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권기석이 초소형 인이어를 빼낼 때부터 다리가 절로 움직였다.
총으로 작은 수신기를 겨누는 순간, 이연은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듯 굴었던 권채우가 떠올랐다. 각기 다른 행동이 뜻밖에도 귀퉁이끼리 붙어버리자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니, 너무나 많은 생각이 휘몰아쳐 숨이 가빠졌다.
이연은 구경하기 위해, 혹은 게임에 동참하기 위해 몰려들었던 사람들을 밀치며 나아갔다.
권기석은 방아쇠를 당겼고, 이연은 권채우에게 달려들어 다짜고짜 그의 바지 버클을 풀었다.
탕, 탕, 탕―!
이 모든 게 순식간에 벌어졌다.
곧게 뻗은 장딴지와 무릎 위로 갈라진 허벅지 근육, 그리고 골반에 딱 들어맞는 드로어즈가 드러나자 이연은 허둥지둥 그를 가리듯 섰다.
총성에 놀란 것도 잠시, 아연해하던 사람들은 이내 아무도 손대지 못했던 버클을 풀어헤치고 끝끝내 바지를 벗겨버린 소이연에게 시선을 돌렸다.
“…….”
“…….”
이연은 어금니를 꽉 물고 있는 남자를 조마조마하게 응시했다.
권채우는 터져버린 기계의 영향으로 삐― 하고 울리는 이명을 견디고 있었다. 고막이 찢어진 건 둘째치고, 격렬한 파동이 귀 어딘가를 건드렸는지 불현듯 현기증이 덮쳤다.
목에 힘줄이 잔뜩 불거지고 얼굴이 달아올랐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게 통증인지, 수치심 때문인지 구분하지 못했다.
다만 으르렁거리듯 이연의 어깨를 꽉 부여잡은 악력 때문에 그녀만은 진실을 알았다.
‘참아요.’
이연이 소리 없이 입술을 움직였다.
남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누렇고 붉은 술에 젖어 꼴이 말이 아니었다.
입술은 터졌고, 눈두덩이는 권투 선수처럼 부풀어 올랐다. 보기 좋았던 상체는 누군가의 손자국으로, 유두 주변은 살점이 푹 파인 흉터들로 가득했다. 온갖 모욕의 증거들이 눈앞에 적나라하게 있었다. 이연은 굳은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이내 그녀는 권채우의 드로어즈에 엄지를 끼우고 도경진을 바라보았다.
“나 이거 벗길 수 있는데, 게임 끝 맞죠?”
권기석이 붙잡은 실마리를, 권채우를 향한 시선을 어떻게든 흩트려놓고 싶어서.
태연해 보였어야 했는데 하필이면 성대가 떨렸다. 그럼에도 깨질 듯 날카로운 공기를 담백하고 가벼운 어조로 꾸역꾸역 파고들어 갔다.
도경진은 흐리멍덩한 눈을 재차 깜빡였다. 폭력에는 무감했어도 노골적인 추파엔 날카롭게 반응했던 권채우가 이상스레 고분고분한 것이다.
“정말 쓰레기 같은 집구석이에요…….”
이연이 차갑게 읊조리며 남자의 속옷을 명목상 내렸다가 얼른 입혀주었다. 그사이 갑자기 딱딱해져 버린 성기 때문에 속옷이 걸렸지만, 이연은 “이게 왜…….”하고 당황하며 밴드를 탁 놓았다.
아늑하고 시원했던 남자의 체취를 싹 덮어 버린 술과 비린내. 그건 꼭 구정물 같은 냄새였다.
그녀는 자신이 이 파티의 가해자가 된 것만 같은 기분에 속이 꽈배기처럼 뒤틀렸다. 지금은 권채우의 얼굴을 똑바로 보는 것조차 힘이 들었다.
이연은 경직된 걸음걸이로 권기석에게 다가갔다.
“이런 건 계약서에 없었어요.”
그녀가 숨을 씨근덕거리며 말했다.
“나는 정원 관리를 하러 온 거지, 이런 음란한 파티에 놀잇감이 되겠다고 한 적이 없거든요.”
권기석은 상황을 짐작해 보듯 눈매를 좁혔다. 그는 박살난 인이어에 여전히 총을 겨눈 채 소이연을 탐색해 나갔다. 그 찰나의 시선이 끝도 없이 길게 느껴졌다.
