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
그의 한 손이 이연의 티셔츠를 들추고 들어왔다. 배를 타고 올라가 브래지어에 감싸인 가슴을 쥐자 그녀가 흠칫 몸을 틀었다.
“지금 이게 무슨……!”
그는 이연의 반응을 살피듯 뻔뻔스레 그녀를 주시했다. 그녀가 어디까지 참을 수 있는지 그 한계선을 가늠이라도 하는 듯한 기묘한 시선이었다.
“저리 비켜요!”
이연은 결박에서 풀려난 손으로 그의 어깨를 때리고 밀쳤지만 그에겐 티끌만큼의 타격도 가지 않았다.
가슴의 정점을 누른 엄지는 그녀가 눈을 치켜 뜰 때까지 뭉근하게 비벼졌고, 이내 잠옷 바지까지 쑥 내려갔다.
“이 미친놈이!”
참다못한 이연이 그의 따귀를 짝―! 날렸다.
“아야.”
권채우는 엄살을 부렸지만 입꼬리는 광대까지 올라붙어 있었다.
“이연 씨, 지금 그 눈깔 엄청 예뻐요.”
“……!”
남자는 이연의 성난 눈빛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내내 날카롭기만 하던 눈꼬리가 별안간 휘어지고 시원스레 트이는 입술이 얼마나 예쁘던지. 이연은 그리움을 흠뻑 맞은 사람처럼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했다.
권채우는 그녀의 눈꺼풀에 입을 맞추었다. 그 비틀린 의도에 이연이 질색하듯 고개를 홱 돌리자 남자의 낯이 딱딱해졌다.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미소를 그럴듯하게 꾸미며 퍽 간절히 읊조렸다.
“이연 씨, 하루하루 더 나를 미워해 줘요.”
* * *
―왈, 왈왈! 왈왈!
어디선가 개소리가 들린다 했더니 느닷없이 검은색 개 두 마리가 튀어나왔다.
규백이와 나란히 산책을 하고 있던 이연이 화들짝 몸을 물렸다. 약간 둥그스름한 머리에 긴 주둥이, 삼각형으로 곧게 선 귀.
“호오……. 저먼 셰퍼드입니다.”
이연의 손을 잡고 있던 규백이 감탄사와 함께 내뱉었다. 개들이 크게 짖으며 이빨을 드러내자 직원이 곧장 목줄을 조이며 그들을 통제했다. 이연은 사납게 입질하는 기세에 놀라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어허, 안 돼!”
직원은 엄격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개들을 막아섰다. 이연은 아몬드 모양의 짙은 갈색 눈동자가 천천히 진정되는 것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직원은 미안해하며 자신을 권 가(家)의 경비견을 훈련시키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그때 규백이가 호다닥 이연의 등에 숨으며 고개만 빠끔 내밀었다.
“가끔 개들은 놀자는 것과 무는 것을 헷갈려합니다.”
“오, 그렇지. 개가 입질하는 건 다양한 이유가 있단다.”
“두렵거나 아플 때도 뭅니다.”
“오, 그렇지, 가끔은 서열을 잡으려고 그럴 때도 있고.”
직원이 줄을 다시 바짝 잡아당기며 고놈 참 똘똘하네, 하고 중얼거렸다.
이연은 두 사람의 자연스러운 대화를 듣다가 웬 단어 하나에 신경이 쏠렸다.
“……서열이요?”
이연이 눈꺼풀을 긁적이며 저먼 셰퍼드의 잘생긴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 예. 이놈들이 사람을 상대로 계속 서열을 잡으려는 본능이 있어서요. 특히 누워있을 때 얼굴 위로 올라와서 눈이나 귀를 깨물면 반드시 단호하게 제지해야 합니다. 아래턱을 붙잡고 경고하는 방법도 있고, 손으로 밀쳐내는 방법도 있어요.”
불현듯 이연의 표정이 묘해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심각한 얼굴로 직원의 말에 귀를 기울이자 남자는 골치가 아프다는 듯 웃으며 입을 모터처럼 움직였다.
