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6화 (117/158)

#116

권채우는 지끈거리는 눈가를 누르고 있던 손을 치우고, 홀린 듯 고개를 돌렸다.

부드러운 밀색의 밀짚모자, 상의와 하의가 연결된 넉넉한 점프슈트 작업복, 나무 기둥 하나하나를 쓸어보는 애틋한 손길, 떠나기 아쉽다는 듯 그 근처를 오래 서성거려보는 걸음. 

그러다 바닥에 떨어진 나뭇잎 몇 장을 주워 입으로 훌훌 불고 있는 한 여자. 

이 넓디넓은 정원에서 그렇게 단 한 사람만이 시야에 박혀들었다. 

‘이게 대체…….’

동시에 지독히도 잘못된 그림 같았다. 

이 더러운 곳에 어떻게 저 사람이 있어. 

팔걸이를 쥐고 있던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바짝 들어갔다.

그러나 이것도 환각일 뿐이겠지. 단지 새로운 겹의 파문일 것이다. 꾸벅꾸벅 졸기만 하는 소이연에서 생동하는 그녀로. 하나에서 여러 개로. 그렇게 점점 물결이 늘어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하.”

권채우는 거칠게 날뛰는 속을 억누르며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지만 뒷머리가 베이는 이 싸늘한 본능을 도무지 무시할 수 없어서. 결국 핸드폰을 꺼내들어 전화를 걸었다.

―예, 도련님. 

“며칠 전에, 내 별채에 가둬뒀다는 손님이 대체 누구야.”

―…….

수화기 너머가 조용했다. 권채우는 어금니에 힘을 준 채 주먹으로 이마를 짚었다. 몇 초 안 되는 이 짤막한 침묵조차 안달이 났다. 

“범희야, 나한테 의도적으로 감춘 게 있다면 그만한 각오는 했길 바란다.”

―……이규백 군입니다.

“뭐?”

그의 동공이 멍하게 풀리는가 싶더니 이내 온 얼굴이 와락 찌푸려졌다. 예상치 못한 이름은 도리어 발목에서부터 치감아오는 불길한 예감을 닮았다. 시끄럽던 머릿속이 순간 발화되듯 일직선을 따라 빠르게 타들어가다 어느 결론에 다다랐다. 

씨발, 그가 욕설을 내뱉으며 거칠게 의자를 밀어 젖혔다. 

“진짜 다른 여자한테 한눈 잘 파시네요.”

그때, 아직 자리를 벗어나지 않은 맞선 상대가 권채우를 막아 세웠다. 

“버젓이 예의를 차려야 할 상대가 눈앞에 있는데도 다른 여자 뒤꽁무니만 아주―”

“뭐라고 했어?”

돌연 권채우가 우뚝 굳어 형형한 낯으로 물었다. 

“다른 여자?”

“네?”

사람을 창호지처럼 뚫어버리는 눈빛에 여자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방금 뭐라고 했냐고.”

“…….”

“그쪽 눈에도 저게 보인다는 거야?”

권채우는 살벌한 시선은 그대로 둔 채 팔만 쭉 뻗어 정원 어딘가를 정확히 가리켰다. 단순한 질문과 상황인데도 여자는 이상하게 혀가 굳고 긴장이 됐다. 

그녀는 파르르 떨고 있는 남자의 검지 끝을 따라 눈길을 돌렸고, 그곳에 서 있는 사람을 보며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무심하다 못해 무례하기 짝이 없던 권채우의 표정이 대번에 창백해졌다.

“……의자에 앉은 여자는 안 보이고, 저건 보인다고.”

“대체 왜 그래요?”

여자는 권채우의 얼굴이 시시각각 변하는 것을 코앞에서 목격했다. 넋이 나간 듯 얼이 빠졌다가도, 이를 악물고 숨을 들썩였다. 그러다 미아 같은 얼굴로 정원 어딘가를 더듬으며 입술을 뭉개듯 짓씹었다. 

그렇게 아슬아슬한 침묵이 내려앉은 찰나, 가만히 굳어있던 권채우가 마침내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디 가세요……! 내가 먼저 가야 모양이 그럴 듯해지는데!”

