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그 말은 즉, 앞으로도 모른 척은 곧 죽어도 못하겠다는, 아니, 안 하겠다는 소리다.
한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조용히 보내고 싶었던 한 달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복병을 만났다.
그녀가 입술을 깨물고 그를 노려보는 순간, 이 모든 사태를 관망하고 있던 규백이 돌연 권채우의 아랫배를 쭈욱 밀면서 두 사람의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다시 쪼르르 돌아와 이연의 손을 짐짓 엄하게 잡아당겼다.
“원장 선생님은 열 받으면 안 됩니다.”
“……헉, 규백아, 미안해. 그―”
뒤늦게야 아이를 앞에 두고 추태를 보였다는 사실에 이연이 쩔쩔맸다.
“원장 선생님은 개구리처럼 열심히 숨 쉽니다.”
“……어, 어, 그래.”
남자의 서늘한 탐색에 저도 모르게 뻣뻣이 굳히고 있던 몸에 힘을 풀었다. 심장이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뛰고 있었다.
이미 권채우를 비워내고 왔는데도 그는 어김없이 사람을 휘말리게 하는 면이 있어서.
규백이가 브레이크를 걸어 주지 않았더라면, 정말 끝까지 치달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정신을 차리고 보니 권채우의 꼴이 아주 엉망이었다.
땀이 맺혀있는 얼굴, 피투성이가 된 손등, 바지는 흙더미였고 팔꿈치와 무릎에도 피가 비쳤다. 차를 막으면서 구른 상처인 듯한데, 권채우는 제 몸에는 일절 관심이 없어 보였다.
오로지, 그는―
“…….”
“…….”
두 사람의 시선이 다시 조용히 부딪혔다.
금세 중심을 잡은 이연과 달리, 권채우는 여전히 그곳에 멈춰있었다. 거칠게 흔들리는 눈빛 속에서 이해할 수 없는 집착 같은 것이 보였다.
자연스럽게 이연의 입이 열렸다.
“그 감정은 그쪽 거지, 내 것이 아니에요.”
“…….”
“그러니까 나한테 떠넘기지 말고, 알아서 해결해요. 저번에는 기억을 잃어서, 정신이 온전치 못해서 나한테 의탁했다고 했으니까. 똑같은 실수는 피해야죠.”
그녀가 퍽 명확히 선을 그었다.
그러자 차에 치였을 때조차 태연했던 남자가 별안간 얼굴 한쪽을 우그러뜨렸다.
이연은 홀로 무언가를 삼키고 있는 권채우를 내버려 두고 등을 돌렸다. 의외로 발걸음이 덤덤했다. 단단해진 이연에게 성난 파도가 부딪쳐봤자, 하얗게 부서지는 건 그녀가 아니었다.
“수컷 거미는 짝짓기 후, 암컷에게 먹힙니다. 고로 죽은 수컷은 말이 없습니다.”
그때 규백이가 남자를 돌아보며 옴팡지게 말했다. 혼란한 와중에도 이연의 배에 대고 호오― 호오― 따뜻한 입김을 불었다는 사실을 눈치챈 사람은 어른들 중 아무도 없었다.
권채우는 그렇게 본채로 걸어 들어가는 이연을 잡지도 못한 채 멍하니 굳어있었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만 보는 이 상황이 끔찍했다. 그녀를 손쉽게 끌고 갈 수 있는데도 그러지 못하는 스스로가 갑갑했다.
우습게도 그녀가 내뱉은 단단한 말들이 목구멍을 틀어막고 숨통에 쌓이기 시작한 것이다.
“도련님.”
마침 소란을 전해 듣고 달려온 장범희가 그를 불렀다.
“도련님.”
“…….”
한동안 대답도, 미동도 없던 권채우가 돌연 걸음을 옮겼다. 이제는 떠나고 없는 이연의 자리에, 그녀가 잠시 머물렀던 그 자리에 발자국을 겹쳤다.
화이도에서의 마지막 날처럼 그녀를 계속 괴롭히고 싶다가도 붉게 부어오른 이마가 신경 쓰여 미칠 것 같았다.
이렇게 양가적인 마음이 찐득한 웅덩이처럼 그를 휘감고 놓아주질 않는데, 소이연은 저 혼자 가지를 뚝 부러뜨리고 재생해 버렸다.
