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이연은 잰걸음으로 정원을 벗어나며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았다.
‘뭐, 뭐야……!’
대저택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아니, 화이도를 잠시 떠나있기 위해 짐을 챙겼을 때부터, 어쩌면 권채우를 만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 느닷없이 마주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라서.
“헉……!”
이연은 뛰지 않는 선에서 재빨리 자리를 뜨며 숨을 헐떡였다.
그에게 잡혀있던 어깨와 손이 뜨겁고 욱신거렸다. 보이지 않는 손자국이라도 남은 건 아닌지, 어깨를 탈탈 털듯 문질러보았다.
여전히 흠집 하나 없이 매끈한 남자를 다시 마주한 순간, 이연은 지난 한 달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것 같았다.
우뚝 솟아있는 그의 존재감보다, 그녀가 극복한 시간이 어쩌면 더 귀해서. 잠시나마 놀랐던 마음도 금세 중심을 지켰다. 저건 겉가죽만 똑같은 사람이라고 치부해 버리면서.
“빨리 치고 빠지는 게 상책이야.”
도망치는 사람이 으레 그러하듯 뒤를 돌아보고 싶었지만, 이연은 주먹을 쥐고 꾹 참았다.
그녀는 화이도에서 이곳으로 오는 내내 불편하지만 극진한 에스코트를 받았다.
성처럼 커다란 대문을 지나, 놀랄 만큼 길게 이어진 울창한 가로수 길을 거쳐, 중문과 또 다른 중문을 통과하고 나서야 마침내 입지 좋은 산 아래 자리한 저택에 다다를 수 있었다.
그러는 와중, 이연은 권 가(家)에 대한 사소한 정보도 조금씩 얻어냈는데, 차남은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이 집안과는 오래전 절연했다는 것이고, 삼남은 엔터 사업을 하며 완전히 독립했다고 했다.
그러므로 첫째인 권기석과 막내인 권채우만이 현재 가문의 일을 도맡아 하며 유지를 이어오고 있다고.
운전기사는 절대로 그 두 사람과 엮이지 말라며 신입에게 신신당부했지만, 이연은 어색한 미소만 지어 보였다.
저택에 가까워질수록 조금씩 드러나는 정원은 푸르고 드넓었다. 특히나 소담스럽게 피어있는 꽃나무의 향연에 이연은 몽롱해진 정신을 차릴 길이 없었다.
그녀가 본 어떤 정원 중 단연 가장 생생하고 화려해서. 잠시 차를 멈춰 달라 양해를 구하고 무작정 잔디부터 밟았던 것이다.
외국의 여느 궁전 못지않게 잘 관리된 가든. 보통 이렇게 만들어진 정원은 사람들의 입맛대로 나무의 모양을 잘라놓기 일쑤였는데, 다행히 그런 걱정과는 다르게 겉보기에도 아주 건강해 보였다.
누가 관리했을까? 비료는 뭘 썼을까? 이 노련한 솜씨 좀 봐……. 이연은 얼른 그들의 작업일지를 열어보고 싶었다. 그러다 예기치 못하게 권채우를 만나게 됐고…….
이연은 이어지는 생각을 무처럼 자르고 걸음을 재촉했다.
“구경은 다 하셨소?”
차체에 기대있던 운전기사가 헐레벌떡 다가오는 이연을 보고 느긋하게 물었다.
“네, 기다려 주셔서 감사해요……!”
“근데 누가 쫓아오기라도 해요? 왜 이렇게―”
“아저씨, 빨리요!”
“응?”
“빨리, 빨리 가요!”
이연이 다짜고짜 차문을 열며 야단스럽게 굴었다. 아니나 다를까, 뒤늦게야 정신을 차린 권채우가 무시무시한 얼굴로 쫓아오고 있었다.
종종걸음으로 끈질기게 거리를 벌렸던 이연과 달리, 긴 다리로 야생마처럼 폭주하는 권채우를 보자 심장이 미친 듯이 펄떡이고 입술이 말라붙었다.
“아저씨―!”
“어, 어, 알았네!”
운전기사는 덩달아 호들갑을 떨며 차에 시동을 걸었다. 때마침 눈 깜짝할 새에 코앞까지 다가온 권채우가 허리를 굽히고 뒷좌석을 쳐다보았다.
