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다시 오게 된 자정의 별장은 낮과 천양지차였다.
이연은 조명을 달아 더욱 신비로워진 동백 숲을 지나며 왕진 가방을 꼭 끌어안았다. 나뭇잎 사이사이로 불야성 같은 별장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나체의 남성들이, 나체의 여성들이, 가면을 쓰고 아무렇지 않게 서빙을 하고, 또 한쪽에서는 이미 여러 명이 붙어있었다. 입구를 빠져나온 이연은 서로 뒤엉켜있는 남녀 한 쌍에 발이 걸려 넘어질 뻔했다.
“……!”
그녀는 화들짝 놀라 시선을 돌렸지만 어느 쪽이든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굳이 알아보려 하지 않아도 뉴스에서, 혹은 영화에서 자주 보았던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특히나 국회에서 폭력을 행사하여 유명해진 두 국회의원이 웃으며 술잔을 나누고 있는 모습은 기가 막힐 정도였다. 두 사람은 와이셔츠를 전부 풀어헤친 채 불뚝 나온 배를 출렁이며 맨발로 돌아다녔다.
이연은 여기저기서 왁자지껄 웃어대는 소리에 이상하게 목이 움츠러드는 것 같았다. 이곳은 아무도 찾지 못하는 깊숙한 동굴이었고, 짐승들이 마음껏 추태를 벌이는 교미의 밤이었다.
그녀는 안내를 맡은 경호원만 묵묵히 따라갔다. 속에서 치미는 희미한 거부감에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도착한 곳에는 나뭇가지가 흉하게 뚝뚝 부러져있었다. 그런 게 한두 개가 아니었다.
“거슬린다고 치워달라는 컴플레인이 들어왔었습니다.”
입구에서부터 안내를 맡은 경호원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골절상이네요.”
이연이 찢어진 부위를 살피며 미간에 주름을 만들었다.
“대체 왜 이렇게 부러진 거예요? 이해가 안 가네…….”
“너무 힘을 준 채로 매달려있던 것 같습니다.”
“저쪽만 가도 술이 넘쳐나는데, 어린애도 아니고 나뭇가지를 붙잡고 놀았다고요?”
이연은 떨어져 있는 나뭇가지를 주워들며 짐짓 투덜거렸다.
“높지 않아서 딱 좋으니까요, 다리 풀릴 때 잡고 버티기 좋았던 것 같습니다.”
“네?”
“못 알아들으셨음 됐습니다.”
“…….”
눈을 끔뻑거린 이연은 잠시 이 파티의 실체를 떠올리곤 얼굴을 붉혔다.
그러니까, 누군가는 나뭇가지를 잡고 버티고, 그러면 그 아래에는……. 에비, 에비!
이연은 허둥지둥 왕진 가방을 펼쳐 찢어진 가지에 쇠조임을 하기 시작했다.
잠시 뒤 경호원은 다른 무전을 받더니 그녀에게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떴다. 이연은 그가 가고도 한참을 작업에 매달렸다.
“휴우…….”
미안하다, 내가 널 괜히 데려와서. 여기서 안 해도 될 고생이 많아…….
이연은 마음을 담아 나무줄기를 한번 쓰다듬고 늘여놓았던 도구를 정리했다.
그때, 뭉친 어깨를 주무르며 이리저리 목을 꺾던 이연의 시선에 한 무리가 걸려들었다.
전부 멀끔하게 생긴 남녀 무리였는데 그곳에 권채우가 앉아있었다. 다른 쪽과 비교를 해보아도 확연히 젊고, 더 나아가 어리다는 인상까지 주는 집단이었다.
이연은 저도 모르게 권채우의 나이를 셈해 보았다. 스물여덟이랬지. 그가 아직 이십대라는 게 이 순간 실감이 났다. 그것도 모르고 먹지도 않은 나이를 네 살이나 더 얹어줬었다니. 이연은 괜스레 눈썹 끝을 긁적였다.
서로에게 몸을 부대끼며 술잔이 돌아가고 담배 연기와 웃음이 끊이질 않는 자리.
그곳에 섞여 들어간 권채우는 자연스러우면서도 홀로 돋보였다. 뚜껑이 있는 은빛 라이터를 달칵달칵, 열었다 닫으며 한쪽 귀를 막고 있는 게 어지간히도 예민해 보였다. 그는 이 난잡한 분위기 속에서도 단추를 목 끝까지 채운 유일한 사람이었다.
마침 짓궂은 표정을 한 여자가 웬 남자를 깔고 앉아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었다. 사람들은 휘파람을 불며 마치 스포츠 경기를 관전하듯 낄낄거렸다.