“주인이 개보다 서열이 낮으면요, 얘네 알파독 증후군에 걸려요. 경계심이 강해지고, 예민해지고, 공격성도 높아지고요. 사회성은 쥐뿔도 없는데 자기 영역만 과잉보호하려고 들어서 사납게 짖고, 죽일 듯이 물기도 하고요. 가끔은 보호자도 위협하고 집착도 심해져서 서열 정리는 정말로 필수예요.”
……뭐지? 지금 저 훈련사는 독일의 국견이자 군견으로 유명한 저먼 셰퍼드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왜 이연은 지난밤의 권채우가 떠오르는지 도통 모를 일이었다.
우연히 권 가(家)의 주민을 만나 엘리베이터 앞에서 사담을 나누는 건지, 아니면 상담을 받는 건지 그 느낌까지도 아리송할 지경이었다.
게다가 서열이라니. 언제나 상생을 추구해왔던 이연에게 서열이니 권력이니 하는 것들은 멀어도 너무 먼 이야기였다.
“그런데 개 키우시나 봐요?”
“네?”
“제가 개 얘기만 나오면 말이 많아지는데, 엄청 잘 들어주셔서요.”
“아…….”
어젯밤, 이연의 복장을 간단히 뒤집어놓고 다시 비척비척 사라진 권채우 때문에 밤잠을 설쳤다.
그녀가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이는 사이, 직원이 다시 물어왔다.
“만약 비슷한 문제가 있으시다면 복종 훈련은 꼭 시켜야 합니다, 아셨죠?”
“…….”
이연은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입을 안으로 말아 물기만 했다.
“―막내 도련님이요?”
산책을 마치고 사무실로 들어가자마자 웬 경직된 목소리가 그녀를 맞이했다.
관리팀 내부는 이상한 전운에 휩싸여 있었다. 이연은 그 분위기를 일찍이 감지하고는 걸음을 옮기며 관리사들의 면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들은 안전모와 보안경, 안전 장갑, 귀마개까지 갖춰 끼고 체인 톱과 여러 가지 도구를 챙겨 나갈 준비에 한창이었다.
오늘 일정이 어떻게 됐더라. 하지만 스케줄을 곧장 떠올려 본 이연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는 커피포트에 물을 올리고 있던 직원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 단순 관리 말고는 일정 없었잖아요.”
“아, 그게요…….”
직원이 커피 믹스 한 포를 죽 뜯어 종이컵 안에 쏟아부었다.
“막내 도련님이 갑자기 별채 정원을 엎으시겠다고…….”
난감해하는 목소리에 이윽고 이연의 미간이 조용히 구겨졌다.
“나무를 다 베어 달라 하셔서요.”
* * *
권채우의 거취를 물어 도착한 곳은 50m 길이의 내부 수영장이었다.
여기까지 오는 내내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남자의 막무가내식 요구가 누구의 심기를 건드리려 한 건지 빤히 읽혀서. 그녀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씩씩거렸다. 나랑 해보자는 거지, 지금.
덩달아 맨발로 들어온 이연은 고요한 수영장 안을 둘러보며 거침없이 걸음을 내디뎠다.
일렁이는 물결이 천장에 크리스털처럼 비치는 정적인 곳. 그러나 익숙한 왁스 냄새 대신 묘한 물비린내가 났고, 새까만 타일 때문인지 물도 어두컴컴했다.
다소 낯선 분위기에 그녀가 걸음을 멈추고 물속을 들여다볼 때였다. 신기한 마음에 손가락을 넣어 물을 한 번 휘젓는데 별안간 수면 아래에서 치솟듯 올라온 누군가에 의해 손이 꽉 붙들렸다.
“……!”
기척도 없이 물살을 가르고 올라온 인영에 이연은 소스라치며 주저앉았다.
온몸에 달라붙는 물을 떨쳐내며 올라온 남자는 수영모를 벗으며 험악하게 쏘아붙였다.
“미쳤어? 여기가 어디라고 지금……!”
물기에 젖어 미끌거리는 몸이 밭은 호흡으로 들썩였다. 이어플러그를 꽂고 테이핑을 한 한쪽 귀에 시선이 쏠린 순간, 빨판 모양을 한 웬 입이 크게 벌어지며 무언가가 수면 위로 튀어 올랐다.
“꺄악!”
둥그런 구멍을 촘촘히 메우고 있는 건 징그럽고 날카로운 이빨이었다.
