게 눈만 깜빡이고 있자 권채우는 고개를 기울여 왔다.

“열은 이제 없는데.”

“……왜, 왜 그쪽이 여기에―”

“기억 안 나요?”

“…….”

“물론 갇힌 것도 아니고, 이연 씨가 날 가둔 것도 아니에요.”

어디서 많―이 들어본 아득한 말이었다. 

‘날 가뒀어요? 아니면, 내가 그쪽을 가뒀어요?’

역시나 그의 입꼬리에 묘한 미소가 맺혀 있었다.

“이연 씨는 그냥 환자고, 밤새 정신 못 차리다가 지금 일어난 거예요.”

‘그, 그냥 권채우 씨는 환자였어요. 오래 누워 있다가 지금 일어난 거예요.’

이연은 어쩐지 쳐다보기 힘든 남자를 피해 귀만 만지작거렸다.

추자 씨에게 전화를 걸려고 핸드폰을 찾았던 게 마지막 기억이었다. 대체 뭐라고 지껄였더라. 모르긴 몰라도 헛소리를 많이 해댔을 것이다. 

중간중간 젖은 수건 때문에 흠칫 놀라거나, 물이 강제로 넘어갈 때마다 아프다는 말 대신 권 가(家)에 대한 욕을 발작적으로 내뱉었던 것 같다.

“……대충은 기억나요.”

이연이 이마를 긁적이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곧장 낮은 음성이 따라붙었다.

“몸엔 아무 이상 없대요. 그냥…… 약한 몸으로 무리해서 그래요.”

“…….”

“왜 말 안 했어요?”

“뭘요?”

“그……”

권채우는 어울리지 않게 머뭇거렸다. 

방금 전, 상주 의사를 통해 이연의 임신 여부를 확인받고 오는 길이다. 

그는 밤새 한숨도 못 잔 얼굴을 쓸어내리며 형편없이 떨리고 있는 손을 감추었다. 이연을 똑바로 직시하는 눈동자가 하염없이 흔들렸다.

“집밥 먹고 싶다는 거요.”

―치이익!

한 상 차려 주겠다는 말에 홀리듯 그를 따라나선 이연은 부엌 근처를 연신 서성거렸다. 

그는 황태구이부터 제육볶음, 된장찌개, 계란말이, 파래김무침, 토마토소스 양배추 롤을 능숙하게 완성해 나갔다. 

“간 좀, 그 간 좀 봐 가면서 해요.”

“내가 못 미더워요?”

권채우는 음식 냄새가 곤혹스러워 마스크를 쓴 채 계란을 돌돌 마는 중이었다. 어쩌면 그동안 속이 언짢았던 것도 전부 이연의 임신 때문일지도 모른다. 희귀한 사례이긴 하지만, 아예 없는 일은 아니라고.

“마지막으로 먹었던 그쪽 요리는 간이 하나도 안 돼 있었거든요. 짜고, 짜고…….”

이연은 결국 다 먹지 못하고 버려야 했던 그 반찬들을 떠올렸다.

“그런데 이연 씨, 원래 식탐 없었잖아요.”

“……여기에 오니까 하도 스트레스를 받아서요. 먹는 거로 풀게 돼요. 예…….”

권채우는 또다시 거짓말을 반복하는 이연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젠 아무렴 상관없었다. 모름지기 개라면 양치기를 따라다녀야 했고, 그는 거짓말만 일삼는 괘씸한 입술을 성에 찰 때까지 빨다 죽고 싶었다.

윤주하의 죽음은 권 가(家)의 오랜 업보이자 책임이지, 소녀의 짓이 아니다. 더는 이연의 상냥함과 무지함에 손가락질하지 않을 것이다.

머리로는 천 번을 계산해도 답이 나오지 않던 것이, 그녀에게 완전히 무릎 꿇은 순간 이토록 명쾌해졌다. 

그녀와 제 마음을 의심하기만 했던 비틀린 관성은 이연을 완전히 잃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 하나에 모래성처럼 허물어졌다.