여자는 남자에게 애무를 해 주면서도, 소파에 앉아있는 다른 남자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아주 이상한 분위기였다. 보고 보여주기를 거리끼지 않는 만찬의 장소는 섹스를 대단치 않게 여긴다는 방증 같아서.
생명을 나무처럼 품은 이연과 나뭇가지를 부러뜨리며 노는 저들에게는 타협할 수 없는 깊은 격차가 있었다.
도련님 권채우. 그건 이연이 알지 못하는 그의 진짜 모습이었다.
이브닝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권채우의 옆자리에 앉아 무어라 입술을 움직인다. 목적 없이 떠다니기만 했던 그의 시선도 그녀에게 천천히 돌아갔다. 그 생면부지의 낯선 얼굴을 보고 있자니 이상하게 입 안이 썼다.
권채우의 삶을 목격할수록 그녀가 파묻었던 그의 조각은 더없이 초라해졌다.
“하읏……!”
그러나 이연의 자조는 난데없는 신음소리에 흔적도 없이 쓸려갔다.
뭐, 뭐야?!
고개를 돌리자마자 남근목에 붙어있는……
‘악! 내 눈……!’
한 남자의 축 늘어진 엉덩이가 보였다. 일을 치르고 있는 한 쌍을 목도한 순간, 이연은 자세를 확 낮추었다. 그 바람에 미처 집어넣지 못한 전정가위에 손끝이 베였다. 그녀는 피가 나기 시작한 손을 말아 쥐고 가방을 빠르게 정리했다.
그런데 저게 엉덩이가 맞아?
이연이 아는 엉덩이라곤 돌처럼 딴딴하게 올라붙었던 권채우의 볼기밖에 없어서. 이상하게 자꾸만 비교가 됐다. 농밀한 신음소리가 밤바람을 타고 끊임없이 흩날렸다.
“찾았다.”
그 순간 낯선 음성이 기둥처럼 꽂혀 들었다.
“여기 있었어요? 아아―. 한참 찾았네.”
“……!”
몸을 한껏 낮추고 있던 이연의 옆으로 웬 남자가 허리를 숙여왔다. 실눈에 웃는 상인 남자가 기쁘다는 듯 입을 활짝 벌리고 있었다. 술 냄새가 훅 끼쳤다.
“그쪽이 이 정원 만든 사람이죠?”
좋지 않은 예감이 등줄기를 타고 내려갔다.
“경호팀 직원한테 팁 좀 꽂아줬거든요.”
“…….”
“재밌는 정원사님이 누군지 다들 보고 싶어 해요. 미친놈들이 여기 들어오자마자 아주 배 잡고 웃어대느라 난리였어요. 사람 몸에 음식도 올려놓고 먹는 새끼들이 제법 순수한 데가 있다니까요?”
얽히면 무조건 피곤해지겠다는 생각에 급히 왕진 가방을 들고 일어설 때였다. 덩달아 허리를 편 남자가 이연의 손을 낚아채 끌고 가기 시작했다.
“저기요, 이거 놓으세요……!”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는 남자의 발걸음이 경쾌했다. 손을 비틀어 빼보려 했지만 비실비실하게 생겨서는 힘이 퍽도 셌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일은 아니었다. 술 냄새를 맡았던 순간 어차피 말로는 통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딱딱한 왕진 가방으로 그의 등을 퍽퍽 쳤다.
“놓으라고!”
“윽……!”
발길질까지 곁들여 그의 종아리를 사정없이 찼다. 그러나 남자의 얼굴에 돌연 짙은 미소가 그려졌다.
“어떡하죠, 오늘 진짜 재미있을 것 같은데.”
“뭐라고요?”
“역시 올해 가면은 정원사님이 하면 잘 어울릴 것 같아요.”
그가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이며 들고 있던 가면을 대뜸 이연에게 씌웠다.
순식간에 시야가 좁아지고 숨이 갑갑해졌다. 가장 혼잡스러운 정원의 중앙까지 어느새 한 걸음이었다.
그녀는 하는 수없이 왕진가방을 손에서 떨어뜨린 뒤 가면을 벗으려 했다.
“주목, 주목!”
사람들의 시선이 이연에게, 아니 가면 위로 단숨에 박혀 들었다.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저를 낱낱이 해체하듯 훑는 시선.
가면을 벗으려던 이연의 손이 멈칫했다. 시끌벅적했던 소리가 확 잦아드는 변화에 피부 위로 소름이 돋았다.
정말로, 정말로 예감이 좋지 않았다. 이곳에 발을 들인 이후 처음으로 밤바람이 차게 느껴졌다. 얼굴을 드러내기가 무서워 입술을 꽉 깨물 때였다. 가면에 뚫린 구멍으로 권채우가 보였다.
