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곤충을 안 한다니,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게 틀림없다고요!”
사람도 죽어 나가는 판에, 당연히 온갖 일이 벌어지지.
규백이는 권 가(家)의 후원이라도 받는 어린이처럼 의기양양했고, 권채우는 묵직한 한숨을 삼켰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잘못된 그림이었다. 소이연과 이규백이 어떻게 여기에 있을 수 있나.
권채우는 빈손이 허전하여 하릴없이 주먹을 쥐어보았다. 단지 그녀의 손을 잡고 싶었던 건지, 먹잇감을 누르고 있었던 건지, 분간이 잘 가지 않았다.
모든 것을 박살 내고 온 주제에, 하필이면 이제야 기억이 전부 돌아와서. 스스로도 예측하기 힘들만큼 충동이 이성보다 앞서고 있었다.
“이연 씨.”
그녀는 잠시 입을 꾹 다물더니 표정을 굳혔다.
“……그렇게 부르지 마요.”
“그럼 뭐라고 불러요?”
“아까처럼 너라고 반말해요. 계속 그렇게 싹수없이 불러요. 그게 마음 편해요.”
“…….”
권채우는 다시 봐도 믿기지 않는 이연의 냉랭한 반응에 가만히 멈춰있기만 했다.
그때, 운전석에서 기어 나온 기사가 후덜덜 떨면서도 이연의 캐리어를 꺼내 주었다. 이연은 그것을 받아들고 규백이의 손을 잡았다.
그렇게 시야에 걸리는 권채우를 철저히 없는 사람 취급했더니 곧장 익숙한 향기가 덮쳐왔다. 규백이와 맞잡고 있던 손을 별안간 권채우가 탁 끊어낸 것이다.
“규백이 만난다고 해서 기다렸어요. 그러면 그다음은 내 차례 아닌가?”
“…….”
“왜 꼬맹이 손을 잡고 가는지 모르겠네.”
안 그래도 낮았던 목소리가 더욱 차갑게 가라앉았다.
“아무래도 이연 씨가 순서를 헷갈렸나 봐요.”
당연히 헷갈린 것이어야 한다, 그 외의 이유는 받아들일 수 없다, 라는 어떤 압박이 느껴지는 말투였다.
그에 이연은 눈초리에 짜증을 달고 홱 돌아보았다. 사람은 달라졌는데 체향이 똑같다는 게 문득 그녀의 신경을 건드렸다.
“전에 만났던 여자랑은 헤어져 본 적 없어요?”
권채우의 낯이 굳어졌다.
“헤어진다는 뜻 몰라요? 그쪽이 심사 망치고, 신령목 죽이고, 내가 필요 없다고 버렸을 때는. 언젠가 우연히 만나더라도 모른 척 지나쳐주는 게 최소한의 예의가 됐다는 거예요. 우리 사이에 남은 건 고작 그런 예의라고요.”
“…….”
“그러니까 제발 데면데면하게 굴어줄 수 없어요?”
권채우는 미간만 옅게 찌푸리고 있었다. 자신에 대한 질책과 거부를 온몸으로 말하고 있는 그녀가 낯설었다.
“헤어질 때도 배려라곤 눈곱만큼도 없더니, 지금은 더 배려 없어요.”
그의 턱에 힘줄이 불끈 불거졌다. 질색하는 이연의 눈빛이 목 어딘가를 힘껏 조르고 있었다.
권채우는 당장이라도 그녀를 끌고 갈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으면서, 정작 손끝 하나 움직이지 못했다.
게다가 눈앞의 여자는 권채우가 기억하는 그 누구도 아니었다. 상냥하지도, 상처받은 사람도 아니다.
그가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이연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에는, 목소리가 잇새에 짓눌려 나왔다.
“……거기 본채예요. 거기가 어딘지는 알고 들어가는 거예요?”
“같이 한방을 쓰는 것도 아닌데 뭘 그래요?”
본채는 권기석이 거주하는 곳이었다.
이연이 대수롭지 않게 받아치자 시종일관 굳어있기만 했던 권채우의 얼굴에도 웃음기가 확 퍼졌다. 문제는 그게 진짜 웃음이 아니라, 살얼음 같은 냉기라는 것이다.