유리창에 끈끈하게 달라붙은 큼지막한 손바닥, 내부를 집요하게 훑는 동공, 상체를 숙이느라 비뚤어진 고개가 왜인지 사람 같지 않았다.
“꺅―!”
그래서 화들짝 놀라고 말았더니 남자의 입꼬리가 길게 올라갔다.
어차피 까맣게 선팅이 된 차량인지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텐데 그는 본능적으로 이연이 있는 곳을 감지라도 하는 것 같았다.
두꺼운 차체에 가로막힌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정확히 꽂혀 들었다.
“이연 씨, 내가 이거 깨부수고 끌어내기 전에 얌전히 나와요.”
“……!”
그가 얼마나 세게 자동차의 루프를 쾅쾅 두드리는지 차체가 속절없이 흔들렸다.
운전기사가 “어, 어…….” 당황해하며 운전대를 바짝 잡았고, 이연도 손잡이를 붙들었다.
“이연 씨, 우리 얘기 좀 해요.”
익숙한 말투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아저씨, 엑셀 밟아요!”
“그, 그런데 저분 혹시 막내 도련―”
“미친 사람이니까 일단 밟아요!”
그 말이 방아쇠라도 된 듯 운전기사는 얼떨결에 엑셀을 쭉 밟아나갔다.
그러자 “씨발!”하고 사나운 욕설이 희미하게 들렸지만, 이연은 좀처럼 돌아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쾅쾅쾅―! 트렁크를 미친 듯이 쳐대는 한 남자의 난폭한 손길 때문에.
기사는 백미러를 힐끔거리며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훔쳐냈다.
“저기…….”
“왜요? 혹시 아직도 쫓아와요?”
몸을 옹송그리고 있던 이연이 고개를 팟 들었다.
“그게 아니라……, 없어졌네. 갑자기 사라졌어. 샛길로 샌 것 같기도 하고…….”
“네?”
잠시 침묵이 돌았다. 어색한 미소를 지은 기사가 별안간 분위기를 풀려는 듯 평연히 물었다.
“참, 정원에선 뭐 좋은 나무라도 발견한 거요?”
“……보다시피 나무는 아니고요.”
그 순간, 끼이이익― 하고 브레이크가 걸리며 예고도 없이 차가 급격히 멈추어 섰다.
이연은 무의식적으로 배부터 감싸느라 앞좌석에 이마를 세게 부딪혔고, 운전기사는 벌벌 떨며 운전대에 고개를 박고 있었다.
기사보다 먼저 정신을 차린 그녀는 숨을 가쁘게 내쉬며 유리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눈앞이 어질어질했지만 두 눈에 힘을 주며 초점을 맞추기 위해 애를 썼다.
마침 누군가 차에 치이기라도 했는지, 바닥에서 길게 사람이 일어났다.
“……!”
“…….”
그리고 그게, 애초에 부딪힐 작정으로 끼어든 권채우라는 걸 깨달은 순간―.
이연은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싸늘하게 굳은 남자는 정확히 이연을 노려보며 저벅저벅 걸어왔다.
그는 운전석의 유리창을 단도로 표시하듯 긁어내더니, 이내 주먹과 팔꿈치로 모서리 부분을 몇 번이고 타격하여 장담했던 대로 문을 깨부수었다.
기사의 등으로 유리 조각이 우수수 떨어졌지만 권채우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저 태연자약하게 손을 넣어 뒷좌석의 잠금 상태를 풀고, 빙 돌아 이연에게 다가왔다.
달깍―.
별것도 아닌 소리 하나가 지금은 폭탄이 터지는 것보다 훨씬 무서웠다.
흠칫, 팔뚝을 그러안은 이연은 그때까지도 가만히 얼어붙어 있기만 했다.
이윽고 차문이 열리고, 한숨 섞인 목소리가 떨어졌다.
“나와요, 이연 씨.”
권채우가 문짝에 팔을 기댄 채 고개를 들이밀었다. 친히 내민 손에는 피가 엉겨있었다.
사랑했던 이를 내보낸 자리에는 다시 비상식적인 남자를 향한 원초적인 공포가 차올랐다.
머리가 백지장이 된 이연은 저도 모르게 삿대질을 하며 입을 벌렸다.
