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입간판처럼 들린 이연이 이윽고 방으로 들어서자 철컥, 하고 바깥에서 잠그는 소리가 났다.
그제야 권채우는 딱딱하게 굳은 그녀를 땅바닥에 내려놓아 주었다.
“놀랐어요?”
“이, 이게 뭐하는 짓이에요.”
세차게 뛰는 심장만큼이나 목소리가 떨렸다. 제 몸을 나무줄기처럼 꽁꽁 얽어매고 있는 두 팔이 지나치게 선명하다. 이연이 버둥거리듯 상체를 비틀어봤으나 그는 꿈쩍도 안 했다. 오히려 납작한 배를 부둥켜안은 자세 때문에 권채우의 체온이 그대로 쏟아졌다.
“이것 좀 놔요……! 저 나갈 거예요!”
“곧 죽어도 내 이름 안 부르는 건 고집이에요?”
“비키라고 했어요.”
사위는 어두컴컴했고, 그에게 꽉 눌려있던 입가는 욱신거렸다.
“나랑 하룻밤만 자 주면요.”
“싫어요.”
“이연 씨. 나는 통보한 거지, 허락 받겠다고 물어본 게 아니에요.”
이연을 다시 들어 올린 남자는 널찍한 거실을 가로질러 호텔 침대처럼 새하얀 시트 위에 그녀를 앉혀놓았다.
이연은 오뚝이처럼 벌떡 일어나려 했으나 그녀의 몸을 뒤덮어오는 권채우 때문에 꼼짝없이 갇힌 신세가 되었다.
퇴로를 막듯 기둥처럼 꽂혀드는 두 팔과 그녀의 무릎 사이를 파고드는 허벅지는 꼭 쇠창살 같았다. 그녀는 팔꿈치로 매트리스를 지탱한 채 상체를 꼿꼿이 세웠다.
“식물처럼 숨만 쉴게요.”
피로에 젖어 눅눅해진 목소리가 떨어졌다. 게다가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말이었다.
“이연 씨가 원한다면 예전 남편처럼 굴게요.”
“……!”
순간, 눈에서 번쩍 불꽃이 튀었다. 그건 이연의 아픈 부분을 정확히 건드리는 지점이어서.
“……멋대로 그딴 연기하지 마요! 원래 생겨먹은 대로, 천성대로 못되게 행동해요. 차라리 그게 낫지, 어디서 내 남편을……. 아주 그러기만 해 봐요!”
이연은 목덜미가 벌겋게 물들 정도로 숨을 씨근덕거렸다. 무섭고 두려운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해 사랑했고, 잃었고, 또 묻기까지 했는데. 그녀가 힘겹게 밀봉했던 것을 그가 수단처럼 꺼내 쓰려는 모습에 꼭지가 확 돌았다.
“연기해 봤자 하나도 안 똑같으니까 허튼짓하지 마요. 원래도 내가 속아준 거였지, 그쪽이 흉내를 잘 내는 게 아니었거든요. 권채우 씨 발끝도 못 따라오면서……!”
“…….”
“같은 거죽을 뒤집어썼다고 사람도 똑같나요?”
형형한 두 눈에 적대감이 가득했다. 마치 제 남편을 잡아먹었다는 원수를 노려보는 듯했다.
권채우는 대뜸 미간을 찌푸리며 “……내 남편.”하고 낯선 글자를 더듬듯 중얼거려보았다. 그는 애틋하게 눈썹을 내렸다가도 금세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조금 전만 해도 느슨히 풀려있던 동공이 바짝 조여드는 게 즉각적이었다.
그는 문득 권 가(家)의 사냥개라는 진짜 모습으로는 한 번도 이연에게 사랑받아본 적 없음을 깨닫는 중이었다. 겉으로만 따져본다면 두 사람은 서로 초면이나 다름없는 관계였다.
그럼에도 권채우라는 호명에 명치끝이 아렸다. 권채우 씨. 그 말이 잇새에 엿처럼 들러붙었다.
저를 지칭한 말도 아니었고, 오히려 전남편을 향한 애정만 확인한 꼴이었지만, 그럼에도 그녀의 혀를 달게 빨고 싶다는 충동이 치밀었다.
그녀의 부름을 받고 곧장 고개를 쳐든 백치의 욕구가, 아니 자신의 욕구가, 펄펄 끓어올랐다.
권채우는 한층 더 낮아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고작 하룻밤이에요.”
“대체 뭘 확인―, 아니, 아니에요. 대충 짐작은 가요.”
그녀가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하지만 사람이 이렇게까지 제멋대로 일 순 없는 거다.
