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무릇 시집살이란 귀머거리 3년, 벙어리 3년, 장님 3년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연은 권세가의 정원 관리가 그 옛날 시집살이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고 자조하는 중이었다.
상류층의 별장에서는 일반인들이 상상하기 힘든 온갖 비정상적인 일들이 잔뜩 벌어지고 있었다.
섹스, 사냥, 마약 파티로 크게 나뉜다는 비밀 사교회는 전부 권 가(家)가 주관하는 향락 범죄로, 특히나 외국 상류 사회에서 이러한 풍조를 배워온 국내 인사들이 대거 참석하고 있다고 정원 관리팀의 직원에게 전해 들었다.
“휴우……. 미치겠네……!”
이연은 앞으로 그녀가 채워야 할 텅 빈 공터를 보며 두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대충 주워들은 참석 명단만 해도 국정원 국장, 대학병원 원장, 법무부 장관, 정당 대변인실, 건설회사 대표, 그룹 부회장, 명문대 교수, 유명 연예인 등의 사회 유력인사여서 이연의 입은 떡 벌어지고 말았다.
섹스를 위한 정원이라니. 그녀는 고용주의 황당한 지시에 아직까지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상태였다. 절로 울상이 지어지고 한숨이 나왔다.
그래도 딱 한 달이다, 한 달.
지금으로선 규백이를 데리고 이곳을 무사히 빠져나가는 것만 생각해야 했다. 그녀는 밋밋한 제 배를 톡톡 건드리며 중얼거렸다.
“엄마가 짬짬이 태교 잘할게…….”
이연은 넓은 마당을 보며 조금씩 정원을 구상해 나갔고, 그럴수록 얼굴은 붉어지기 시작했다.
* * *
오늘도 야외 테이블에 앉은 권채우는 제 곁에서 잠이든 소이연의 환영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잠에 들지 못하는 밤이 길어질수록 그녀는 선명해졌다. 아이처럼 보드라워 보이는 손등을 엄지로 슥 문질러보니 따뜻하지도, 그렇다고 차갑지도 않은 묘한 감촉이 느껴졌다.
그가 손으로, 입술로, 정신없이 탐닉했던 소이연의 살결에 비한다면 환영의 감촉은 나무토막보다도 못했다. 그럼에도 불안한 아이가 베갯잇을 고집스레 쥐고 있듯 권채우 또한 손을 뗄 생각은 없어 보였다.
‘도련님 몸이, 여전히 소이연 씨한테 매여 있다는 걸 확인하게 될까 봐 무서운 건 아니십니까.’
순간 귓가를 파고드는 장범희의 목소리에 낯이 굳어졌다. 내가, 뭘 무서워하고 있다고? 빈정거리듯 매끈한 입술에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는 화이도에서 강박적일 만큼 수면을 피해 왔다. 소이연을 떠올리기만 해도 솟는 적대감이 가시처럼 날카로운데. 그런 여자에게 그간 아침을 내맡겨 왔다는 것이 우습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치욕스럽기까지 해서, 권채우는 당연한 수순처럼 그녀와의 연결고리를 전면 부정했다.
그런데 속을 뚫고 들어온 장범희의 기습에 가슴이 선득해지는 것이다.
그건 권채우가 굳게 믿어온 무언가를 동강 내는 소리였고, 어긋난 괴리감은 내내 거슬리고 불편했다. 그는 구겨진 미간을 검지로 꾹꾹 눌렀다.
“어째 날이 갈수록 얼굴이 수척해지는지 모르겠군.”
맞은편에 앉아있던 권기석이 태블릿을 넘기며 툭 말했다.
“오늘도 식사를 걸렀다고 들었는데.”
“……여기서 뭐해?”
“그러는 너는, 고작 일광욕이나 하겠다고 여기에 늘어져 있는 건 아닐 테고.”
내내 태블릿만 바라보고 있던 권기석이 흘끗 시선을 던졌다.
“채우야, 이 집에 네 형수라도 들여놔야 여러모로 중심이 잡힐까.”
“뭐?”
권채우가 짜증스럽게 눈썹을 움직였다. 다시 곱씹어 봐도 절로 코웃음이 쳐지는 말이었다.
권기석의 일거수일투족을 따라다니는 사냥개들이 똑같은 보고만 올리는 걸 떠올려본다면 더욱이 그러했다.
권기석에게는 여자가 없다. 공식적인 여자도, 숨겨둔 여자도, 정기적이든 비정기적이든 섹스를 하는 여자도 없다. 이제 그의 나이가 막 마흔에 접어든 것을 감안해 보자면 어지간히도 결벽적인 성미였다.
그러므로 참으로 시답잖은 헛소리인 것이다.
“데려올 수 있으면 한번 데려와 보든지.”
