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5화 (116/158)

#115

장범희가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맞닥뜨린 건 권채우의 맨 등이었다. 

새벽녘 늦게 들어온 그는 상의를 벗은 채 페럴렛바 위에서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있었다. 

본디 무언가를 소유하는 일에 일절 관심이 없는 권채우의 방은 언제 봐도 호텔처럼 단조롭고 깨끗했다. 장범희는 익숙한 듯 새로 슈트를 꺼내 다가갔다. 

“도련님, 지금 삼화리조트 배은주 씨가 기다리고 계십니다.”

“걔가 왜.”

“권 이사님께서 약속을 잡았습니다.”

“그게 오늘이야?”

“예, 준비하고 나가셔야 합니다.”

권채우가 공중에 뻗고 있던 다리를 가뿐하게 내리며 일어섰다. 

“내가 어떻게 굴지 뻔히 알면서도 이 짓을 계속한다 이거지.”

그는 심드렁하게 와이셔츠에 팔을 끼우며 단추를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오늘도 소파에서 잠이 든 소이연을 빤히 쳐다보았다. 햇살을 고스란히 맞으며 엎드려 자고 있는 여자. 볼이 눌려 붕어처럼 통통해진 입술, 부채모양으로 흐트러진 긴 머리카락, 엑스자로 겹쳐진 발바닥. 그는 계속되는 헛손질에도 텅 빈 소파를 집요하게 더듬었다.

“도련님, 저번처럼 계속 잠을 안 잘 수는 없습니다.”

그때, 권채우의 안색을 습관적으로 살피던 장범희가 단호하게 말했다.

“알아, 그러니까 빨리 끝내야지.”

“……혹시 필요하시면 말씀해주십시오.”

“뭘.”

“여자 말입니다.”

“여자?”

그제야 고개를 돌린 권채우가 거울 속에 비친 장범희를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뭐라도 해 봐야 되지 않겠습니까. 침실에 여자가 필요하신 거라면―”

“그만.”

그가 낮은 목소리로 주의를 주었지만 장범희는 기어코 말을 끝맺었다.

“제가 다른 여자라도 들여보내겠습니다.”

피식 웃음을 흘린 권채우는 메려던 넥타이를 던져버리고 장범희에게 다가섰다. 그리고 그의 뒤통수를 터트릴 듯 꽉 쥔 다음, 손등으로 가볍게 뺨을 쳤다. 경고성이 담긴 짤막한 손짓이었다.

“내가 아무 베개나 끌어안고 자면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아?”

“죄송합니다.”

“입, 조심해.”

낮게 깔리는 목소리에 장범희가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혹시 이연 씨가 들으―”

그때, 자연스럽게 말을 잇던 권채우가 흠칫 등을 굳혔다. 덩달아 멈칫한 장범희도 내리고 있던 턱을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예기치 않게 흘러나온 이름에 혀가 데인 듯한 얼굴이었다. 

이내 권채우는 입을 꾹 다물고 들고 있던 옷을 마저 갖춰 입었다. 스리피스 중 조끼의 단추를 잠그는데, 별안간 숨결이 거칠어지더니 신경질적으로 옷을 벗어던졌다. 그는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눈을 감았다. 미간에 그어진 선명한 금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 아슬아슬한 모습을 지켜보던 장범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소이연 씨랑은―”

단순한 이름 하나에도 권채우의 고개가 재깍 이쪽을 향했다. 

“그대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까?”

“…….”

칼날처럼 예리한 시선이 장범희의 입술을 잡아 뜯듯이 응시했다. 그는 묵묵부답하며 대충 재킷을 걸쳐 입었다. 방을 나서기 전, 남자는 텅 빈 소파를 눈으로 더듬었다. 

“끝났지, 내가 작살을 내고 왔으니까.”

악연인데, 그래서 여지도 남기지 않고 끊고 왔는데. 