“나 이제 그 일에서 손 뗐어요. 미안하지만 숲속의 공주는 내가 알아서 묻어버렸고요.”
“…….”
“그러니까 그쪽은 내 알 바가 아니라는 소리예요. 정 필요하면 다른 사람으로 구해보든가요.”
“어떻게 하면 나랑 같이 자 줄래요?”
그의 나직한 말에 이연은 코웃음을 쳤다.
“그런 게 가능할 것 같아요?”
“그럼 묶을게요.”
“그래요, 묶― 뭐라고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권채우는 이연의 두 다리를 허벅지로 꽉 조인 후, 운동용 고무 밴드로 침대 헤드와 그녀의 손목을 묶었다.
손길이 얼마나 숙련되고 빨랐는지 이연이 벙 쪄있는 사이, 매듭은 끝이 났다. 한발 늦게 정신을 차린 이연이 펄쩍 뛰었다.
“잠, 잠깐, 지금 제정신이에요?”
“통보라고 했잖아요.”
“너 진짜 염치도 예의도 없는 거 알아요?”
“알아요.”
그의 순순한, 아니 뻔뻔한 대답에 이연은 또다시 열이 뻗쳤다.
“아니요, 모르는 것 같아서 그래요. 진짜 뼛속까지 이기적이에요. 더 이상 쓸모없다는 말로 사람 자존심을 완전히 뭉개놓고 간 게 그쪽이었어요.”
권채우는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틀었다. 쭉 뻗은 목선이 끊어질 듯 팽팽했다.
“그래놓고 다시 확인해 보겠다고 이 야밤에 사람을 납치해요?”
“그때는―”
“그러고도 네가 사람이야?!”
그녀의 호통에 백치는 안절부절못하며 내벽을 벅벅 할퀴었다. 권채우는 당장이라도 모든 죄를 고하고 머리를 조아리자며 득달같이 입질을 해 대는 백치를 이가 갈리도록 막아 세웠다.
쏟아내고 싶은 말들이 목 끝까지 차올랐으나 남아있는 한 톨의 이성이 그 본능을 가까스로 억누르고 있었다. 그녀에 대한 의심을 완전히 거두지 못한 상황에서는 그 무엇도 흘릴 수 없었다.
“……그만하고 자요.”
그는 씩씩대는 동물을 진정시키듯 그녀의 이마를 쓸어주었다.
“일단 자고 일어나서―”
“지금 자는 게 문제예요? 나는 먹고 싶었단 말이에요!”
결국 이연이 눈매를 허물어뜨리며 울먹였다. 감정의 낙폭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 시작한 건 순식간의 일이었다. 이제는 분노보다 서러움이 치받았다.
“내가 왜 그쪽 필요에만 어울려줘야 하는데요……! 나도, 나한테도 당장 해결해야 하는 급한 욕구가 있었어요! 그런데 왜 자꾸 방해해요, 나는 정말 급했단 말이에요!”
그때 권채우가 어슷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이연의 턱을 붙들고 시선을 맞춰왔다.
“누굴 먹고 싶었는데요?”
쇠가 부딪쳐 깎이는 듯한 음성이었다.
“네?”
“그래서 한밤중에 쥐새끼처럼 사용인 숙소로 가던 거였어요? 당장에 급한 욕구가 있어서?”
맞는 말이긴 한데 어쩐지 미묘했다. 이연이 가만히 눈만 깜빡이고 있자 그가 덧붙였다.
“어떤 새끼예요? 아―. 혹시 그 새낀가? 사다리 대신 들어주겠다고 멍청하게 달려온 놈? 아니면, 이연 씨 밥 먹을 때 옆에서 재잘거리던 노총각 새끼?”
그의 목울대가 울컥 움직였다.
“급하다고 아무거나 주워 먹는 거 아니에요.”
“무, 무슨―”
“그럴 바엔 차라리 굶어요, 이연 씨.”
……굶어? 굶어어? 이연은 차분히 생각하기도 전에 왈칵 성을 내고 말았다.
“지금 먹으러 못 가는 것도 분해 죽겠는데 내가 왜 굶어야 하는데요! 본채에는 먹을 게 없어서 나온 거예요. 내 배 좀 채워달라고 자고 있는 권기석 씨를 깨울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몰래 나온 건데―”
“권기석을 깨워요?”
그때 칼 같은 숨소리가 그녀의 말을 잘랐다.
“이 배를, 대체 뭐로 채우고 싶었길래 권기석을 깨워요.”
열 오른 손바닥이 인장을 찍듯 이연의 배를 덮었다. 그녀가 흠칫 놀라 몸을 굳혔다.
“이연아, 설명 잘해. 지금 여기에 우리밖에 없어.”
