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0화 (131/158)

#130

어쩌면 세상에는 복종이 안 되는 개가 있을 수도 있다. 나쁜 개가 있을 수도 있어. 

이연은 하루 종일 그렇게 중얼거리며 일과를 무사히 끝냈다. 권채우가 저택의 의무실까지 그녀를 손수 옮겨주는 바람에 얼떨결에 상처도 치료받았다. 

도련님의 변덕은 이연의 사고로 인해 손바닥 뒤집듯 손쉽게 바뀌었고, 관리팀 직원들은 다행히 톱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으……, 으…….”

이연은 몽롱한 정신으로도 이불 속을 파고들었다. 어쩐지 찬바람이 불 때마다 몸이 으슬으슬 춥더라니. 대체 지금이 몇 시지. 

칠성장어가 쫓아오는 끔찍한 악몽을 꾼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얼마나 긴장을 하며 잤는지 잠옷이 식은땀으로 축축할 지경이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머리는 지끈거리고 코에서는 뜨거운 김이 색색 나왔다. 

이거 아무래도 몸살이 단단히 난 것 같은데. 

사실 그럴 만도 했다. 권 가(家)라는 체질에 맞지도 않은 장소에 오자마자 권채우를 다시 만난 것부터 지난한 스트레스의 시작이었다. 일은 생각보다 고됐고, 그들의 가풍과 이곳에서 마주한 상류 사회의 일면은 충격적이었다. 게다가 환경이 바뀌면서 환절기까지 겹치지 않았나. 

그녀는 열감이 도는 손을 뻗어 더듬더듬 핸드폰을 잡았다. 체감 상 몸은 펄펄 끓는 것 같은데 이불을 덮고 있어도 혹한에 들어간 것처럼 추웠다. 

열이 나면 안 될 텐데…….

그런 걱정이 스치듯 들었지만 그저 멍할 뿐이었다. 여기가 어디고, 저가 누군지 감각조차 흐려졌다. 뜨끈한 열이 눈두덩에 몰려 생리적으로 눈물이 고여 들었다. 

일단 추자 씨한테 전화를……. 그녀는 손이 가는 대로 번호를 눌렀다. 뚜르르, 뚜르르, 신호음이 참 길게도 이어졌다. 

눈꺼풀을 들어 올릴 힘도 없는 깜깜한 시야, 무서웠던 악몽, 걱정되는 배 속의 아이, 그 모든 것들이 문득 서러워서. 달칵, 하고 상대방과 마침내 연결이 되자 절로 눈물이 나왔다.

“흐으……, 추자 씨.”

수화기 너머는 조용했지만, 이연은 가쁜 숨을 내쉬며 다 사그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 아파요…….”

숨을 쉴 때마다 느껴지는 뜨거움 콧김에도 그녀는 데이고 아팠다.

“진짜 죽을 거 같은데……, 여기 사람들은 못 믿겠어요…….”

그 순간 잠잠했던 수화기 너머로 거칠게 무언가를 떨어뜨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게 아니라면 문을 쾅―! 하고 급하게 닫고 나가는 소리인 듯도 했다. 하지만 그런 사소한 잡음까지 신경 쓰기에 이연의 정신은 매우 혼미한 상태였다.

“얼른 집에 가고 싶어요. 가서……, 밥 먹고 싶어요.”

이연은 숫제 어금니까지 딱딱 부딪치는 오한을 견디며 한숨처럼 주절거렸다.

“우리 집보다 여기가 재료도 더 좋고 솜씨도 더 좋은데, 이상하게 밥맛이 없어요.”

―……. 

“그래서 먹어도 먹어도 자꾸 허기가 져서……. 숟가락만 빨게 되구…….”

이연은 자신이 열에 들떠 뭐라 하는지도 모른 채 같은 말을 계속 반복했다. 밥 먹고 싶어요. 얼른 집으로 돌아가서 밥 먹고 싶어요. 

“추자 씨 그거 알아요? 여기는 진짜 살 곳이 못 되는 것 같아요……. 커다란 어항 같은 걸 봤는데요, 흐으, 거기에 징그러운 괴물이 있었어요. 정원은 또 어떻게요. 대체 남근 나무는 누가 심은 건지…….”

―……. 

“여권 빼앗겨서 이상한 외국으로 끌려온 느낌이에요. 입맛도 안 맞고, 적응도 안 되고, 사장님은 나빠요…….”

이연이 훌쩍 코를 마셨다. 

“빨리 규백이랑 돌아가고 싶어요……. 여기에 계속 있다간 내가 먼저 미칠 거예요. 놀라고, 충격 받고, 무서워하는 것도 이제는 지치고. 또 긴장을 자꾸 하니까 배도 살살 아픈 것 같구.”