이연은 권기석이 질질 끌고 온 사람을 쳐다보지 않기 위해 목을 꼿꼿이 세웠다. 새까만 총신이 무서워 마른침이 절로 넘어갔다.
“권기석 씨는 직원을 보호할 마음이 있긴 있어요?”
“…….”
“저는 아직도 모르겠어요. 내가 왜 이쪽 인간들한테 휘말려서 위협을 느껴야 했는지. 권기석 씨가 제 고용주고, 이 파티의 주최자가 맞다면, 총질 말고 저부터 해결해 주세요.”
권기석은 신발도 신지 않은 이연을 천천히 훑어 내려갔다. 그 느릿한 동공이 꼭 오류를 잡아내려는 기계 같아서. 이연은 움켜쥔 주먹을 등 뒤로 감춘 채 다시 강하게 재촉했다.
“지금 당장이요.”
그녀는 한 발짝 더 다가가 박살이 난 인이어를 절묘하게 덮었다.
“한시라도 빨리 여기서 나가고 싶다고요.”
이연의 올곧고 절박한 눈빛에 권기석의 표정이 순간 흔들렸다. 윤주하가 꼭 저런 말로 사람 속을 수천수만 번 뒤집어 놓았었다. 권기석은 불쑥 밀려드는 아득함을 느끼며 권총을 쥔 손에서 힘을 풀었다.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이윽고 정원의 불이 다시 하나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커다란 조명이 켜질 때마다 쾅, 쾅, 하고 철문을 치듯 발전기가 돌아갔다.
한 구역씩 어둠이 물러나고 있었다. 끔찍했던 시간이 비로소 끝나가는 소리였다.
“이연 씨.”
그때 갈라진 음성이 권기석을 따라 걸음을 옮기던 이연을 붙잡았다.
별것 아닌 제 이름 한 마디에 기분은 다시 수렁으로 처박혔다.
‘너도 끔찍하고, 여기도 끔찍해.’
이연은 반응하지 않고 걸치고 있던 깨끗한 와이셔츠만 꽉 움켜쥐었다. 집요하게 꽂히는 시선 때문에 등이 따끔거렸으나 이연은 끝까지 돌아보지 않았다. 그 언젠가의 권채우처럼.
그를 한 겹 벗겨낸, 비참한 밤이었다.
* * *
요란했던 파티는 해가 뜨면서 쓰레기들만 남았고, 일상은 다시 잠잠해졌다.
그녀는 심란할 때면 늘 그래왔듯 더욱 열심히 흙을 만지고 나무를 돌보았다.
그러나 자정이 되면 어쩌지 못하고 그날의 권채우가 떠올랐다. 예전에는 싸늘한 모습으로 사람을 잠도 못 들게 괴롭히더니, 이제는 구정물에 빠진 더러운 몰골로 그녀의 머릿속을 휘저었다.
뇌리에 조금이라도 틈이 생기면 기다렸다는 듯 얻어맞던 권채우가 재생되었다.
그녀가 목격한 향락의 뒷면은 생각보다 더 고약하고 원초적이어서. 나쁜 의미의 강렬함 때문에 이연은 밤만 되면 심장이 뛰고 불안해졌다.
본격적으로 태교에 달려든 것도 그날 이후부터였다. 좋지 않은 기억과 그로 인해 아로새겨진 불안이 아이에게 전염이라도 될까 봐 이연은 고저 없이 차분한 규백이의 목소리를 들으며 백과사전을 탐독해 나갔다. 그러면 규백이는 꼭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듯 배를 조용히 쳐다보았다.
“아이구, 원장님. 왜 이렇게 밥을 못 드세요?”
“…….”
“원장님?”
그렇게 시간이 날 때마다 규백이와 시간을 보냈고, 권채우와는 우연이라도 마주치지 못했다.
그럼에도 손가락에 남은 울혈이 흐릿해질수록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횟수는 잦아졌다.
“―소이연 원장님!”
“아, 네, 네!”
쥐고 있던 젓가락이 쇳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그녀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괜찮으세요?”
“네, 맛있어요……!”
“젓가락을 거의 안 움직이시던데요?”
머리를 이대 팔로 가지런하게 정리한 사십 대 초반의 남자 직원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이연은 현재 관리팀 직원들과 내부 식당에서 점심을 함께하는 중이었고, 그녀는 씩씩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속으로 먹었어요!”
