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하지만 이연은 저게 아군인지 적군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특히나 분노를 담은 눈동자가 그녀의 위치를 정확히 짚어냈을 때, 심장이 곤두박질치는 기분은 외려 낭패에 가까웠다. 조급해 보이는 걸음걸이로 그가 성큼성큼 다가올수록 입은 점차 말라 갔다.
권채우와 재회했던 첫날, 달리는 차를 막아 세웠던 바로 그 눈빛이었다.
그래, 그는 또다시 저를 잡으러 온 거다. 그렇게 결론을 내린 이연은 나무 기둥을 세게 껴안고 달달 떨었다.
관자놀이까지 쿵쿵 울리는 박동을 견디고 있는데 돌연 시야에서 그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남자는 어둠 속으로 스며든 듯 감쪽같이 사라졌고, 이연은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나뭇잎이 파스스 떨리고 묵직한 진동이 느껴진 건 그때였다.
“……!”
묘한 압박감에 뒤를 돌아보니 권채우가 그 어떤 예고도, 언질도 없이 사나운 기세로 나무를 오르고 있었다.
“헉……!”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그가 확확 가까워졌다.
발을 몇 번 움직이지도 않은 것 같은데 그는 파쿠르 훈련이라도 하듯 중력을 거스르며 올라왔다. 표범 못지않은 근력과 민첩성은 다시 봐도 놀라울 지경이었다.
이연은 차마 비명을 내지르지도 못하고 입술 점막을 이로 잘근거렸다. 또다시 도망치고 싶다는 충동이 그녀를 부채질했지만 이번엔 마땅히 갈 곳도 없었다.
마침내 권채우는 갈고리처럼 툭 불거진 뼈마디로 이연의 팔을 강하게 붙잡었다.
그녀가 본능적으로 입을 벌린 순간, 그가 나지막하게 뇌까렸다.
“한 마디도, 하지 마.”
“그……”
“지껄이지 말랬어.”
불길을 견디고 있는 그의 흰자위는 폭발 직전처럼 붉게 갈라져 있었다. 이연은 그의 이마를 뚫고 올라온 힘줄을 바라보다 콧대까지 시선을 미끄러뜨렸다. 흉흉한 눈빛에 숨이 다 막혀왔다.
“이리 와서 조용히 내 허리에 다리 감아요.”
“……네?”
“감으라고.”
“……왜요? 나 데려가서 어떻, 어떻게 하려고요?”
경계성이 짙은 목소리에도 권채우는 그녀의 옆구리에 불쑥 손부터 집어넣었다.
“이거 놔요……! 이―”
속수무책으로 끌려간 이연이 그의 품에 안착한 순간이었다. 중심을 잡기 위해 짚은 그의 목덜미가 왜인지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권채우는 이연의 목에 얼굴을 파묻고 안도인지 통증인지 모를 숨을 내쉬었다. 그게 몹시도 무겁고 길어 반항하려던 몸이 동상처럼 굳었다. 그녀가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나, 나한테 손끝 하나만이라도 대면…―!”
“내가 다 잘라요.”
“네?”
“이연 씨 옷깃에 스치는 손가락들, 전부 당사자들 입에 쑤셔 넣을 거예요.”
이연은 혼란한 낯을 했다. 사람들의 저열한 흥미보다도 권채우 한 사람분의 말이 더 무서워서.
“……아, 아니, 그쪽도 날 잡으러 온 거잖아요.”
그는 동네 주민들에게 이연이 파묻혔을 때에도 보고만 있다 자리를 뜬 사람이었다. 게다가 이런 파티를 주최하는 집안의 도련님이기까지 했으니 객관적으로 그를 믿을 이유는 하등 없었다.
“대체 얼마나 더 나를 비참하게 만들려고 이래요? 신령목을 해치고, 내 심사를 망치고,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다 못해, 내가 다치는 순간에도 못 본 척 지나갔잖아요.”
목덜미에 내려앉던 뜨끈한 숨이 뚝 멎었다.
“그때랑 지금이랑 다를 게 뭔데요?”
