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배를 만지던 손이 뚝 그치고, 이연의 낯이 당황스러운 빛으로 물들었다. 그녀는 누워있던 몸을 일으켜 상대를 경계하듯 바라보았다. 침묵에 빠져들었던 입술이 간신히 열렸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식당 이모를 들들 볶는다 들었는데.”
“아…….”
안도의 숨이 터져 나왔다. 생각보다 몸이 더 경직돼 있었는지 어깨에서 힘이 빠지자마자 자세가 무너졌다. 이연은 이불에 얼굴을 파묻고는 쿵쿵 뛰어대는 심장을 견뎠다.
절망 끝에 찾아온 생명은 그녀가 홀로 품은 것이었고, 당연히 엄마의 성을 따라 아이는 ‘소’ 씨가 될 예정이었다.
그러한 결심은 섹스 파티를 겪은 이후 더욱 강해졌다. 총과 약을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는 이곳이 아니라, 아름다운 바다와 식물이 어우러진 자연 속에서 아이를 키우고 싶어서.
“그쪽이랑 할 얘기는 아닌 것 같아요.”
이연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천천히 호흡했다. 권 가(家)의 개입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 그러려면 조금의 여지도 없이 선을 잘 그어야 하는데. 자꾸 저번부터 권채우가…….
“불편한 게 있으면 고용주한테 내가 직접 가서 말할 거예요.”
“그놈의 고용주.”
그는 턱 끝까지 내려온 복면을 신경질적으로 잡아 늘렸다.
“볼 일도 없고, 할 말도 없으면 이만 나가요. 아니, 설령 있더라도 나가주세요.”
“…….”
“외간 여자 방에 불쑥불쑥 들어오는 거 범죄인 거 알죠?”
“그년을 잡아 온 이후부터 모든 게 변했어……!”
그때 권채우가 한쪽 귀를 덮으며 눈가를 찡그렸다.
외상성 고막의 천공.
갑작스러운 기압의 폭발로 고막에 구멍이 뚫렸다. 한 번도 청력을 다쳐본 적 없던 남자는 시시때때로 울리는 이명과 난청 때문에 며칠을 불편하게 지냈고, 이제야 자연 재생이 되어가는 중이었다. 그 와중에 구멍 난 고막을 가득 채우고 있는 건 친모의 악쓰는 소리였다.
권기석과 윤주하에 대해 아는 사람이 전무하자 결국 요양 중인 친모를 찾아가기에 이르렀다.
모자 사이라고 하기엔 권채우는 어릴 적 다른 이의 손에서 자랐고, 곧장 해외로 떠났기 때문에 살을 부대끼며 산 시간이 극단적으로 짧았다.
혈육이라는 이유로 잘 살고 있던 아이를 다시 되찾아 왔으면, 그 핏줄이라는 것에 큰 가치가 있어야 했는데. 그는 처음부터 이 집 사람들에게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믿음직했던 우리 기석이가…… 기석이가…….”
그녀는 하얗게 샌 머리를 연신 만지작거렸다. 그러나 달달 떨리는 주름진 손 때문에 머리카락은 점점 귀신의 봉두난발 같아졌다. 친모는 돌연 공포에 질린 눈동자로 천장만 더듬었다.
“여보, 기석이가, 기석이가 이상해.”
그녀는 비밀 이야기를 하듯 목소리를 한껏 낮추고 온몸을 떨어댔다.
“……첫째한테 지하실을 맡기는 게 아니었는데.”
친모가 갑자기 머리를 치며 발작을 시작했다.
“아아……! 아아악……!”
찰싹찰싹 두 눈을 끊임없이 때리며 소리를 지르자 느긋하게 일어난 권채우가 미리 들고 있던 안정제를 그녀의 목에 주입했다. 친모는 그의 팔뚝을 마구 할퀴며 노려보았다.
“너, 너…… 네가 어떻게,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내 아들이 어떻게……! 네 동생을 훔쳐 간 년이랑 개처럼 붙어먹을 수가 있어―! 그년은 아직도 내 얼굴만 보면 채우 좀 보게 해 달라고 지껄이는데……! 우리를 위해 대신 응징해주겠다는 건 거짓말이었니? 그년 사지를 찢어 놓으랬더니, 대체 너는……! 기석아, 기석아―! 지하실은 이제 가지 마렴! 아아악……! 아아악―!”