중요한 건, 어린 아들을 찾아 제 발로 들어왔다는 윤주하를 누가, 어떻게, 죽음에 이르게 했느냐 하는 감춰진 비밀이었다. 

그러므로 주인을 잃은 개새끼는 이제…….

“욱…….”

그가 입술을 꽉 악다물고 메슥거림을 참았다.

“왜 그래요?”

“욱……!”

“뭐예요, 역시 이번에도 맛없는 거예요?!”

이연은 헛구역질을 하는 남자를 걱정하기보다 눈을 날카롭게 뜨고 따지듯 몰아붙였다. 

버려진 개새끼는 이제 다시 주인 밑으로 들어가기 위해……

“욱……!”

“괜히 밥 위에 초 치지 말고 저리 비켜요!”

이연은 권채우를 인정사정없이 밀쳤고, 그는 제 험난한 앞날에 눈앞이 깜깜해졌다.

* * *

이연은 푸짐하게 차려진 밥상을 보며 벅차오르는 감격에 거듭 침만 삼켰다. 

맛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식탁을 가득 채우는 솜씨는 변함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런데 도련님이 이러는 게 말이 되나? 

그녀는 끝까지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밥을 한 숟갈 떠먹어본 이후, 허겁지겁 식사를 해치웠다. 

특별할 것 하나 없는, 평범하고 또 평범한 맛. 그러나 화이도에서 늘 먹었던 밥. 어릴 적부터 잔반이나 처리하던 그녀의 설움을 싹 씻겨주었던, 하루하루가 행복했던 밥상. 

이연의 가짜 남편이 정성껏 매일 아침을 열어주었던 밥상. 믿을 수 없게도 그녀가 그토록 먹고 싶었던 바로 그 맛이었다.

“소이연 씨 계십니까?”

멍하니 사무실에 앉아 아침을 곱씹고 있던 그녀에게 별안간 깔끔한 복장의 노신사가 찾아왔다.

“누구……시죠?”

“권 이사님께서 지금 뵙자고 하십니다.”

“……!”

훈김에 둘러싸여 있던 몸이 갑작스레 식었다.

이윽고 이연은 저택의 총지배인이라는 노인을 따라 권기석의 서재 앞에 막 도착한 참이었다. 

그녀는 묵직한 방문 앞에 서서 후우, 하고 심호흡을 했다. 노인이 간결하게 두 번 노크를 하자 안에서 “들어오십시오.”하는 짤막한 음성이 들렸다.

안으로 들어가자 무거운 우드 계열의 향이 사람을 압박하듯 날카롭게 떠 있었다. 커다란 중역 책상에 기대 서류를 넘겨보고 있던 권기석은 종이 더미를 내려놓으며 팔짱을 끼었다.

“소이연 씨.”

“네.”

“소식 들으셨겠지만, 화이돔 프로젝트가 끝났습니다.”

“아…….”

화이돔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그녀가 떠올린 건 마지막 심사였다. 처음으로 욕심을 낸 프로젝트였던 만큼 입 안에 씁쓸한 맛이 확 돌았다. 워낙에 하루하루가 소란스러웠던 탓에 잠시 잊고 지냈다.

“조경천 원장이 운영하는 D 병원으로 최종 낙찰됐습니다. 같은 화이도 사람이니 어쩌면 아실지도 모르겠군요.”

이연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화이돔의 개장 날짜도 확정이 돼서 기념식이 크게 열릴 겁니다. 저희 수국 제약은 화이돔의 최대 투자자로서 파티를 주관할 예정이고, 동시에 오랫동안 연구해왔던 신약을 그날 공개하게 됐습니다.”

수국 제약이라는 말에 놀란 것도 잠시, 권기석이 피곤해 보이는 콧대를 꾹 누르며 다가왔다. 

“소이연 씨는 그날 제 파트너로 참석해 주셔야겠습니다.”

“네?”

“소이연 씨가 그랬잖습니까. 화이돔 프로젝트에 4차까지 올라간 실력 있는 나무의사라고.”

“……!”