권채우가 입술을 비딱하게 올린 순간, 권기석이 고개를 틀어 정원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평소와 달리 진득하게 시선을 붙여두는 꼴이 어쩐지 예사롭지 않아 권채우도 덩달아 눈길을 돌렸을 때였다.
“……!”
그곳엔 접이식 사다리를 옆구리에 낀 채 정원을 가로지르는 소이연이 있었고, 그것을 알아챈 남자는 삽시간에 기분이 더러워졌다.
권채우가 테이블의 다리를 퍽 차자 태블릿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권기석의 무기질적인 동공이 다시 돌아오고 나서야 꼬였던 심사가 조금은 풀리는 것 같았다.
“지금 어딜 쳐다봐?”
서슬 퍼런 물음에 권기석의 입매에 미묘한 미소가 맺혔다 사라졌다.
“너한테 소이연 씨는 치가 떨리는 사람일 수도 있겠지만―”
“…….”
“나한테는 집안의 숙원을 도와준 사람이니 당연히 특별할 수밖에.”
권채우의 얼굴이 대번에 싸늘해졌다. 양가적이고 이질적인 감정은 비단 소이연에게 국한된 것만은 아니었다.
애초에 친가족을 거부하고 유괴범을 따르는 것 자체가 권채우를 구성하고 있는 근원적인 모순이었다. 그러한 회색지대에 갇혀있는 기분은 언제나 외나무다리에 선 것처럼 아슬아슬했고 자신을 뒤틀린 인간으로 보이게 했다.
어긋나버린 균형을 다시 한번 맞닥뜨리자 권채우는 속이 갑갑해졌다.
“훔쳐냈으면, 언젠가는 제 것도 도둑맞을 수 있다는 걸 알아야지.”
별안간 시선을 똑바로 맞춰오며 권기석이 읊조렸다.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속에서 욱, 하고 부아가 치밀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앞자리는 비어있었고, 권채우는 곧장 표정을 지워내며 장범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직감에 신경 줄이 바짝 당겨졌다.
―예, 도련님.
“…….”
―도련님?
공교롭게도 권채우는 호쾌한 가위질 소리가 나는 쪽으로 막 시선을 빼앗긴 참이었다.
접이식 사다리에 올라간 소이연이 가지를 싹둑싹둑 잘라내고 있었다. 이연이 조금이라도 허리를 비틀거나 팔을 움직일 때마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손가락을 움찔움찔 떨었다.
그에게 무해한 소이연은 어김없이 잠들어있고, 저에게 날을 세우는 소이연은 가위를 들고 살아 움직인다. 권채우는 피곤한 듯 마른세수를 했다.
정말로 소이연이 미끼였다고 한다면, 권기석이 잡으려 하는 건 권채우 자신일 것이다.
사라졌던 막내를 되찾고, 유괴범을 벌하고, 의무와 책임감으로 가족들을 결집시켰던 장남의 최종 목표가 권 가(家)의 아픈 손가락이자 음지의 전신이 된 막내라면.
권채우는 그동안 한 번도 의심해 본 적 없던, 남자로서의 본능을 따라가기로 했다.
“윤주하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허스키하게 흘러나왔다. 부모님과 윤주하의 원한은 서로에게 타당했고 공평했기에 더는 나올 구석이 없을 정도로 깨끗했다. 그렇다면 이제는―.
“권기석의 관계를 알아봐야겠어.”
그는 흔들리는 눈빛에도 저 멀리 소이연을 끈질기게 응시했다.
* * *
이연은 며칠 동안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녀에게 모든 전권을 맡겼던 권기석은 이연이 구상하고 발주한 것에 대해 검토하는 시늉조차 없이 곧장 승인을 해 주었다.
처음에는 비용을 걱정하느라 머리털이 빠지는 줄 알았지만, 정원 관리에만 매달 3천만원 이상을 쓴다는 말에 부담감을 내려놓았다. 그렇게 공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처음 며칠은 권채우를 보지도 못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자주, 스치듯 마주치기 시작했다.
앞뒤 재지 않고 야차처럼 달려들었던 첫날과 달리, 그는 이연을 관찰하듯 시선만 보내왔다.
차라리 시비라도 건다면 편했을 텐데 권채우가 숨을 죽일수록 이연은 불안해져 갔다.
꼬르…… 꼬르륵…….
“하아…….”
천장의 벽지 무늬를 세고 있던 이연이 한숨을 내쉬며 일어났다.
도무지 배가 고파서 잠이 오질 않는다.
끼니를 대충 때운 건 둘째치고, 한번 머릿속에 음식이 콕 박혀들면 그것을 해결하기 전까지 부추기듯 날뛰어대는 심장이 사그라들지 않았다.
평소 식탐이 있는 스타일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임신의 영향인지 충동을 참기가 힘들었다.
어느 정도냐면, 그것을 먹지 못하면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서러워지는 것이다.