“이연 씨, 장난이라도―”
그 순간 이연의 몸이 확 딸려갔다.
그녀의 옷깃을 틀어쥔 권채우가 찢어진 손등을 태연히 닦아내고 있었다. 유리창을 깨부수느라 피로 물들었던 주먹을 그녀의 옷깃에 문질렀다.
새빨간 피가 그녀의 목을 스치며 치덕치덕 묻는다. 굳은살이 박인 손날이 그녀의 살갗 어딘가를 잇달아 긁고 귀밑을 건드렸다.
“그딴 말은 하는 거 아니에요.”
잘게 떨리는 목소리가 솜털 가까이에 닿았다. 이연은 저도 모르게 바짓단을 움켜쥐고 숨을 참았다.
“한계를 시험해 보고 싶어요? 내가 어디까지 끔찍해질 수 있는지?”
비릿한 피 냄새가 역하게 올라오는 동안, 권채우는 이연을 관찰하듯 뚫어져라 주시했다.
그리고 파르르 떨리는 그녀의 속눈썹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표정을 풀었다.
어떤 방식으로든 그를 향해 반응하는 이연을 확인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것 같았다.
“이연 씨, 숨 쉬어요.”
그가 짤막하게 이연의 등을 툭 두드렸다.
이연은 고개를 삐걱삐걱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가까이에서 눈이 마주치자 그가 한쪽 눈썹을 움찔 떨었다.
담갈색의 정갈한 눈동자는 쇳물처럼 뜨거운 화로 가득 찬 상태였는데, 동시에 그것 못지않은 갈구 따위가 비쳤다. 이연은 내심 당황해하며 눈꺼풀을 깜빡였다.
“대, 대체 왜 이래요?”
“…….”
“설마 또 까, 까먹은 건 아니죠? 나예요, 나. 그쪽이 보기만 해도 치 떨린다고 했던 사람이요.”
“기억해요.”
“그럼 날 무시해요, 눈에 보여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권채우는 고요히 시선을 내리고 경련하는 뺨을 손등으로 꾹 눌렀다. 그러자 물감을 찍어내듯 핏자국이 옮겨붙었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보이는 것처럼 지냈는데.
그녀는 그 반대를 요구하고 있다.
권채우가 다시 눈동자를 치떴을 땐 혼탁한 눈빛이 사납게 들끓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나가라고 했잖아요.”
“……!”
“돌아가라고요, 이연 씨.”
그가 이연의 손에서 캐리어를 뺏어들고 반대편에 놔두었다.
“뒷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여기서 나가라고. 내가 몇 번을 말해요!”
권채우는 눈매를 허물어뜨리며 이마를 짚었다. 별채에 있었던 손님이 규백이라는 것을 전해 들었을 때부터 이것이 덫임을 알았기 때문에, 거칠게 들썩이는 호흡에선 독한 숨이 뿌려졌다. 살벌하게 구겨진 얼굴이 왜인지 고통스러워 보였다.
이연은 감정적으로 구는 상대를 보자 오히려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녀가 의연하게 되물었다.
“내가, 그쪽 말을 들어야 하는 이유를 한 가지라도 대 봐요.”
“…….”
그러자 뜨겁게 달아오르던 공기가 한순간 차갑게 얼어붙었다. 침묵이 길어지고 있었다.
권채우가 우뚝 굳어 아무런 말도 못하자 이연은 그것 보라는 듯 눈썹을 치켜세웠다.
이런 실랑이가 얼마나 무의미한 짓인지,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셨죠? 이게 우리 사이예요.”
“…….”
“아무것도 없는 것.”
이연이 캐리어를 다시 제 자리로 끌고 왔다.
“그쪽이 내지르는 한마디가 내가 권기석 씨랑 사인한 계약보다 우위일 거라고 착각하지 마요.”
이윽고 한발 한발 그녀가 멀어져가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는 위험해요, 이연 씨.”