―…….

“시간이 빨리 갔으면 좋겠어요. 내일이 마지막 날이었으면…….”

그 후로도 기억나지 않는 숱한 말들을 해 댄 것 같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수화기 너머로 거친 숨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드르륵 문이 열렸다. 

역시 내가 너무 민폐였죠? 혹시 추자 씨 자다 말고 달려온 거예요? 이연이 웅얼웅얼 입술을 움직였다. 불현듯 차가운 손이 이마를 짚고 한쪽 뺨을 감쌌다. 

“이연 씨.”

차분한 저음이 내려앉았다.

“눈 좀 떠 봐요.”

열기를 식혀주는 시원한 손바닥에 이연이 기분 좋게 볼을 비볐다. 

동시에 이불 끝이 홱 들춰지더니 누군가 잠옷 바지를 종아리까지 말아 올렸다. 

갑자기 살갗을 찌르는 찬 공기가 따가워 무릎을 이불 속으로 당기려 할 때, 대뜸 발목이 잡혀 다리가 일자로 펴졌다. 

어제, 의무실에서 발목과 종아리에 붙여두었던 거즈를 누군가 조심스럽게 떼고 있었다.

“으으…….”

이연은 죽을힘을 다해 이마를 들어 올려 가물가물한 눈을 반절 가량 떠 보았다. 그러자 웬 남자 둘이 뿌연 망막에 흐릿하게 비쳤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생각해보려 했으나 뚝뚝 끊기는 정신에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패혈증일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당장 피부터 뽑고 배양 검사에 들어가야 합니다. 패혈증은 발병 후 짧은 시간 내에도 사망할 수 있어서 신속히 병원으로 가야 해요. 장기 기능 장애나 쇼크가 동반되기 때문에 급성으로 번진다면 치사율은 70퍼센트를 웃돕니다.”

“……지금 뭐라고.”

권채우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이연의 발목을 잡고 있던 손아귀에서 순간 어처구니가 없을 만큼 힘이 쭉 빠져나갔다.

백치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화이도를 벗어나면서 자신과 관련된 물건은 전부 부수고 왔다. 핸드폰을 해지한 것도 같은 이유였다. 

그러다 소이연이 여전히 그를 깨우는 존재라는 것을 받아들인 이후, 남자가 되살린 건 옛 번호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게 걸려온 첫 전화였다. 끔찍이도 힘이 없는 이연의 목소리를 들었을 땐, 장어에게 물린 상처가 아프다는 말인 줄 알고 자고 있던 의사의 멱살을 잡아끌고 왔다.

“……사망?”

그런데 이 말 같지도 않은 소리라니. 

그는 의사의 멱살을 틀어쥐었다가 끙끙 앓는 소리에 다시 이연에게 시선을 돌렸다. 

사망.

누가?

권채우의 동공이 그동안 세워둔 벽을 전부 박살 내듯 잘게 떨어지고 있었다. 기껏해야 두 글자에 불과한 단어는 견고했던 남자를 단숨에 부서뜨리는 화포가 되었다.

그는 의사를 사납게 노려보다 이내 부질없다는 듯 손을 풀었다. 권채우는 오한에 떠는 이연을 뒤에서 끌어안으며 의사에게 당장 네 일을 하라고 눈짓을 보냈다.

의사는 붉어진 낯을 정리하며 왕진 가방을 열었다. 

“배, 배양 검사는 시간이 좀 걸립니다. 일단은 해열 주사부터 놓겠습니다.”

그는 주사약에 바늘을 꽂아 능숙하게 액체를 빨아들였다.

“주사는…… 안 돼요.”

그때 이연이 어물어물한 발음으로도 퍽 단호히 내뱉었다. 

“쉬― 괜찮아요, 금방 끝나요. 검사해야 된대요.”

권채우는 주사 맞기 좋게 이연의 소매를 걷어주며 손등을 겹쳐 잡았다. 

하지만 반투명한 시야에 맺히는 뾰족한 주사기와 낯선 의사, 진저리가 쳐졌던 악몽 속 이빨, 그 모든 것들이 이연을 공포로 몰아갔다. 

그녀는 팔을 허우적거리며 저를 부둥켜안은 웬 팔뚝을 긁었다. 권채우는 그녀가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도록 넝쿨처럼 지독하게 다리를 얽어 제압했다. 

“싫어……. 개, 새끼…….”

팔에 알코올 솜이 문질러지고, 낯선 손길이 맨살을 툭툭 쳤다. 