그렇다면 돌아갈 곳이 원점밖에 없는 개는, 주인을 물어서 버려진 게 분명한 이 개새끼는 대관절 어디로 가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지금 비가 오나.”
“예?”
권채우가 헛소리를 내뱉었다.
쉬이 읽어내기 힘든 그의 의중에 장범희가 미간을 좁히려는데 이번엔 칼 같은 목소리가 꽂혀 들었다. 늪처럼 축축하여 발목을 죄던 분위기는 역시나 착각이지 싶었다.
“언제부터.”
성의라곤 없는 말이었지만 곧장 알아들은 장범희가 고개를 숙였다.
“도련님께서 본가로 돌아오셨을 때, 트렁크에 이규백 군이 같이 실려 왔습니다.”
짧게 터지는 헛웃음에 아랫입술이 떨렸다.
“범희야, 너는 이걸 알고도 나한테―”
“부탁드립니다, 도련님. 주무셔야 합니다.”
“쓸데없는 짓거리 하지 마.”
권채우가 어금니를 꽉 깨물고 위협적으로 한 발 다가섰다. 으르렁대는 음성에 잠시 주춤한 장범희는 이내 차가워진 손을 말아 쥐며 시선을 들었다.
“……혹시 두려우신 게 아닙니까?”
“뭐?”
“소이연 씨가 정말로 도련님을 깨울까 봐―”
“……!”
“도련님 몸이, 여전히 소이연 씨한테 매여 있다는 걸 확인하게 될까 봐 무서운 건 아니십니까.”
깊이 가라앉았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 * *
―잘 도착했나. 니 몸은?
이연은 흔들의자에 앉아 몸을 축 늘어뜨렸다.
“괜찮아요.”
사실은 체력을 다 소진한 것 같았다. 권채우와 만난 지 고작 몇 분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과격하기 짝이 없던 일련의 소란들 때문인지 고막은 계속해서 웅웅거렸다.
그럼에도 부드럽게 움직이는 의자에 몸을 맡기고 있자니 솔솔 졸음이 왔다. 이연은 권채우가 그렇게나 발작했던 본채의 방 안을 죽 둘러보았다.
가을이라는 계절에 맞게 깔아놓은 푹신한 카펫, 혼자 쓰기엔 과하게 널찍한 침대, 넉넉한 볕이 들어오는 유리창과 레이스 커튼. 그리고 어두운 녹색 벽지와 짙은 빛깔의 우드 가구들까지. 어딘지 모르게 고풍스럽고 예스러운 인테리어였다.
―똥강새이는?
“이상한 소리를 하긴 했는데 다행히 건강해 보였어요.”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규백이가 하는 말은 허투루 듣지 말고.
“백과사전 읊는 건 원래 규백이 특기잖아요.”
―그기 아이고, 갸는 무당벌레다!
“네?”
―곤충들도 다 저마다 생존방식이 있다 안 카나. 규백이 같은 애가 앞으로 을매나 세상 살기 힘들겠노. 그러니께 그 쪼꼬만 아도 좋은 수저는 아니지만 뭔가를 쥐고 태어난기제. 규백이 식대로 말하면 더듬이가 잘 발달한 거 아니겠나.
푸스스 미소를 지은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발을 굴렀다. 흔들의자가 크게 움직였다.
“태어날 아기랑 규백이가 사이좋게 지냈으면 좋겠어요.”
그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내내 얼어있었던 몸이 봄볕에 닿은 듯 녹아내렸다.
“사촌들은 나 빼고 정말 사이가 끈끈했거든요. 말은 안 했어도 그게 부러웠나 봐요. 누가 맞고 오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같이 나가서 싸워주고, 그러다 둘 다 흙투성이가 돼서 집으로 돌아오면……”
이연이 일순 흔들의자를 멈추었다.
“어……, 만약에 그러면 어떡하죠, 추자 씨? 혼부터 내야 돼요, 밥부터 먹여야 돼요?”
그러자 수화기 너머에서 화통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밥부터 먹여야제! 그런데 가정부터 잘못 됐다. 우리 새끼 호랭이가 초등학교 드가면 규백이는 중학생일 텐데. 대체 누가 누구를 위해 싸워준다는 기고?
“당연히……! 어…….”
이연의 말문이 또다시 막혔다.
이상하게 초등학생인 애기가 형을 위해 중학교로 쳐들어가는 괴상한 생각이 스치는 건…….