그러나 사람을 메칠 기세로 달려가는 그의 모습에 여자는 “히익……!”하며 흠칫 몸을 떨었다. 

권채우는 곧장 정원을 가로질렀다. 그녀와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터질 듯 뛰고 피가 세차게 돌았다. 평소 몸을 혹사하는 운동과 격투에도 호흡 한번 흐트러지지 않던 남자가 지금은 턱 끝까지 숨이 차올랐다. 

이연은 일렬로 정갈하게 심어진 나무를 따라 걷고 있었고, 권채우는 수천 번도 넘게 덧그렸던 인영을 보며 턱에 힘을 주었다. 

그녀와의 거리가 점점 좁혀들수록 소이연의 냄새가 났다. 언제나 잠만 자고 무색무취했던 신기루에게선 결코 느낄 수 없었던, 그야말로 살아있는 냄새였다. 머릿속이 텅 빈 것처럼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때였다.

이연의 모자가 남자보다 앞서간 바람 때문에 홀라당 벗겨졌고, “앗―!” 소리를 내지른 그녀가 시원해진 머리를 더듬으며 뒤를 돌았다.

“……!”

“……!”

권채우는 제 쪽으로 날아온 밀짚모자를 붙잡은 채 뻣뻣이 굳어버렸다. 

치마처럼 펼쳐졌다 한쪽 얼굴에 착 달라붙는 머리카락, 새하얀 이마, 시냇물처럼 반짝이는 눈망울이 차례로 권채우를 향한 순간. 

카메라 셔터를 누르듯 그렇게 모든 순간을 삼킨 남자는 이내 온몸이 참을 수 없이 욱신거려 인상을 찡그리고 말았다. 

“……왜.”

꽉 틀어 막힌 목에서 가까스로 나온 소리는 엉망이었다.

“……왜 네가 여기 있어.”

간신히 짜낸 말이란 게 고작 그거였다. 

함부로 감싸 쥐고 싶은 이연의 뺨에 자신은 시선을 거둘 길이 없는데, 그녀는 누가 봐도 딱딱하게 굳어 뒷걸음이나 치고 있었다. 

제가 한 짓을 떠올려본다면 그런 취급도 퍽 당연한 것이었지만, 권채우는 초조함을 이기지 못하고 이연의 손목부터 잡아당겼다. 

사랑을 부르짖던 그녀의 눈동자는 낯선 타인을 보듯 건조하기 그지없었다. 이별한 시간은 기껏해야 한 달이었을 텐데, 벌써 그녀 안에 자신의 자리가 사라진 것 같아 기분이 죽을 만큼 불쾌해졌다. 실제로 움직이고 있음에도 이쪽이 더 신기루 같았다.

어울리지 않게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화이도에 있어야지, 그 섬을 나오지 말았어야지.”

“…….”

“대체 여기가 어디라고―”

화를 억누른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왜 네가, 여기에 있어!” 

커다랗게 터진 노성이었지만 그 끝이 여러 갈래로 갈라져 나왔다. 권채우는 끔찍하다는 듯 숨을 몰아쉬며 그녀를 다그쳤다. 일견 매서워 보이는 시선 안에는 설명할 수 없는 온갖 것들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겁도 없이 발을 들여.”

“…….”

“넌 여기 있으면 안 돼. 뭣도 모르고 여기에 있다간……”

머리끝까지 확 치솟은 열 때문인지 급작스럽게 현기증이 밀려들었다. 

평생 나무나 만지고 살았을 순진한 그녀가 권 가(家)에 들어왔다는 가정만으로도 간담이 서늘해지는데, 수많은 사람들의 피로 일궈낸 이 땅에 그녀가 멀뚱멀뚱 서 있으니 도저히 여유를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당분간은, 일이 마무리되기 전까지는 안 돼.”

권채우는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이연의 양 어깨를 강하게 내리눌렀다. 여기서 나가, 돌아가, 그런 거부와 배척을 담은 눈빛이 폭우처럼 쏟아졌다. 

그러자 한 차례 움칫거린 이연이 유순한 눈매에 강강히 힘을 주고, 남자의 손을 홱 치워버렸다. 고작해야 간지러울 수준의 악력인데, 우습게도 권채우는 휘청거렸다. 처음 맞닥뜨리는 생경한 눈초리가 남자의 속을 또 한번 긁었다.