권채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주사기에 더욱 힘을 주었다. 발작이 점차 잦아들자 불처럼 일어났던 그녀의 눈동자도 차갑게 식어갔다.
멍하니 손가락만 까딱이고 있는 건 친모인데, 숫제 그가 나가떨어진 듯했다. 오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기분이 더러워서. 소리 내 웃었나, 아니면 욕을 뱉었나.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소이연의 방이었다. 머릿속 어딘가에 또다시 피가 고이는 것 같았다.
“그냥―”
조금 비틀거린 권채우가 손바닥으로 이마를 슥 쓸어 올렸다. 낮은 목소리가 흔들리고 있었다.
“잠깐만, 여기에 앉아 있다 갈게요.”
“…….”
“아주 잠깐만.”
문득 권채우의 시선이 흔들의자에 꽂혔다. 이연은 의심쩍은 표정으로 덩달아 고개를 돌려보았지만 그곳엔 아무도, 아무것도 없었다.
이내 남자는 흔들의자에 머리를 기댄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건 쉬는 것 같기도 했고, 피곤에 지친 짐승 같기도 했다.
그제야 왜 권채우가 불쌍한 꼴은 보이지 말라며 그토록 윽박을 질렀는지 알 것 같았다. 연민이란 독과 같아서 손 쓸 도리도 없이 마음 한구석을 내어줘야 했기 때문에.
너는 왜 내 앞에서 서슴없이 모욕을 당했으며, 나는 왜 그런 너를 감쌌던 건지. 모든 게 지리멸렬해서 이연은 더욱 차갑게 그를 밀어냈다.
“대체 나한테 뭘 바라는지는 모르겠어요.”
그가 흐리멍덩한 눈을 들어 이연을 바라보았다. 아, 움직인다. 따위의 헛소리를 내뱉으며.
이연은 말없이 그를 쏘아보고 있다가, 너무 아파서 다시는 들여다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혹시 우리가 오해를 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권채우는 건조하게 그녀를 쳐다보기만 했다.
“미안하지만 우리 사이에는 오해가 없어요. 어머니에 관한 일은 오해가 아니에요. 거짓말쟁이의 말을 믿고 안 믿고는 그쪽 맘이지만, 난…… 진실을 말했어요.”
“…….”
“그분은 어린 아들을 보고 싶어 했고, 나는 도와주고 싶었어요. 그치만 그게, 내 입장일 뿐이라는 것도 이제는 알아요. 결과적으로 내 행동이 어머니를 죽게 했다면, 그쪽이 날 버린 건 옳았어요.”
이연은 목구멍이 쓰라려서 침을 몇 번이나 삼켜야 했다.
“부탁인데 우리 이모처럼은 되지 말아요.”
“…….”
“권채우 씨는……, 다르게 살 수 있잖아요.”
이모는 바닥에 떨어진 이연의 머리카락만 봐도 참을 수 없다는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미소 띤 얼굴이 전혀 생각나지 않는 관계는 그만큼 사람을 좀먹었다. 이연은 갑작스러운 한기에 몸을 웅크렸다.
“떠올리기 싫은 걸 평생 보면서 살지 말아요. 우리는 잘 헤어졌고 각자의 길을 가는 게 백번 맞아요. 그러니까 날 계속 미워해요. 그쪽이 날 증오한다 해도 나는 그 사실이 더는 아프지도, 슬프지도 않거든요.”
“…….”
“대신, 나한테 흔들리지 마요.”
이연이 그의 눈을 보고 강하게 못박았다. 지금처럼 헷갈리게 굴지 말고, 뚝심 있게 미워하라는 말이었는데, 권채우가 불쑥 울분에 찬 얼굴로 말했다.
“왜 흔들리면 안 돼요?”
그의 눈동자에서 새빨간 불티가 튀고 있었다.
“어떤 새끼는 원수를 몇 년씩이네 가둬 두고 있었는데, 왜 나는 씨발―”
그가 파르르 떨리는 눈가를 손날로 꾹 눌렀다.
온 힘을 다 소진해버린 듯 얌전히 바닥에 앉아만 있던 그가 별안간 네발로 기듯이 다가와 그녀의 이불을 움켜쥐었다. 손등의 뼈마디가 하얗게 튀어나올 정도로 천 조각을 비트는 모습이 매서워서. 그 서슬 퍼런 기세에 이연은 옴짝달싹 못했다.
“왜 나만 이렇게 어렵고, 이연 씨는 후련해 보이는데요.”