노릇노릇한 스크램블 에그와 새콤한 방울토마토. 부들부들하게 익힌 계란이 입 안에서 녹아드는 것을 생각하다 보니 역시나 군침이 돌았다.
“으으…….”
고소한 풍미와 상큼한 과즙을 몇 번이나 상상하던 그녀는 결국 침대 밖으로 두 다리를 내밀었다.
그러나 현재 거주 중인 본채의 부엌에 들러 냉장고를 열어봤더니―
“으……. 내 계란……!”
하필이면 계란이 텅 비어있었다.
그녀는 초조한 듯 부엌을 서성이다 충동적으로 밖으로 나갔다. 늦은 시간에 뭔가를 걸신스럽게 먹는 모습을 들키고 싶진 않았지만, 사용인들의 숙소라면 괜찮을 것이다. 대충 저택의 위치를 익혀둔 이연은 살금살금 걸음을 옮겼다.
“쥐새끼처럼 어디를 그렇게 가요?”
“허억……!”
이연이 화들짝 가슴께를 누르며 뒤를 돌았다.
“…―떨어질 뻔했잖아요!”
그녀가 정색하며 빽 소리를 질렀다.
“뭐가 떨어져요?”
표정 없이 되묻는 목소리에 이연은 “아, 아니에요.”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쿵쿵 뛰는 심장을 꾹 누르며 입술을 깨물었다. 정말이지 깜짝 놀라 눈빛이 곱게 나가지 않았다.
“이 야밤에 어디를 가냐고 물었어요, 이연 씨.”
편안한 옷차림의 권채우가 졸린 건지, 피곤한 건지 반쯤 나른하게 내리뜬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어딜 가든 무슨 상관인데요.”
“거기로 쭉 가면 뭐가 나올지 알고요?”
권채우가 턱짓으로 이연이 향하던 길을 가리켰다.
“여기에 산 사람만 있는 거 아니에요.”
낮고 의미심장한 목소리에 이연은 팔뚝을 쓸어내렸다. 그러나 이연은 대꾸하지 않고 방향을 홱 틀었다. 분명 낮에 봤을 때에는 웬만큼 외웠던 것 같은데 밤이 되니 매번 가던 길도 헷갈렸다.
“그쪽엔 아무것도 없어요.”
느긋하게 따라온 그가 고저 없이 덧붙였다.
이연은 그의 말을 무시한 채 앞만 보고 걸었지만 정말로 가도 가도 끝이 없었다. 확실한 건 이쪽 길은 아니라는 거였다. 이연은 낭패감에 카디건 끝만 꾹 쥐었다.
“말만 해요, 안내해 줄게요. 해코지 안 해요.”
그는 확실히 첫날과는 다르게 여러모로 안정된 모습이었다. 호흡도, 목소리도, 말투도 무엇 하나 격하지 않고 차분하게 가라앉아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그녀를 좇는 시선은 변함이 없었지만, 그래도 그 기세가 과거의 권채우를 떠올리게 할 정도로 얌전했다.
“……사용인들 숙소요.”
이연은 그와 결코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거기는 왜요?”
“안내해 줄 거라면서요.”
이연이 쌀쌀맞게 먼저 지나치자 권채우가 말없이 뒤따라왔다. 길을 찾는 동안 두 사람은 조용했고, 남자는 어느 순간 이연을 앞질러 부드럽게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날씨가 선선한 가을밤이었다. 이연은 시야에 가득 들어찬 남자의 등을 잠시간 응시하다 고개를 푹 숙였다. 오로지 제 발끝만 쳐다보며 따라갔다.
“다 왔어요.”
권채우의 말에 이연이 고개를 드는 순간이었다.
“어……!”
여기가 어디지? 이런 구조가 아니었는데? 멈칫한 그녀가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 단단한 손이 뒤에서 감겨들었다.
묵직한 악력에 입이 막히고, 허리가 조였다.
“으읍……!”
익숙한 향기가 이연의 몸을 결박하듯 훌쩍 안아 올렸다. 키 차이 때문인지 이연은 발레리나처럼 가볍게 떴고, 두 다리는 허공에서 동동거렸다.
“으, 으으읍……!”
“가만히 있어요, 해코지 안 한다고 했잖아요.”
낮은 음성이 귓가를 긁었다. 정중해 보이지만 예민한 목소리였다.
“으읍!”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래요.”
불 꺼진 복도를 가르듯 지나가는 권채우의 걸음은 느긋했다. 그러나 맞닿은 몸으로부터 가파른 심장박동이 전해져왔다.
잔근육으로 들어찬 팔뚝이 이연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았고, 그의 손날은 봉긋한 가슴 밑을 지탱하고 있었다.
“오늘 밤, 나랑 같이 자 주기만 하면 돼요.”
이연은 저를 옥죄는 힘에 숨이 막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