문제가 있다면 그는 더 이상 관찰자가 아니었고, 모든 순간을 기억하는 한 여자의 남편이 ‘종종’ 되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행복했던 시간을 끊임없이 되풀이하고, 그녀의 미소를 되새김질하면서. 하지만 좋았던 시절만큼이나 그녀를 상처주고 짓밟았던 말까지도 덩달아 함께 끌려 나왔다.

젖은 풀냄새가 아니면 코끝을 스치기만 하는 향수에도 속이 뒤집혔고, 이유도 없이 울컥울컥 화가 치솟다가, 나무나 꽃만 보면 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권채우는 이 걷잡을 수 없이 끓어오르는 감정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습관처럼 혀끝을 깨물고 비릿한 피를 빨았다.

“……내 선택은 틀린 게 아니어야 해.”

피곤한 듯 콧대를 꾹 누른 그가 허스키하게 읊조렸다.

 * * *

끝도 없이 너르고, 초록 일색인 정원에 놓인 하얀색 티 테이블. 

어깨까지 내려오는 웨이브 머리에 우아한 진주 귀걸이, 그리고 아이보리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팔짱을 낀 채 권채우를 자못 불만스럽게 쳐다보고 있었다.

“살아있었네요?”

“…….”

“원래 이 자리가 2년 전 약속이었던 거 알아요? 살다 살다 2년 동안 바람 맞는 건 처음이라서, 대체 어떻게 생긴 놈이길래 이렇게 콧대가 높나 했더니―”

권채우를 샅샅이 훑은 여자는 별안간 흡족한 듯 웃어보였다.

“그동안 어디서 뭘 했길래 아무도 행방을 몰라요?”

“…….”

즐겁게 재잘거리는 소리에도 남자는 묵묵부답이었다. 주머니에 한쪽 손을 꽂고 정원을 가로질러왔을 때부터, 무심하게 의자를 당겨 앉았을 뿐 이쪽으로는 조금도 시선을 주지 않았을 때부터. 

여자는 권채우가 이 자리에 아무런 흥미도 없다는 걸 알아차렸다.

몇 년 전, 질 나쁜 자제들과 어울려 논다는 소문이 파다했을 무렵, 그와 마주친 건 우연이었다. 인사불성이 된 지인들 사이에서 홀로 또렷한 눈빛으로 서 있던 남자. 그리고 휘청거리며 부대껴오는 지인을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툭 밀어 넘어뜨렸을 때. 눈이 마주쳤었나. 

들킨 사람은 권채우일 텐데 정작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건 그녀였다. 남자는 끝까지 태연자약하게 지인의 어깨와 손을 밟고 지나갔고, 엎어진 이가 내지른 비명에는 나직이 웃기까지 했다. 

오래 전의 일인데도 그 부도덕한 미소가 밤새도록 잊히지 않았다.

“그렇게 입 다물고 있으니까 별의별 소문이 다 돌죠. 욕심 많은 사람들은 권 가(家)랑 어떻게든 줄을 대고 싶어 해요. 아들이 넷이나 있는데도 아무도 결혼을 안했으니까 죽어나는 건 나처럼 부모 등쌀에 못 이기는 애들이라구요.”

그녀는 으리으리한 고택을 죽 둘러보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권채우 씨는 나한테 뭐 궁금한 건 없어요?”

남자는 의자 팔걸이에 팔꿈치를 대고 다소 흐트러진 자세로 턱을 괴었다. 어슷하게 기울어진 시선은 초면인 여자만 비껴갔을 뿐, 다른 무언가를 열렬히 쳐다보는 중이었다. 

권채우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거기엔 텅 빈 의자 하나가 있었고, 그녀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자리에서 슬쩍 엉덩이를 뗐다.

“제가 그쪽으로 자리 옮길까요?”

“그대로 앉아.”

“네?”

“쓸데없이 부산떨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

고압적인 말투에 그녀는 다시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권채우는 명령 아닌 명령을 하는 순간에도 결코 눈길을 떼어 주지 않았다. 