권채우가 고개를 푹 숙이고 뒤늦게야 읊조렸다. 그러나 되돌아오는 건 굴러가는 바퀴 소리뿐이었다.
이연 씨, 이연 씨. 홀로 남은 그가 덧없이 중얼거렸다.
권채우는 흑백의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선 상태였다. 두 개의 기억 중 어느 한쪽에 깊이 물들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완전히 자유로운 것도 아닌, 그야말로 회색지대.
비록 혼란할지언정 나름대로 균형을 유지하고 있던 세계였는데. 이연을 만난 직후, 간신히 유지하고 있던 중심이 깨져버렸다.
그녀의 숨소리부터, 말의 온도, 시선의 방향까지, 권채우는 매순간 자극받았고, 또 시험 당했다.
추는 끊임없이 휘청거렸다.
이 질척한 마음에 아직 이름을 붙일 순 없었지만 그럼에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권채우는 성큼성큼 다가가 이연의 캐리어를 머리 위로 번쩍 들어올렸다.
“무, 무슨―!”
이연의 눈이 커다랗게 커진 순간, 그가 캐리어를 차 쪽으로 던졌다.
흑요석처럼 반질반질했던 유리창에 캐리어가 콱 박혀들면서 앞판이 쩌저적 거미줄 모양으로 갈라졌다.
긴장한 채 대기하고 있던 운전기사는 얼굴이 노래져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경고음이 시끄럽게 울려 퍼지고, 붉은색 헤드라이트가 권채우의 희멀건 얼굴을 비추었다.
“뭐, 뭐하는 거예요!”
그녀가 입을 떡 벌리자 남자는 입꼬리를 쭉 찢으며 느물거렸다.
“이연 씨, 나 같은 개새끼한테 뭘 바래요. 그냥 송곳니로 물어버리고 싶으니까 쫓아온 거지.”
“……!”
그가 한쪽 어깨를 돌리며 다가와 이연의 머리카락을 퍽 다소곳이 넘겨주었다.
“그럼 우리, 다시 얘기해 볼까요?”
“뭐, 뭐를…….”
이연의 얼굴이 혼란으로 물들었다.
“저기는 본채인데, 거기가 어딘지는 알고 들어가는 거예요?”
“……!”
숫제 고약한 사탕을 잘못 삼킨 것 같았다.
“표정이 왜 그래요? 나 지금 데면데면하게 굴고 있잖아요.”
이연은 멍하니 굳어 목각인형처럼 눈만 깜빡거렸다. 권채우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올려 그녀의 눈두덩을 한번 쓸어주었다. 친근한 스킨십에 이연은 흠칫 몸을 굳혔다.
“내가 살면서 예의라는 걸 못 배웠어요. 보다시피 집이 부유하기도 했고, 모두가 내 눈치를 보느라 혼내지를 않았거든요. 대체로 오냐오냐 자랐다는 얘기예요. 그래서 한번 망가뜨린 건 다시 주울 정도로 궁하지가 않았었는데.”
그가 허리를 굽혀 이연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녀를 잡아 뜯듯 직시하는 얼굴이 묘했다.
“이해가 안 가요. 이연 씨를 버리고 온 건 난데, 왜―”
미간을 찡그린 남자는 이연의 얼굴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그녀의 경직된 눈망울을 몇 번이고 헤집고, 들춰보면서 그가 모르는 이변을 움켜쥐려 했다.
“…….”
그러나 아무리 들여다봐도 바짝 마른 흙가루만 파스스 떨어질 뿐이었다.
불현듯 그는 “아아―.”하며 묵직한 저음을 성대 안에서 울렸다.
“너, 나를 완전히 버리고 왔구나.”
“……!”
그가 눈발처럼 내리는 웃음을 흘흘 흘렸다.
“나를 버렸어.”
권채우가 시뻘게진 눈으로 말했다.
“나도 당연히 헤어진다는 뜻은 알아요. 그런데 나한테 그 뜻은―”
그의 목소리가 겨울 입김처럼 스산하게 번졌다.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흉을 뱃가죽에 새기는 거였는데.”
“……!”
“그러면 우연히 만났을 때, 온몸이 욱신거리지 않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