속삭이는 목소리가 숨 가쁘게 이어졌다. 이연이 몸을 바르작거리며 돌덩이 같은 어깨를 밀자 무슨 이유에선지 그는 순순히 밀려나 주었다.
“내가 이연 씨를 내다 팔기라도 할 것 같아요?”
“아니에요?”
극명히 다른 온도로 두 사람의 눈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그쪽은 내 편 아니에요. 아니잖아요.”
“…….”
“내가 미우니까, 또 그때처럼 사람들한테 당하면서 우는 꼴이나 구경하겠죠.”
반질반질한 그녀의 동공이 묘했다. 확연히 느껴지는 불신에 권채우의 낯도 서서히 굳어졌다.
“……그래, 백치 새끼면 몰라도 나는 네 편이 아니었지.”
애초에 기대 따윈 하지 않았으나 싸늘한 그의 시선에는 어쩔 도리 없이 심장이 쿵 떨어졌다.
“그래도 이리 와요.”
“……!”
“이연 씨 옷 대신, 그 새끼들 가죽 먼저 벗기기 전에 내 쪽으로 와요.”
“……싫어요.”
이연이 질색하듯 얼굴을 구기며 고개를 돌렸다.
“지금 상황 파악이 안 돼요?”
“잘 되고 있어요. 그 어느 때보다 신경이 예민하게 잘 섰다고요. 그러니까 그쪽이나 내려가요. 나는 당신도 못 믿겠고, 눈에 띄는 것도 싫어요. 나는 여기가, 나무 옆이 제일 안전해요. 나무는 적어도 날 배신하지 않으니까.”
이연은 꺼칠꺼칠한 나무 껍데기에 숫제 한쪽 뺨을 껌처럼 갖다 붙였다.
그러나 권채우는 무작스레 그녀를 끌어당겼다. 몸부림치는 이연을 제 허벅지에 들어앉히고 다리를 벌려 그의 골반을 감싸게 했다. 이연이 아무리 몸을 비틀며 벗어나려 해도 그의 압제를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이내 권채우가 훌쩍 내려갈 듯 자세를 잡자 이연은 급한 마음에 목젖을 콱 물어버렸다.
“윽……!”
남자가 짤막한 신음을 흘렸다. 동시에 거스러미처럼 돋아난 소름이 이연의 입술을 예민하게 스쳤다. 그의 맥박이 펌프처럼 거칠게 뛰고 있었다. 그 즉각적인 반응에 이연은 괜히 허둥대며 입술을 뗐다.
“내, 내 말 잘 들었죠? 괜히 나까지 들키게 하지 말고 혼자 내려가라고요……!”
“내가 경고를 너무 우습게 했나?”
윽박지르고 싶은 것을 누르고 또 누른 것 같은 목소리는 제법 긁혀있었다.
“내가, 여기에 발붙이지도, 불쌍한 꼴도 보이지 말랬잖아.”
마지막 말은 언젠가 사촌오빠에게 따귀를 맞았을 때 그가 빈정거리며 했던 말이었다.
“약속을 어겼으면 적어도 고집은 부리지 말아야지. 저 새끼들한테 잡히는 건 무섭고, 날 밀어내는 건 안 무서워?”
“…….”
“이연아, 저것들은 막돼먹긴 했어도 그럭저럭 사람이지만, 나는 애초에 개새끼로 컸다고 했잖아.”
그는 이연을 조롱하며 화이도를 떠났을 때보다도 훨씬 더 험상궂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조금 얼떨떨한 기분으로 광포해진 남자의 낯을 바라보았다.
“……왜 그쪽이 화를 내요? 화가 나도 내가 나고, 무서워도 내가 무서운 거지, 그쪽이 무슨 상관이라고…….”
“글쎄, 나도 그게 내내 의문이었는데 말이야.”
그가 이연의 엉덩이를 재차 끌어당겨 하반신을 빈틈없이 맞추었다. 이연은 다리 사이로 들어오는 그의 묵직한 크기에 흠칫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그가 이연을 한 차례 추어올리는 바람에 성기가 뭉근하게 비벼지고 노골적인 온도가 그녀에게 옮겨붙었다.