“귀찮으니까 설명은 권기석 씨한테 들으세요.”

“……뭐?”

“제 고용주거든요.”

“…….”

“오는 길에 대충 설명은 들었어요. 이집 막내 도련님이시라고.”

……이게 대체 다 무슨 말이야.

“이집에서 제일 성격이 나쁘니까 알아서 조심하라던데요. 딱히 마주칠 일은 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잘 부탁드립니다.”

권채우는 그녀가 내뱉는 말들을 이해해보려 미간을 찌푸렸으나, 여전히 잘못 맞춘 채널에서 흘러나오는 우스갯소리 같았다. 

그렇게 반쯤 멍한 정신으로 단순히 그녀의 입술만 쳐다보고 있는데― 

“한 달 동안 이집 정원 관리를 맡게 된 나무의사 소이연입니다.”

“……!”

끝까지 사람 속을 뒤집어놓는 소이연의 인사말 때문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턱을 무작스레 다물고 그녀의 말을 파헤치고 있자니 돌연 눈 안쪽에 불이 붙었다. 그녀가 태연히 손을 내미는 순간엔 사나운 헛웃음마저 터졌다. 

수줍음이 많아 자주 놀라고, 자주 당황하던 여자가 아니라, 나무에 한해서는 까탈스럽고 엄격했던 나무의사 소이연. 

그 무정한 얼굴이 예고도 없이 들이닥치자 별안간 바닥을 알 수 없는 허기가 밀려들었다. 

권채우는 눈앞에 내밀어진 작고 말간 손을 차라리 와작 물어버리고 싶었다. 

담배를 빨아들인 것도 아닌데 식도가 벌겋게 타들어간다. 주먹을 한번 쥐었다 편 그가 이연의 손을 강하게 마주잡았다. 

“아니요, 그거 말고.”

“뭐?”

“제 모자요.”

“…….”

“제 모자 주세요.”

꼬물꼬물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이연이 재차 손바닥을 팔랑거렸다.

“제가 아끼는 거라서요.”

그에 권채우는 쥐고 있던 모자를 꽉 우그러뜨렸다. 이연은 펄쩍 뛰며 그의 손등을 찰싹 때렸고, 납작 짜부라진 모자를 있는 힘껏 잡아당겼다. 

그녀는 되찾은 밀짚모자를 그러안은 채 고개를 꾸벅 숙였다. 미련 없이 등을 돌리는 모습이, 씩씩하게 나아가는 걸음이 홀로 남은 권채우를 초라하게 했다.

“…….”

이연 씨, 나예요. 나 돌아왔어요. 내가 당신의 채우예요. 그런 조악한 말들이 영악하게 튀어 올랐다. 전부 다 기억이 났어요. 왜 나를 못 알아봐요. 남자의 눈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가 멈춰있는 사이, 이연은 점점 더 멀어져갔다. 

여기서 그만둬야 한다고, 마땅히 그래야만 하는 숱한 이유들이 그를 막아 세웠지만, 권채우는 기어이 벌어진 거리를 단숨에 따라잡았다. 그가 이연을 거칠게 돌려세웠다.

“……어딜 가!”

이연은 붙잡힌 어깨가 아파 인상을 옅게 찡그렸다.

“여기에 네가 갈 데가 어디 있다고 그렇게―“

“오늘 입주했고, 일할 준비 할 거예요.”

“그거, 그만 둬.”

권채우가 신경질적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여긴 내 집이고, 나는 매일매일 네가 돌아다니는 꼴 볼 생각, 추호도 없어.”

순간, 이연의 눈이 묘하게 홱 돈다 싶더니 씩씩거리며 그에게 이를 드러냈다.

“네가 뭔데!”

“……!”

“나보다 조, 좆도 어린 게!”

이연은 후다닥 도망치듯 뛰어갔다가, 지레 깜짝 놀라 천천히 걸었다가, 다시 경보를 하는 이상한 달리기를 하며 순식간에 멀어져갔다. 

권채우는 뺨 어딘가가 부어터진 듯 얼얼해졌다. 환영은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귀신에 홀린 듯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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