“심사에 참가했던 당사자이기도 하시니. 제가 꼭 파트너로 모시고 싶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갑작스러운 요구였다. 이연의 미간에 설핏 힘이 들어갔다.

“조금……, 당황스러운데요.”

“그러십니까.”

권기석은 이연의 거절을 익히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태연한 목소리였다.

“네, 그런 말은 애초에 계약서에도 없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그때였다, 어울리지 않는 미소를 걸친 권기석이 불현듯 그녀의 배를 손바닥으로 덮은 건.

“이래도, 말입니까?”

“……!”

가까이에서 마주친 그의 눈동자가 새까맸다. 

숨이 종잡을 수 없이 흩어지고 다리에서 힘이 풀렸다. 비명을 내지르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삼키고 있자니 식도에서 배 속까지 차갑게 얼어붙는 것 같았다.

“내가 모르고 있었다고 생각하셨습니까?”

“……!” 

“그거야말로 놀라운데.”

굳이 거울을 보지 않아도 지금 제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채우는 몰라도 나는 아닙니다.”

“어, 언제부터…….”

순식간에 당한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라곤 하등 쓸모없는 질문뿐이었다.

“산부인과 사진 필요하면 말씀하십시오. 그때 예쁘게 찍힌 사진이 몇 장 있어서.”

“……!”

화이도에서부터? 이연의 숨이 점차 거칠어졌다. 사람 같지 않은 체온, 뱀의 가죽 같은 손목시계. 이연은 숫제 눈앞이 무너지는 충격을 견디며 반사적으로 권기석의 손목을 붙잡았을 때였다. 

“지금, 뭐하는 거야?”

그때, 공교롭게도 문을 열고 들어온 권채우가 문설주에 비딱하게 기대 있었다.

이연의 배를 만지고 있는 권기석과 그의 손을 다정하게 잡은 그녀를 번갈아 쳐다보는 시선이 칼날처럼 섬뜩했다. 

남자는 헛숨을 내뱉었지만 동시에 지극히 고요하기도 했다. 권채우는 어슬렁거리듯 다가가 겹쳐져 있는 두 사람의 손을 가차 없이 떼어냈다.

“읏……!”

권채우는 곧장 이연을 끌고 밖으로 나왔다. 

싸늘하게 굳은 남자는 복도를 성큼성큼 지나면서도 이연의 손을 제 상의로 벅벅 문질러 닦았다. 꼭 신혼부부 같았던 방금 전의 투샷이 머릿속에 낙인처럼 찍혀버려서. 권채우는 나직한 욕설을 내뱉으며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아, 아파요……!” 

울먹임이 섞인 호소에 그가 우뚝 멈추었다. 적막한 복도에는 비슷하게 헐떡이는 두 사람의 호흡만이 섞여들고 있었다.

“미안해요.”

권채우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벌겋게 물든 이연의 손목을 재차 문질러 주었다.

“……그쪽 성질 더러운 건 원래 알고 있었는데요.”

이연은 그에게 한 마디 쏴붙일까 하다가 순간 말문이 막혀버렸다.

“왜, 왜 그런 얼굴을 해요?”

권채우의 눈시울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어딘가 초조해 보이면서도, 싸늘해졌다가, 다시 목이 졸린 듯 새파래졌다. 그가 눈을 깜빡일 때마다 온갖 무거운 감정들이 찐득하게 흘러나왔다. 

“……내가 졌어요.”

“네?”

“내가 잘못했어요.”

고개를 푹 숙인 남자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앞으로 평생, 나한테 대못 박으면서 살아요.”

“……!”

“나를 다시 식물처럼 길러도 좋고, 내가 죽는 순간까지 거짓말만 쳐도 좋아요.”

“…….”

“힘으로, 아프게 안 할게요. 지금처럼 강압적으로도 안 해요. 다시는, 다시는 안 그럴게요. 그러니까―”

권채우는 실핏줄이 터져 붉어진 눈동자를 들어 갈구하듯 그녀를 쳐다보았다.

“제발 나 좀, 달래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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