황당함이 비치는 남직원의 얼굴을 보고 나서야 이연은 제 말실수를 깨달았다.
“그러니까…… 천천히 먹고 있다는 뜻이었어요.”
“요즘 좀 이상한데요, 혹시 무슨 고민 있어요?”
이연은 한 짝만 남은 젓가락을 입술 끝에 대고 누가 봐도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차고 넘치는 고민 중 이연을 가장 골치 아프게 하는 건 권채우의 증발도, 자정의 불안도 아니었다. 문제는……, 욕구불만이 와서 큰일이라는 거다.
먹고 싶은데 먹을 수가 없는 것.
해 먹기가 불가능한 것.
그 척박한 진실에 이연은 조금씩 말라갔다. 배 속 아이를 위해 어떻게든 아침, 점심, 저녁을 꼬박꼬박 챙겨 먹고 있지만 입이 만족스럽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참, 원장님. 감귤 나무를 들여와 보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해요?”
“감귤이요?”
“네, 조생감귤 나무에다가 천혜향을 접붙인 나무인데 운 좋게 받을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와…….”
이제는 누가 툭 건드리기만 해도 군침이 돌았다. 이제는 나무보다 그 열매의 맛부터 떠올리는 스스로가 황당할 지경이었다.
접붙이기는 식물의 가지, 뿌리, 싹 등을 절단하여 다른 부분에 붙이는 작업이었다. 그러면 두 개의 서로 다른 식물이 접합하여 완전히 새로운 독립 개체가 된다.
귤에 탱자 맛이 돈다든지, 고추에 오이 맛이 난다든지, 복숭아에 자두 맛이 나는 것이다.
그때 떨어진 젓가락을 줍던 이연이 멈칫했다. 별안간의 궁금증이 한 사람을 향해 저절로 흘러가서.
‘그러면 권채우는…….’
그녀를 가차 없이 버렸던 남자와 그녀를 위해 수모를 당했던 남자는―.
대체 누구인지, 혹은 무엇인지.
종내에는 무엇이 되고자 하는지.
* * *
이연은 오늘도 끙끙거리며 푹신한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스스로 프라이팬을 잡아 봐도, 유명하다는 레시피를 따라 해 봐도 그녀가 기억하는 그 맛은 나지 않았다. 솜씨가 좋다는 이모를 찾아가 따로 부탁까지 해 봤으나 역시 찾던 맛은 아니었다.
그런 실패가 쌓여갈수록 이상하게 우울해졌다. 의식적으로 끼니를 거르지 않으니 배는 차는데 마음은 더 공허해졌다.
이연이 한숨을 삼키며 침대 반대편으로 몸을 돌린 순간이었다.
“꺅……!”
커다란 창문 앞에 그림자처럼 서 있는 한 인영.
“하아……, 씨이…….”
이연이 심장을 부여잡고 그를 노려보았다.
“여기는 어떻게 들어왔어요?”
밤바람에 펄럭이는 커튼 앞에 권채우가 그늘처럼 서 있었다. 안 그래도 불을 꺼서 어두운데 그는 밤을 꿰어 입은 것 같았다.
목까지 올라붙은 탄소섬유 상의에 새까만 군복 바지와 군화. 담갈색의 옅은 홍채만 아니었다면 기둥이라고 착각했을 것이다.
남자는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던 복면을 대수롭지 않게 끌어내렸다. 그러자 비릿한 피 냄새가 훅 끼쳤다.
“……다쳤어요?”
“내 피는 아니에요.”
권채우를 내버려 두고 온 이후, 처음 마주하는 얼굴이었다. 붉게 부풀어 올랐던 뺨에는 푸릇한 멍이 자리했고, 입술엔 딱지가 앉았다.
이연은 저도 모르게 물었다.
“같이 자자고요? 그래서 또 납치하려고요?”
“아니요.”
그런데 권채우가 아니라고 말한다.
동시에 이연은 당사자만 알아차릴 수 있는 허기를 느끼고는 이불 속으로 배를 매만졌다. 방울처럼 터지기만 하는 소리가 안으로 곱아들었다.
문득 권채우의 고개가 묘하게 기울어졌다.
“대체 그 배에는 뭐가 들어있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