방금 전 요란스러운 상황을 겪고 권채우의 무시무시한 성질을 목도했기 때문일까? 이연은 오스스 소름이 돋은 팔을 쓸어내렸다.
“……태교, 태교가 시급해요, 추자 씨. 태교를 잘해야 할 것 같아요.”
―닌 몸부터 챙기라! 너무 빡시게 일하진 말고, 알았제?
추자는 이연의 곁에 딱 붙어 도움을 주고 싶어 했지만, 일이 이렇게 돼버리는 바람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연은 욱신거리는 이마를 만지려다 움찔하고 손을 내렸다.
―……흔들리진 않드나?
얼굴에 맺혀있던 웃음기가 순간 잦아들었다. 모호한 말이었지만 그 말의 뜻을 알 것 같아서.
이연은 살이 내려 더욱 날카로워진 남자를 떠올렸다. 기억을 잃고 텅 비었을 때보다, 오히려 넘치도록 많은 것을 담고 있는 지금이 훨씬 위태로워 보였지만.
“놀랍게도 괜찮았어요.”
―참말로?
“네, 감상에 빠질 시간도 없었거든요.”
이연은 아직도 무섭도록 뛰는 심장을 꾹 눌렀다. 기어이 차 한 대를 부수고 나서야 본채에 들어올 수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절로 혀가 내둘러지고 식은땀이 났다.
“그런데 좀 겁이 나긴 해요. 앞으로 알아가게 될 도련님 권채우가―”
이연이 사랑했던 남자는 여름날의 짤막한 무더위였다. 절절 끓듯이 앓았지만 찬바람이 부니 흔적도 없이 사라지지 않았나.
다만 그 실체 없는 허상이 안타까울수록 지금의 권채우가 미워져서 큰일이었다.
“내 추억을 훼손시킬까 봐요.”
이연은 이런저런 추자의 말을 들으며 푹신한 의자에 다시 등을 기댔다.
“네, 네. 다행히 입덧은 없어요, 아직은요.”
* * *
이연은 펄떡이는 날생선을 보며 치솟으려는 구역질을 가까스로 참고 있었다.
“이렇게 한자리에 모이니 감회가 남다릅니다.”
벌써부터 속이 얹히는 것 같다.
이런 불편한 자리를 만든 권기석보다, 누구 목이라도 딸 기세로 걸어 들어오는 권채우보다,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아 퍼덕거리고 있는 커다란 생선이 그녀를 충격에 빠뜨렸다.
“소이연 씨, 이쯤 되니 우리 인연이 퍽 깊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깊은 게 아니라 질기다고 생각하는데, 데요.”
마지막 말을 씹지만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애석하게도 그녀는 식탁에만 온 정신이 팔려있었다.
긴 화병에 담긴 크고 작은 초만 수십 개였다. 길쭉하고 새하얀 대리석 식탁에는 개인 테이블 매트와 꽃처럼 접혀있는 냅킨, 그리고 나이프 세트가 정갈하게 놓여있었지만 오히려 그 단정함이 이질적이었다.
살아서 팔딱이는 생선이 각기 세 사람 앞에 대령되었기 때문에.
‘여기가 배 위야, 뭐야……! 직접 회 쳐 먹으라는 거야?’
이연은 희번덕거리는 눈에 아가미를 끔뻑이고 있는 생선을 보자 입맛이 뚝 떨어졌다. 고도로 발전된 문명 사회에서 이런 만찬은 생전 처음이었다.
게다가 마주보는 자리에 착석한 권채우가 그녀를 한 꺼풀씩 발라내듯 쳐다보고 있어서 도무지 시선을 둘 곳을 찾지 못했다.
“형, 이연이든, 인연이든 함부로 들먹이지 마. 전부 협박이었으면서 그렇게 간단히 혓바닥에 리본 매지 말라고.”
권채우는 지극히 자연스럽게 나이프를 쥐고 생선 머리를 제압하듯 눌렀다.
“채우야, 적어도 계약은 기록이라도 되지.”
권기석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기억은 희미해지지만 기록은 영원히 남으니까. 게다가 지난 2년간 소이연 씨랑 나눈 통화만 해도 수십 통이 넘고, 처음 만났을 땐 내가 밤새도록 수갑만 채워놔서 우는 얼굴만 봤는―”
-푸욱!
은 나이프를 손바닥에 갈리도록 잡은 권채우가 생선 눈알을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