“……미, 미, 미친 거 아니에요?”
“아마도요.”
권채우는 무표정한 얼굴로 재차 손을 내밀 뿐이었다.
“못, 못 내려요. 나는 지금 규백이, 규백이 보러 가야 된단 말이에요…….”
“이연 씨보다 좆도 어린 그놈이 뭐가 중요하다고요.”
“……!”
이연이 낭패라는 듯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잠깐 이 사람이 어떤 성격인지 잊고 있었다.
기억을 잃었을 때에도 비약이 엄청나게 심했던 남자였어.
“못 내려요.”
그럼에도 이연은 다시 한번 강경하게 말했다.
권채우는 붉게 부어오른 이연의 이마를 슥 보더니 잠자코 차문을 닫았다.
그리고 반대편 차문이 열렸다.
* * *
“원장 선생님―!”
“규백아!”
차가 본채 앞에 멈추자마자 저 멀리서 우다다다 규백이가 뛰어왔다.
이연은 재빠르게 아이의 머리카락부터 얼굴, 팔, 다리, 반팔 너머로 드러난 피부의 상태까지 훑어 내려갔다.
옷이 좀 얇다는 것 빼고는 청결부터 표정까지 나무랄 데가 없었다. 놀랍게도 화이도에 있을 때보다 신수가 훤해졌고, 살까지 붙은 듯했다.
이연은 고생했을 아이를 꽉 부둥켜안아 줄 심산으로 팔을 벌렸다.
그런데 끼이익― 운동화 밑창을 긁으며 규백이가 멈추어 섰다.
“왜 그래, 규백아?”
“…….”
얼떨떨해 보이는 아이의 상태가 조금 이상해 보였다. 두 사람은 침묵 속에서 서로를 탐색하고 있었다.
“어……. 어…….”
규백이는 과부하에 걸린 듯 머뭇거렸다.
“규백아?”
“…….”
“이리 안 오고 뭐해?”
재촉을 했음에도 규백이는 그저 얼음이 된 듯 몸을 삐걱삐걱 흔들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이연이 먼저 다가서자 이번에는 손바닥까지 내보이며 뒷걸음질을 치는 것이다.
무언가 심상찮음을 느낀 그녀가 아이의 표정을 어떻게든 읽어보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
“혹시 어디 불편해? 다친 데라도 있는 거야? 선생님한테는 말해도 돼.”
“……잠깐 개가 됐었습니다.”
“뭐?”
“잠깐은 닭도 됐습니다.”
“…….”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되지? 이연은 휘몰아치는 아이의 고백에 숫제 얼이 빠졌다.
한편, 규백이는 원장 선생님의 배 어딘가를 바라보며 까만 두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눈썹에 힘을 주었다가, 입술을 동그랗게 말기도 바빴다. 평소의 규백이를 떠올려 본다면 이건 아주 격렬한 반응이었다.
잠깐 다른 생각에 빠져있던 이연은 이윽고 심각한 낯을 한 채 물었다.
개와 닭을 거쳤다면…….
“지금은?”
여기서는 곤충이라는 말이 나와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지금은 곤충 말고 원숭이로 완전히 갈아탈 생각을 합니다.”
“뭐?”
이연의 눈이 잘게 흔들렸다.
“올빼미 원숭이는 영장류를 통틀어 가장 좋은 아빠입니다. 자식에게 먹이를 주고 함께 놀아줍니다. 새끼가 태어나면 거의 모든 육아를 수컷이 담당합니다. 나는 어리지만 똑똑한 원숭이입니다.”
“……!”
갑자기 이게 무슨 말이래?
이연은 뒤늦게 차에서 나온 권채우를 향해 눈을 치떴다.
이곳으로 오는 내내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이연의 손만 주구장창 잡고 있던 남자였다.
피가 통하지 않으니 놓아 달라 했을 땐, 도리어 다른 쪽 손을 요구한 끈질기고 경우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화가 난 얼굴이 무서워 찍소리도 못했었는데.
“이거 어떡할 거예요!”
느릿하게 걸어 나오던 권채우가 이연의 날 선 비난에 눈썹을 꿈틀거렸다.
“곤충을 안 한다니,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게 틀림없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