사태를 파악할 겨를도 없이 별안간 이연의 엉덩이가 수영장 쪽으로 쑥 딸려갔다. 바닥에 주저앉으면서 수면 아래로 떨어졌던 발목에 물고기 떼가 달라붙은 것이다.
“흐아악……!”
타일 바닥을 마구 할퀴어보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거머리처럼 달라붙은 강력한 흡착력에 어느새 무릎까지 빠지고 말았다.
가늘고 길쭉한 물고기는 토막이라도 난 듯 주둥이가 짜름했고, 그 안은 쌀알처럼 빽빽한 이빨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그게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그 순간, “씨발!”하고 거칠게 외친 권채우가 이연을 즉시 끄집어냈다. 그런데도 흡입력이 얼마나 강한지 이연의 발을 물고 늘어지는 놈들까지 함께 딸려 나왔다.
권채우는 험악하게 얼굴을 구기며 기생충 같은 칠성장어들을 맨손으로 때려잡았다. 원래라면 머리 부분을 칼로 절단해야 했지만, 지금은 급한 대로 주먹으로 뭉갤 수밖에 없었다. 머리 부분을 터트릴 듯 조여야만 떼어지는 지독한 놈들이었다.
“대체 이, 이게 뭐예요? 수영장에 왜 저런 게 있어요?”
“수영장이 아니고 수조예요.”
그가 칠성장어를 과격하게 떼어내며 짓씹듯 말했다.
“윽, 흐으……!”
난생처음 겪어보는 상황에 절로 눈물이 고여 들었다. 다시 수조를 보니, 타일만 새까만 게 아니라 뱀장어처럼 생긴 것들이 수조 안을 득실득실하게 채우고 있었다.
“칠성장어는 특히 상처 난 살을 좋아해요.”
“……!”
불현듯 규백이와 함께 읽었던 백과사전이 떠올랐다. 턱이 없는 입술이 너무 징그러워 유독 기억에 남았던 그림이 바로 칠성장어였다.
바다의 시체 청소부. 죽은 물고기의 몸에 빨판을 붙여 피와 영양분을 빨아먹는다는 가장 원시적인 형태의 물고기.
아니, 집에서 이런 걸 왜 키워? 수조라면서 거기서 수영은 왜 해? 대체 무슨 용도로 저걸 키우는 거예요? 따지고 싶었던 나무 이슈는 정작 다 까먹고 그저 얼이 빠져버렸다.
“안 그래도 내가 며칠 굶겨놨는데. 거기서 이연 씨가 나오면―”
마지막 한 마리까지 전부 처리한 그가 젖은 머리를 쓸어 올렸다. 권채우도 어지간히 놀랐는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반쯤 세운 무릎에 이마를 갖다 대었다. 그의 눈꺼풀이 간헐적으로 떨리고 있었다.
“거 봐요, 내 말이 맞잖아요. 난 이연 씨만 관련되면 싹 다 죽이고 싶어져요.”
이연은 희게 질린 얼굴로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렇게 된통 당하려고 찾아온 게 아닌데, 어떻게든 그의 의견을 철회시키고 싶어서 온 건데. 지금은 머릿속이 새하얗기만 했다.
석류 단면을 잘라낸 것 같은 수십 개의 입 구멍이 자꾸만 잔상처럼 남아서. 으스스 떨리는 몸을 그저 견디고만 있을 때였다.
“죽은 살점만 먹여 버릇해서 쟤들은 피에 반응하는데. 이연 씨 발에 까진 부분이 있었나 봐요.”
권채우가 그녀의 무릎과 겨드랑이 사이에 팔을 집어넣고 번쩍 들어 올렸다.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그럼 취소해요. 별채에 있는 나무 죄다 베라고 지시한 거.”
여러모로 한계를 넘은 이연이 울컥 화내듯 남자의 턱을 움켜쥐었다.
“그러게요, 애초에 그딴 게 아니라―”
비슷한 눈높이에서 그와 정면으로 시선이 마주쳤다. 권채우는 선베드에 이연을 내려놓으며 그녀의 발과 종아리를 살폈다.
씨발, 다른 새끼가 문 자국 같아서 거슬리네. 이빨 자국을 매만지던 그가 눈을 치떴다.
“차라리 내가 물걸 그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