그가 눈꺼풀을 파르르 떨며 음산하게 말했다. 사납게 우그러진 얼굴이 훅 다가오자 강렬한 체취에 이연은 숨이 막혔다. 그러나 그 냄새 때문에 오히려 더 허기가 졌다.
권채우는 멍하니 입술만 달싹이고 있는 이연의 귀를 한입에 집어삼켰다. 부드러운 귓불을 빨아 당기고 혀로 건드리다 이내 괴롭히듯 짓씹어댔다.
“저번에 여기에 달려있던 건 어디 갔어요?”
뜨거운 입김이 예민한 곳에 내려앉았다.
“뭐, 뭐, 뭐하는 거예요……!”
“그때 귀걸이 보자마자 잡아 뜯고 싶었는데.”
그녀가 붉어진 얼굴로 그의 널찍한 어깨를 팡팡 때렸지만 어림도 없었다.
“내 앞에선 그런 거 한 번도 안 했었잖아요.”
“씨, 씹지 마요……! 먹는 소리 내지 말라고요! 왜, 왜, 너만 씹어, 나도 내 토마토……!”
이상하게 감정 기복이 널을 뛰었다. 오르내리는 기분을 스스로도 통제할 수 없어서, 감정을 조절하는 스위치가 숫제 고장이라도 난 것 같았다. 그래서 따지기도 전에 눈물부터 나왔다.
“나도, 나도 먹으려고 했는데! 즙, 과즙도……!”
“즙? 무슨 즙?”
그가 흐늘거리는 이연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강하게 당겨왔다. 서로의 코끝이 부딪혔다.
“나는 계란……. 많이도 안 바라고 딱 두 개만 있으면 군말 없이 먹어 치울 수 있는데…….”
“그쵸, 그 새끼들 다리에도 비슷한 게 두 개씩이나 있죠. 씨발, 계란은 나도 있어요.”
“너어는 흐윽, 유통기한이 이미 지났고요흐……. 나는 계란에 우유에 섞어서 보들보들하게―”
“그것도 아마 나한테 있을 거고요.”
“아아니― 불알 말고요흐……! 계란이요, 흐윽, 계란!! 거기에 우유 섞어서 스크램블 에그요! 스크램블 에그랑 토마토 같이 먹고 싶다고요!”
그녀는 발악하듯 외쳤고, 서러운 울음은 하염없이 내렸다. 권채우는 변했지만 혼자 비약하는 버릇은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것 같아서 그게 또 가슴 어딘가를 건드렸다.
이내 이연이 주린 배를 잡고 꺽꺽 울어대기 시작하자 당황한 권채우가 그녀를 훌쩍 안아 이불 속으로 집어넣었다.
“납치한 주제에 밥도 안 주고흐……,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야?”
한쪽 매트리스가 묵직하게 눌리고, 익숙한 온기가 다가왔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기시감에 이연은 또다시 속이 울렁거렸다.
그때 권채우가 묘하게 멈칫하는가 싶더니 그녀의 배에 귀를 가져다 댔다. 꼬륵, 꼬르륵. 배곯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그는 도톰한 입술을 안으로 사리물며 몸을 일으켰다.
“나만 이렇게 묶어두고 어디 가는데요!”
“해 올게요.”
“뭘요?”
“스크램블 에그랑 토마토, 또 뭐가 필요해요?”
“…….”
이연의 눈물이 거짓말처럼 뚝 그쳤다. 그 대신 침샘이 따끔거리며 왈칵 혀를 적셨다.
“오렌지 주스…….”
“오렌지 주스.”
그가 입력하듯 이연의 말을 따라 하며 방문을 발로 툭 찼다.
“열어.”
그러자 다른 누군가가 방문을 지키고 서 있었는지 철컥,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잠시 뒤, 널찍한 접시에 숫제 산처럼 쌓인 스크램블 에그, 갓 씻은 방울토마토, 그리고 오렌지 주스 한 병을 통째로 들고 권채우가 돌아왔다.
손목이 풀린 이연은 그릇을 싹싹 비우는 도중 얼떨결에 잠이 들었고, 정신없이 흡입하는 그녀를 말없이 지켜보던 남자 또한 스르륵 눈을 감았다.
다음 날 아침.
권채우는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날카로운 햇살에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쿨쿨 자고 있는 소이연이었다.
깨어났다.
바깥에선 새가 지저귀고 있었다.
그 단순하고도 명징한 사실이 뇌리를 스치자 권채우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그는 이연의 입가에 묻어있는 계란을 떼어 제 입속으로 가져갔다. 신경질적인 한숨이 새어 나왔다. 가슴 한쪽이 달게 녹아내리는 패배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