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대체 언제 잠이 들었지?
그것도 그렇게나 경계했던 권채우의 방에서 태평하게 퍼질러 자다니. 권 가(家)에 들어온 이후 내심 밤잠을 설치던 그녀가 어제는 한 번도 깨지 않고 푹 자버린 것이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햇살처럼 내리꽂히던 건 다름 아닌 권채우의 옅은 홍채였다.
커튼 사이로 비춰 들어오는 아침 햇살, 상쾌한 공기, 따뜻한 이불 속, 그리고 너무나도 익숙한 무게. 그렇게 이연은 순식간에 화이도의 작은 집으로 돌아갔다.
채우 씨, 나 진짜 이상한 꿈을 꿨어요. 비몽사몽간에 손을 뻗었던 것도 같다.
권채우를 보며 배시시 웃고 말자 물끄러미 그녀를 쳐다보고 있던 얼굴이 별안간 확 굳었다.
그 사소한 변화에 이연은 찬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만약 그가 진짜 남편이었다면, 놀라서 굳는 대신 부드러운 입술이 내려앉았을 테니까.
결국 이연은 방에서 도망쳤고, 권채우는 붙잡지 않았다. 어젯밤과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그녀는 창백해진 얼굴을 연신 쓸어내리며 이 모든 일을 들쭉날쭉한 제 호르몬 탓으로 돌렸다.
“―님, 원장님! 도착했습니다!”
그렇게 낭패스러운 아침을 곱씹고 있는데 웬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정원 관리팀의 직원이었다.
때마침 검은색 세단에서 권기석이 내리고, 굉음과 함께 나타난 바이크에선 권채우가 내렸다.
그는 편편한 어깨에 딱 들어맞는 가죽 재킷을 걸치고 젖은 머리를 가볍게 털며 걸어왔다.
이연은 밝은 곳에서 그를 보는 게 불편했지만 최대한 허리를 폈다. 오늘은 완성된 정원을 처음으로 공개하는 아주 중요한 날이었으므로.
권기석에게 짧게 묵례한 이연은 속으로 기합을 넣으며 그들을 이끌었다.
“동백꽃의 꽃말은 비밀스러운 사랑입니다.”
붉은 동백나무가 입구에서부터 길을 안내하듯 일렬로 심어져 있었다. 나무 아래에 붉은 꽃잎을 일부러 떨어뜨려 놓았더니 화려함이 배가 되었다. 이 길목은 향락으로 이어지는 시작점이었다.
그렇게 작은 동백 숲을 빠져나오자 드넓은 정원이 나타났다.
권기석은 곧장 주변부터 둘러보았고, 권채우는 처음부터 한 사람에게 꽂혀있었다. 그녀는 얼굴 한쪽이 간지러웠지만 애써 그 느낌을 무시한 채 고용주의 반응에만 집중했다.
주위를 슥 돌아본 권기석의 입가에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가 걸렸다.
“느낌이 오묘하네요. 아주 노골적이고.”
“저건 남……근을 닮은 바위입니다.”
“예, 그래 보입니다.”
딱히 대답을 원한 건 아니었는데, 묵묵히 돌아온 대답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저건 여수 오동도에서 공수해 온 남근목이고요. 보시다시피 쏙…… 빼닮았습니다.”
턱을 문지르고 있던 권기석의 눈빛에 흥미가 섞이기 시작했다.
“섬에서 자라는 후박나무인데 깨끗한 수피가 특징이어서 가끔씩 이런 모양이 나오곤 합니다. 큼……, 제가 열심히 찾아냈습니다.”
이연은 틈틈이 자기 어필도 잊지 않았다.
남근목이라는 별명이 붙은 저 후박나무는 남성의 두 다리와 성기를 닮았다. 거대한 아름드리나무였기 때문에 이 정원에서 가장 먼저 시선이 갔다.
“저쪽에는 남녀 포옹형 나무와 성행위를 본뜬 상록수도 있습니다.”
“소이연 씨, 어디 아픕니까?”
“네?”
“아니, 목덜미가 너무 빨갛길래.”
“……!”
“설명하다 쓰러지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
권기석이 이연을 지나치며 나직이 읊조렸다. 이연은 괜스레 귀밑을 긁적였고, 권채우는 그녀의 쇄골 어딘가를 벅벅 벗겨내고 싶다는 듯 사납게 노려보았다.