그는 통증이 이는 듯 신음을 뱉어냈다.
“나는 지금도 쓰레기더미에 처박혀 있어요.”
권채우는 이불째로 그녀를 끌어당겨 머리를 기댔다. 이연은 완강한 힘에 침대를 빠져나가지도 못하고 날 것의 감정을 그대로 받아야 했다. 바닥에 무릎을 꿇은 그가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차라리 죽이고 싶을 정도로 날 미워해 주면 안 돼요?”
“……!”
“내가 정말 필요 없어요? 화풀이 상대로도 필요 없어요?”
“……난 그렇게 소모적인 거 싫어요.”
“왜 이연 씨는 백번만 생각하고, 백 한 번째는 생각 못하는데요.”
“…….”
“왜 나를 더 이상 미워하지 않아요?”
온갖 감정이 뒤섞인 눈동자가 질척하고 스산하게 회오리쳤다. 그건 이연이 비쩍 말라가면서까지 견뎌야 했던 숱한 밤과 닮아 있었고, 반대로 그녀가 선택하지 않은 파괴의 구덩이를 담고 있었다.
이연은 서서히 사나워지고 불안정해지는 그의 상태를 알아차렸지만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나는 앞으로 열심히 웃기만 할 거라서요.”
망설임 없는 대답에 권채우의 얼굴은 더욱 일그러졌다.
“……권기석 말대로 평범하게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고 애도 낳으면서?”
“그건 그쪽이 알 바 아니고요.”
“그러면 왜 섹스 파티에서 나를 도와줬어요?”
“…….”
“나를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않는 주제에 거기서 내 버클은 왜 풀고, 권기석의 시선은 왜 돌렸어?”
날 선 음성이 허스키하게 터져 나왔다.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이연은 감정이 조금도 비치지 않는 투명한 시선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정원을 빠져나가는 데 그쪽이 나서줘서 내심 편했거든요. 그래서 빚지기 싫었어요.”
“…….”
“그것뿐이에요.”
남자의 낯에 찐득하게 엉겨 있던 찌꺼기들이 돌연 싹 씻겨 내려간다. 권채우가 웃음을 터트렸다. 이해할 수 없는 박탈감과 패배감이 까맣게 물든 그의 동공을 깊숙이 찌르고 또 찔렀다.
그 순간, 이불을 홱 벗겨내고 침대 위로 올라온 남자가 이연을 가두듯 두 팔을 내렸다. 다리가 얽혀들고 배가 맞닿았다. 그가 고개를 숙이자 한층 짙어진 피 냄새에 이연은 숨을 멈추었다.
“이연 씨 그거 알아요?”
권채우는 잠을 자지 못해 예민한 눈꺼풀을 질끈 감았다 떴다. 다시 드러난 눈동자에는 한계 끝까지 아슬아슬하게 차오른 인내가 보였다. 이연은 부디 그것이 제 쪽으로 넘어오지 않길 바랐지만, 싸하게 굳은 얼굴은 어쩐지 심상치 않았다.
“미워도 섹스할 수 있어요.”
“……!”
“미워도 평생 데리고 살 수 있고―”
왜인지 그는 족쇄에서 풀려난 짐승같이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미워도 사랑할 수 있어요.”
아울러 설원에 홀로 남은 미아처럼도 보였다.
“이연 씨, 정말 내가 필요 없어요?”
“……없어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권채우는 이연의 두 팔을 제압하고 입술을 겹쳤다.
“……!”
그녀가 한 박자 늦게 몸을 굳혔으나 이미 두 손은 매트리스 위에 강제로 짓눌려진 채였다.
이연은 본능적으로 어금니에 힘을 주었지만, 다물린 입술 사이로 뜨겁고 노련한 혀가 억지로 길을 트고 있었다. 살짝 벌어진 틈으로 혀끝이 과격하게 침범해 들어왔다. 절절 끓는 불덩이 같은 혀는 더욱 깊숙이 들어와 점막을 핥다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수년을 굶을 사람처럼 턱을 움직였고 도톰한 입술을 짓누르고 빨아댔다.
이연의 몸에서 조금씩 힘이 빠질 무렵, 그가 입술을 뗐다. 남자는 창백한 얼굴로 뇌까렸다.
“정말로 내가 필요 없어요?”
“…….”
이연은 고집스레 대답하지 않았고, 권채우는 그녀의 입술만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이연 씨는 여전히 개를 좆도 못 다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