안 돼, 싫어, 나는 임신했단 말이야……! 필사적으로 입을 벙긋거렸으나 소리로는 나오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벌건 눈물만 차오를 때였다. 

드르륵, 갑자기 방문이 열렸다. 그곳엔 손등까지 덮은 소매로 졸린 눈을 벅벅 문지르는 규백이가 서 있었다. 잠시 방안을 둘러본 아이는 별안간 어울리지 않게 주먹을 쥐고 와락 달려들었다.

“……원장 선생님!”

규백이는 곧장 권채우에게 달려들어 그의 팔뚝을 이로 꽉 깨물었다. 

“수놈 진짜 멍청합니다, 수놈 실망입니다! 역시 삭은 건 버려야 합니다!”

규백이는 평소와 달리 잔뜩 흥분한 상태였다. 아이는 남자의 팔뚝을 빨래방망이처럼 팡팡 번갈아 내리치며 다급히 외쳤다.

“이러면 안 됩니다. 수놈 미쳤습니다……! 올빼미 원숭이가 이래서는 안 됩니다!”

“꼬맹이는 비켜.”

그는 눈썹을 꿈틀거렸지만 그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꼬맹이와 어울려줄 시간이 없었다. 

“올빼미 원숭이는 영장류를 통틀어 가장 좋은 아빠입니다……! 만약 수놈이 용맹한 아가를 해치면 나는 평생의 복수를 합니다. 큰 말벌 오오스즈매 바치, 총알개미 파라포네라, 아프리카 꿀벌, 병졸 개미, 말파리……!”

규백이는 위험한 곤충들을 주문처럼 외며 이번엔 의사의 옷자락을 붙잡고 늘어졌다. 느닷없는 규백이의 난동에 두 사람은 잠시 얼이 빠진 듯 보였다. 그 순간, 의사의 눈에 선명한 이채가 지나갔다.

“도련님, 혹시 이 환자분……, 기혼이십니까?”

“뭐?”

권채우가 인상을 팍 구겼다. 단순히 그것만으로도 압박감이 느껴져 의사는 이마를 닦았다.

“어제 칠성장어 때문에 곧장 패혈증만 생각했는데, 사실 임신 초기에도 체온 조절 능력이 떨어져서 37.7도까지 미열이 지속되기도 합니다.”

“…….”

“환자분처럼 땀도 나고, 오한도 들고, 컨디션이 안 좋을수록 더 그렇고요. 이런 열감 때문에 혹시 감기나 몸살은 아닌지 착각하기 쉽지만 대부분은 자연스럽게 회복됩니다.”

기묘한 정적 속으로 시계 초침 소리만이 끼어들었다. 권채우의 미간에 그어진 미세한 금조차 하얀 석고처럼 굳어버렸다. 

초조해진 의사는 주륵 내려온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피검사는 빨리 해 봐야 합니다.”

“……임신?”

기나긴 침묵을 깨고 나온 권채우의 목소리는 몹시도 낯설었다. 그렇게 되묻는, 혹은 곱씹어 보는 듯한 어조에는 일말의 감정도 없었다. 

권채우는 품에 안고 있던 희멀건 이연을 아주 생경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이연의 어깨에 턱을 끼우고는 둑이 무너지듯 온몸을 밀착했다. 

권채우는 한쪽 귀에 꼽고 있던 이어플러그를 신경질적으로 빼낸 뒤 그녀의 배에 손을 올렸다. 소음을 차단하듯 꾹 감긴 눈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화이도 때와는 달랐던 그녀의 체온, 불그스름하게 올라왔던 예쁜 홍조, 근래 자주 보이던 귀여운 주근깨, 급변했던 감정 기복, 그리고…….

미묘하게 달라져 있던 체향.

이연의 이변을 여태껏 알아차리지 못했던 이유는 자신을 정리했다는 데서 오는 이질감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만약 다른 걸로 채우고 있었다면. 

그것도 내 일부가, 그녀 안에. 

비로소 권채우가 권채우를 꿰맸던 자국이 옅어지고 있었다. 때가 되어 실밥을 풀자 새살처럼 돋아난 것은 다름 아닌 소이연이었다.

‘아―, 나는 네가 없으면 안 돼.’

제발, 나만 떨치고 가지 말아줘.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기울기를 멈추지 않은 추가 마침내 한쪽으로 완전히 쏠린 순간.

“……이연 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지독한 통증이 그를 덮쳐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권채우 없이도 이미 행복해질 준비를 마쳤지만, 자신은 무엇 하나 갖지 못할 거라는 통렬한 예감이 두통처럼 짓쳐들어와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환희에서 나락으로 추락하는 건 한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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