여자는 슬슬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밖에 나가 갑질을 하면 했지, 싸가지 없는 미남 비위나 맞추라고 좋은 수저를 쥐고 태어난 게 아니다. 

“내가 여기 박차고 나가면 뭐라고 떠들어댈 줄 알고요? 코카인 때문에 재활 센터에 들어갔다느니, 뺑소니 사고 내고 정신 병원에 숨었다느니, 얼마나 말이 많았는데. 수국제약도 이제 주가 떨어질 때 됐잖아. 나도 거기에 말 보탤 수 있어.”

그러자 권채우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텅 빈 의자를 바라보는 그의 눈매가 문득 누그러졌다.

“맞아.”

“뭐가?”

그녀도 반말로 응수하며 표독스럽게 눈을 치떴다.

“병원에 있었던 거 맞다고.”

예상치 못한 수긍에 그녀가 당황하여 입을 벙긋거렸다.

“……무슨 병원이요?”

“섬에 있는 병원.” 

“……거, 거기서 뭐했는데요?”

“의사 말로는 내가 꽃을 잘 꽂았다고 하던데.”

“……!”

꽃을 꽂아? 어디에? 설마 머리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미간에 힘을 준 여자가 침을 삼켰다. 목소리는 조금 더 공손해졌다.

“……입원해 있었어요?”

“묶여 있었어.”

“……!”

“손도, 발도, 목도. 사람을 꼼짝도 못하게.” 

그녀의 눈이 함지박만 하게 커졌다. 중증 환자였구나. 안 되겠다, 이대로 파하자. 미친놈과는 엄연히 해서는 안 되는 게 있는 법이다. 

그러나 예민해 보이면서도 건조한 눈빛, 미간에서부터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높은 콧대, 떡 벌어져 있는 어깨가 너무 아쉬워 괜스레 자리에서 미적거렸다.

“……병원에는 왜 들어간 건데요?”

“머리가 곤죽이 되서 사람 구실을 못했으니까.”

“…….”

결국 어색하게 웃으며 백을 집어 들었다. 그녀가 튈 준비를 하거나 말거나 권채우는 최소한의 힐긋거림조차 없었다. 

어차피 그의 신경은 처음부터 텅 빈 의자에만 꽂혀있었다. 딴생각을 하는 건 분명한데 집요할 정도로 허공을 훑는 눈빛이 탁하고 이질적이었다. 눈부터 맛이 갔잖아? 

“후……. 가기 전에 하나만 더요.” 

내내 공기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 게 어이가 없어 결국 한소리를 뱉고야 말았다.

“대체 뭘 그렇게 보는 거예요? 거기 뭐라도 있어요?”

“안 보이지?”

“네?”

“저기 앉아서 졸고 있는 예쁜 여자.”

“……!”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은 무섭다. 그녀는 와락 얼굴을 찌푸리고 뒷걸음을 쳤다.

“내가 마음에 안 들면 그냥 싫다고 말해요. 기분 나쁘게 이런 걸로 장난치지 말고……!”

“이게 장난이면 얼마나 좋게.”

그가 한쪽 입꼬리를 비딱하게 끌어올렸다. 누군가의 윤곽을 더듬듯 텅 빈 곳을 바라보는 시선이 질척했다. 그리고 웃는 건지, 찡그린 건지 알 수 없는 얼굴이 마침내 이쪽을 향한 순간이었다.

“내가 심장을 밟고 왔더니, 그 여자는 내 머리를 박살내버렸는데.”

우연처럼 권채우의 시선이 멎었다.

씨발, 저건 또 뭐야? 저 멀리, 익숙한 밀짚모자를 쓰고 나무 밑을 오종종 돌아다니는 한 여자. 

눈을 가늘게 뜬 권채우는 별안간 고개를 젖히고 눈두덩을 덮었다.

“……하아.”

하나로도 모자라 이젠 여러 명이 사람을 미치게 할 작정인가.

그런데…… 왜 저 환영은 졸지 않고 바쁘게 움직이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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