“…….”
“…….”
손가락으로 관자놀이와 턱을 괴고 있었던 남자가 별안간 미간을 찌푸리는 게 시작이었다.
그는 풀려 있던 자세를 조금씩 바로 세우고, 기울어져 있던 고개도 팽팽하게 되돌렸다. 시큰둥했던 얼굴이 걷잡을 수 없이 싸늘해지더니 웬 선명한 웃음이 자국처럼 달라붙었다.
그 점진적인 변화가 개미집만 한 눈구멍으로도 훤히 보였다.
‘……설마, 작업복을 알아봤나?’
이내 권채우도 다른 사람들처럼 이연의 몸을 훑어 내려갔다.
다른 점이 있다면, 누군가에게 단단히 붙잡힌 이연의 손, 피가 흐르는 검지와 중지, 그리고 덜덜 떨리는 다리에 시선을 오래 두었다.
턱관절에 힘줄이 불거진 것도 잠시, 권채우는 들고 있던 술잔에 침을 뱉었다.
그러나 타액이 아닌 웬 핏물이 길게 떨어졌다. 대체 어디를 어떻게 깨물었는지 슬쩍 보인 그의 혀끝이 불길할 정도로 새빨갰다.
“제가 작년 우승자여서 고를 수 있었어요.”
이연은 여전히 웃는 상을 한 남자의 말에 가까스로 고개를 돌렸다.
“대체 아까부터 무슨 소리를…….”
“도망쳐요.”
“네?”
“술래잡기 같은 거예요.”
“무, 무슨―”
“그렇다고 겁먹지는 말고요. 쪽팔리게 겁탈 같은 거 안 해요. 여기 무서운 사모님들도 많고, 여자 친구들도 많고.”
“…….”
“그냥 벗기는 게임이에요. 옷이 하나도 안 남을 때까지, 벗기고 또 벗기는 거.”
“……!”
이연의 어깨가 흠칫 굳었다. 눈앞이 새하얘지는 것 같았다.
“그냥 그게 단데?”
상대의 경쾌한 음성보다도 폭발하듯 뛰어대는 심장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숨이 거칠게 들썩거렸다.
“불이 켜질 때까지 옷이 한 자락이라도 남아 있으면 정원사님이 이기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에 베팅한 돈, 싹 다 가져갈 수 있―”
느닷없이 술잔이 날아온 건 그때였다.
“……!”
퍽―! 소리가 먼전지 쨍그랑 소리가 먼전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남자의 이마를 정확하게 가격한 유리잔은 산산조각이 났고, 내내 웃는 상이었던 얼굴에서 처음으로 미소가 걷혔다. 찢어진 이마에서부터 콧등까지 피가 주욱 흘러내렸다.
그렇게 손이 풀린 찰나, 이연은 권채우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마지막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기 시작했다.
공포에 짓눌린 다리가 머리보다 먼저 움직였다. 총 육십여 개의 별장 창문이 일제히 소등되고, 대낮 같았던 정원에도 모든 조명이 꺼졌다. 거의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애기야, 멀미 나도 조금만 참아줘, 정말 미안해……!’
가면을 벗자마자 시야가 깜깜해져 당황했지만 그녀는 이 정원을 속속들이 꿰고 있는 사람이었다.
저 많은 사람들을 뚫고 정원을 빠져나가리란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숨는다 하더라도 아마 멀리까지 뛰진 못할 것이다.
그 대신 이연은 지척에 있는 가장 높은 나무를 떠올렸다. 그녀는 침착하게 방향을 틀어 나무 뒤편으로 은밀히 돌아갔다.
발자국 소리가 들리면 입을 막고 기둥에 달라붙어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심장은 터질 듯이 뛰고 폐부가 따끔거렸다. 머리가 뒤죽박죽 어지러워 현기증이 치솟았다.
이연은 벌벌 떨리는 손을 꽉 붙들고 기둥에 발을 붙였다. 어둡고 급한 마음에 발이 자꾸만 미끄러졌지만, 사람들이 쫓아오는 소리를 들으며 이를 악물었다. 손바닥이 벗겨지듯 쓸려나갔지만 아픔을 느낄 새도 없었다.
“하…… 하아…….”
끝끝내 나무에 오른 이연은 몸을 옹송그리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누군가는 뛰었고 누군가는 어슬렁거렸다. 그곳엔 남자도 있었고 여자도 있었다. 젊은 사람도 있었고 늙은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모두가 꽃밭을 헤치거나 땅바닥을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딱 한 사람만이―.
모두가 아래를 들추고 있을 때, 하늘을 올려다보는 사람이 있었다.
“……!”
“…….”
그녀가 나무를 잘 탄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는 한 사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