그 무형의 기세에 이연은 움찔했지만, 절대로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저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쉬지 않고 설명을 이어갈 뿐이었다.
“이건 등나무입니다. 꽃말은 환영이고요.”
이연은 포도처럼 아래로 열린 등나무 꽃을 커튼처럼 열고 지나갔다.
“그리고 이건 소음 차단에 좋다는 사각대왕참나무입니다. 이걸 가림막 형태로 고정해서 공간을 나누어봤습니다.”
그녀의 말 어디가 웃겼는지 권기석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소이연 씨, 아주 본격적이었네요.”
“네?”
“아닙니다, 계속하세요.”
“……이건 밤꽃나무입니다.”
이제 그들은 새하얀 머리털 같은 밤꽃나무 앞에 섰다.
“예, 안 그래도 어디서 좆물 냄새가 진동을 하나 했더니.”
“……!”
이연은 그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본새에 흠칫 놀랐다. 그녀는 이게 클라이언트의 첫 번째 불만인가 싶어 지레 변명을 해 보았다.
“어……. 그렇게까지 심하진 않은데요…….”
권기석이 고개를 기울이며 그녀를 응시했다.
“그렇게까지 맡아봤습니까?”
“네?”
“잘 아는 것처럼 말씀하시기에.”
“아니, 저는…….”
“기준이 모호해서 묻는 겁니다.”
당황한 이연이 저도 모르게 권채우를 힐끗 쳐다보았다. 권채우는 뒷머리에 깍지를 낀 채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는 권기석과 달리 이 자리가 못내 짜증스러워 보였다.
“……일단은 계산해서 과하지 않게 심었어요. 이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해서요.”
“그건 믿을만한 기준입니까?”
말문이 막혔다. 기준? 기준이라 한다면…….
그녀의 시선이 또 한 번 제멋대로 움직였다. 권채우와 눈이 마주치자 그의 눈썹 끝이 느릿하게 휘어 올라갔다. 이연은 후다닥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 개인적인 사감에 따라 정한 건데, 만약 시정하라 하시면―”
“형, 왜 애먼 나무의사를 잡아.”
그때 심드렁한 권채우의 목소리가 그녀를 감싸듯 울렸다.
“이연 씨 기준은 좆도 어린 쪽이라, 저렇게 삭은 건 냄새 축에도 못 껴.”
“……!”
이연은 입이 벌어지려는 것을 간신히 턱에 힘을 주어 참아냈다.
“형도 삭아서 모르겠지.”
차마 끼어들 수 없는 정적이 흘렀다. 이연은 동그란 눈을 빠르게 깜빡이다 허둥지둥 자리를 옮겼다. 뒤늦게야 이마까지 열이 올랐다.
그럼에도 그녀는 아무것도 못 들었다는 듯 뻔뻔스레 다른 구역을 가리켰다. 쉬지 않고 움직이며 꽃 하나하나에 멈춰 섰다.
“금어초의 꽃말은 욕망입니다. 좁은잎배풍등은 ‘참을 수 없어’이고……”
그 외에도 침묵의 라벤더, 욕망의 글록시니아를 소개했다. 겹겹이 쌓인 꽃잎은 풍성했고, 은은한 빛깔 덕분에 분위기는 한층 더 진해졌다. 그녀가 고른 꽃들은 하나같이 전부 야살스러웠다.
“꽃 모양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뜬 권기석이 허리를 숙였다. 권채우는 제 형을 타박하듯 혀를 찼다.
“꽃도 엄연한 생식기야.”
앞장서 걸어가던 이연이 멈칫, 발을 멈추었다.
‘이연 씨, 꽃은 식물의 생식기라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난 다른 꽃은 필요 없겠어요.’
그날의 권채우는 이연을 끌어당겨 제 얼굴에 들어 앉혔다. 음부를 삼키고 구멍에 혀끝을 꾸역꾸역 밀어 넣으며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강한 손아귀에 의해 살이 터질 듯 뭉개지고, 무언가가 끝도 없이 흘러나왔다. 불현듯 그때의 감각이 생생하게 밀려닥쳤다.
‘왜, 왜 이래…….’