곧장 거부감이 들었지만 동시에 어딘가가 화끈거리기도 했다. 권채우 또한 마찬가지였는지 그의 얼굴이 분노로, 혹은 이름 붙일 수 없는 어떤 욕정으로 번들거렸다.
“왜 이렇게 너만 보면 누구든 잡아다 죽이고 싶을까.”
“……!”
그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고백, 아니 위협이었다.
“이연 씨는 내가 착하고 다정한 사람이 되기를 예전부터 바라왔겠지만, 웃기게도 그걸 매번 망친 게 너야. 나는 네 발꿈치만 봐도 난폭한 생각들로 머리가 지끈거리고, 사지 멀쩡한 남자들은 죄다 구덩이에 처박고 싶어지는데. 왜 화를 내냐고?”
권채우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스쳤다.
“네가, 내가 아닌 이유로 함부로 얻어맞고 다니니까.”
다리 감으라고 했잖아요, 그가 쯧 혀를 차며 덧붙였다. 이연이 얼어붙어 눈만 깜빡이는 사이, 권채우가 그녀의 엉덩이를 받쳐 안았을 때였다.
―막혔습니다.
초소형 인이어에서 사냥개 한 마리가 단조롭게 보고를 해 왔다. 그가 멈칫하며 수신기 어딘가를 달칵 눌렀다.
“별장은.”
―아직입니다.
“시간.”
―최소 삼십 분입니다.
권채우가 신경질적으로 눈가를 찌푸렸다.
별장 안에서는 248g 가량의 필로폰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1회 투약량이 0.03g 정도인 걸 감안해 본다면 약 8천 명 이상이 동시에 투약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그건 권기석의 개인적인 재산이자 거래였고, 권채우는 그 현장을 증거로 남기기 위해 사냥개들을 싹 다 벗겨 투입시킨 상태였다.
하여 이 말 같지도 않은 술래잡기는 그들에게 시간을 벌어다 줄 최적의 수단이었으나 하필이면 소이연이 나타난 것이다.
권채우는 어안이 벙벙해 보이는 그녀를 가만히 응시하다 입을 열었다.
“이십 분. 그 안에 장면 따고 나와.”
한 사람의 고유한 음색이 순식간에 빠지고 그 자리를 대신하는 낯선 탁음. 이연은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듯한 그 모습을 생경하게 관찰했다.
그때 이연의 가냘픈 턱을 한 손에 틀어 쥔 남자가 통보하듯 말했다.
“알아들었으면, 딱 이십 분.”
“…….”
“이십 분만 나랑 같이 버텨요.”
“……갑자기 무슨―”
별안간 그가 넥타이를 단번에 풀어 헤치며 말허리를 잘랐다. 목 끝까지 잠가두었던 와이셔츠를 성급하게 잡아 뜯느라 개중 단추 하나가 튀어 올랐다. 이연은 조마조마한 얼굴로 나무 아래를 내려다보았고, 다행히 서성거리는 사람은 없었다. 탈의를 마친 남자는 이연에게 와이셔츠를 입혀 주었다.
“신발도 벗어요. 누군가 알아볼 거예요.”
하지만 정작 돋보이는 사람은 권채우 본인이었다. 기다랗고 굵은 빗장뼈에 쫀득하게 붙어있는 어깨 근육, 탄탄하게 잘 빠진 허리, 울퉁불퉁한 외복사근. 그녀가 콧잔등을 설핏 구겼다.
“정말로 날 도와주겠다고요? 어떻게요?”
권채우는 여전히 의심을 거두지 않은 이연을 바싹 끌어안으며 훌쩍 나무 아래로 내려갔다.
능숙하게 나뭇가지를 잡고 추락하듯 가볍게 몸을 떨구는 모습에 이연은 반사적으로 맨몸을 꽉 붙잡았다.
“여기서 할 게 떡치는 거 말고 더 있어요?”
“뭐……!”
“원래 나무는 숲에 숨기는 법이잖아요.”
땅바닥에 발을 디딘 권채우는 여전히 피가 흐르는 이연의 손가락 두 개를 제 입속으로 가져가 볼이 홀쭉해질 정도로 강하게 빨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