기억 속의 권채우는 바지와 속옷을 단번에 끌어내린 채 백탁액을 흘리고 있는 검붉은 성기를 꺼냈다. 이연의 다리를 잡아 벌려 살덩이를 쓸고, 성기 끄트머리를 갖다 대었다.
“……!”
이연은 고개를 휘휘 내저으며 두 뺨을 가볍게 쳤다. 귀 끝까지 화르륵 불이 붙었다.
“이건 산, 산꽈리라고 불리는데 꽃잎 사이로 좆밥이, 아니 꽃밥이 공격적으로 튀어나와 있는 것이―”
그녀는 저가 뭐라고 지껄이는지도 모른 채 삐걱삐걱 걸어 나갔다. 얼른 이 시간이 끝나기만을 바랐다.
“마지막으로 이건 꽃양귀비입니다.”
이연은 그들의 눈치를 보며 혼잣말처럼 덧붙였다.
“일반 양귀비와 달리 마약 성분이 없는 꽃입니다. 그치만 마약 성분이 있는 양귀비는……, 어떤 목적으로든 재배하면 안 됩니다. 위반하면 5년 이하의 징역이나 5천만 원 이하의 벌금을 받을 수가 있어요…….”
그 말의 어디가 우스웠는지 픽, 하는 소리가 났다. 법도 안 지키는, 아니, 오히려 법을 제멋대로 주무르는 사람들 앞에서 바보 같은 소리를 했다는 생각이 찰나에 스쳤다.
그럼에도 이연은 평범한 삶의 감각을 잊고 싶지 않았다. 여기에 오래 있다간 그것마저 희미해질 것 같았으니까.
“사람이 생각보다……”
권기석이 묘한 표정으로 이연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말을 멈추더니, 다시 입술을 뗐다.
“소이연 씨, 오늘 파티에 참석하시겠습니까?”
“……네?”
“맛있는 요리를 먹으면 셰프가 궁금한 법이지 않습니까. 다들 갤러리나 전시회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이니 어쩌면 직접 설명을 듣고 싶어 할지도 모릅니다.”
“어…….”
갑작스러운 제안에 이연이 대답하지 못하는 사이, 권채우가 제 형의 꽉 어깨를 눌렀다.
“고상 떨지 마. 흘레붙으러 오는 새끼들이 갤러리는 무슨.”
아울러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경고장처럼 날아와 박혔다.
“여기에 발붙일 생각은 추호도 하지도 말아요.”
순간 이연은 ‘그러는 너는?’하고 대거리하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그날 밤, 초청객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 * *
“이거 드세요!”
관리팀의 막내가 두 손 가득 치킨을 들고 오자 당직을 서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의자에 앉아 하릴없이 멍을 때리고 있던 그녀도 어느샌가 다리를 움직이고 있었다. 이연은 하품을 하면서도 코를 자극하는 고소한 기름 냄새에 착실히 나무젓가락을 뜯었다.
왁자지껄한 사람들 틈에 끼어 있는 듯 없는 듯 치킨을 먹는데 씹을수록 뭔가가 부족했다. 다행히도 입덧은 그녀의 얘기가 아닌지 속은 더없이 편안했지만 이상하게 성에 차지 않았다.
‘이게 아닌데……, 이거 말고 나는……!’
희미했던 생각을 잡아챈 순간 무작스레 군침이 돌았다.
이연이 먹고 싶은 건 그저 집밥이었다.
따끈한 쌀밥에 평범했던 밑반찬.
그러나 문제는 뭇 임산부들이 친정엄마의 손맛을 그리워하듯 그녀는 죽은 제 남편의 요리가 먹고 싶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한 일이어서, 이연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녀는 기계적으로 치킨을 씹으며 한편으로는 작은 식탁을 한가득 메웠던 아침상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때 관리팀의 무전기가 지지직 울렸다.
“원장님, 소이연 원장님―!”
“네?”
입에 양념을 묻힌 직원이 받아보라는 듯 팔을 쭉 뻗었다.
“경호팀 연락인데 정원 좀 치워달라고 하는데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나무 하나가 상했다고 복구 좀 해달라고…….”
이연이 씹고 있던 음식을 급하게 삼키며 무전기를 건네받았다.
“소이연입니다. 나무 상태가 정확히 어떻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