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찻잔을 쥔 이연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됐지?’
화이도의 평화로운 부둣가. 그러나 평소와는 달리 개미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 이곳.
자로 잰 듯 정확하게 가드를 서고 있는 남자들과 날카롭게 와 닿는 권기석의 시선을 제외한다면 정말이지 아무것도 없었다.
미리 청소라도 싹 해 놓은 걸까. 을씨년스럽게 불어 대는 바닷바람마저 오늘은 기세가 약했다. 이연은 어깨를 움츠리며 애꿎은 찻잔만 만지작거렸다.
“추우십니까.”
“……아니요, 섬사람이 이 정도야 뭐.”
그쪽 눈초리만큼은 아니거든요…….
권기석과 통화했던 날, 당황한 그녀가 “규백이 안전부터 확인―”이라고 말하자마자 전화가 끊겼다. 그는 예고대로 1시간 동안 전화를 받지 않았고, 다시 시간이 지나 얼굴이 시뻘게진 이연이 “당장 규백이 목소리부터 들려 달라고요, 지금 당―” 전화는 또다시 끊겼다.
그렇게 3시간을 허비하고 나서야 “이럴 거면 만나서 얘기해요!” 냅다 내지른 말에 그가 단조롭게 수긍하며 이렇게 마주 보게 된 것이다.
“채우랑 그렇게 헤어지게 된 건 유감입니다.”
예상치 못한 시작에 콜록, 콜록, 그녀가 기침을 터트렸다.
“얼굴을 보니 우리 집안과는 다시 상종도 안 하려고 했던 모양입니다.”
“그, 그랬었죠.”
순순한 대답에 권기석은 눈썹을 조용히 올렸다.
“……됐어요, 권채우 씨 얘기하러 나온 거 아니에요.”
이연은 차를 마시는 척 어떻게든 표정을 숨기고 싶었으나 집요하게 달라붙는 시선에 결국 달그락, 큰 소리를 내며 찻잔을 떨구듯 내려놓았다. 손목에서 힘이 빠져 버린 탓이다.
“규백이요, 다친 데 하나 없이 그대로 돌려보내 주세요.”
“직접 데려가십시오.”
“네?”
“소이연 씨가 직접, 찾아가라고 했습니다.”
“…….”
그녀가 경계 어린 시선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곧장 대답하지 않는 태도가 제법이라 생각했던지 그의 입매가 슬쩍 올라갔다.
얇은 안경은 권채우의 혈육답게 우뚝 솟은 콧대에 걸쳐져 있었다. 깔끔하게 넘긴 머리와 완벽한 모양을 이루는 이마, 그리고 스리피스 슈트를 빈틈없이 갖춰 입은 곧은 자세는 아무리 봐도 젊고 이지적인 교수나 다름없었다.
“만약 오지 않으면 아이는 개집에 처박아 둘 겁니다.”
“……네?”
이연은 제 귀를 의심했다.
“그렇게 놀랄 거 없습니다. 가문에서 사적으로 운영 중인 인재 육성 기관쯤 됩니다.”
“……그 개집, 이라는 곳이요?”
“어렸을 때부터 인간성을 제거하고 말 잘 듣는 엽견으로 키우려는 겁니다.”
“무, 무슨…….”
이연은 본능적으로 온기를 찾아 찻잔을 그러쥐었지만, 이미 훈김은 차갑게 식어 버린 상태였다.
“우리는 항상 인력이 부족해서 사람 하나하나가 아깝습니다. 그런 나한테서 일 인분의 쓸모를 빼내 가야겠다면, 당연히 그에 준하는 노동력과 맞바꿔야 하는 게 아닙니까.”
“…….”
“그러니 다시 묻겠습니다. 소이연 씨는 나한테 무엇을 줄 수 있습니까.”
묘하게 번뜩이는 그의 눈을 보며 이연은 불현듯 2년 전을 떠올렸다.
그때에 비하면 이곳은 어둡지도 않고 폐쇄된 장소도 아니었으며 동물의 사체나 피 냄새도 없었다. 오로지 소금기가 섞인 바닷바람과 간간이 들리는 갈매기 소리뿐이었다.
그럼에도 긴장에 취약한 심장은 쉴 새 없이 쿵쾅거렸다. 언제나 어둠 속에서 어슴푸레하기만 했던 권기석의 윤곽이, 어울리지도 않는 햇볕 아래 두드러져 보였기 때문이다.
“한 달간 그 아이에게 공을 들이고 있었으니, 똑같은 시간으로 받겠습니다.”
“…….”
“소이연 씨는 한 달간, 저에게 무엇을 주시겠습니까?”
한 달 후, 화이돔 프로젝트가 끝나는 날. 권기석은 정재계 인사들과 투자자들을 초대하는 기념식에 소이연을 파트너로 데려갈 생각이었다.
남자는 그 꿍꿍이속을 드러내지 않은 채 태연히 안경 너머를 주시했다.
안절부절못하는 여자가 내뱉을 말은 어차피 정해져 있었다. 이를테면 ‘제가 어떻게 하면 되나요?’와 같은.
소이연처럼 소심하기 짝이 없는 타입은 조금만 겁을 주면, 조금만 몰아넣어 주면 금세 수동적으로 굴곤 했다.
“이번에는 좋은 말로 하니까 바로바로 생각이 안 납니까?”
찻잔을 쥐려던 이연의 손이 죽 미끄러졌다.
심리적 압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규백이는 개집이 아니라, 화이도에서 뛰어놀며 자라야 했고, 훗날 제 아이의 유일한 형제가 되어줄 존재였다. 이연은 후들거리는 무릎을 꽉 쥐고 그를 노려보았다.
더 이상 어영부영 휘말리는 건 이쪽에서 사절이었다. 그러니까, 저쪽에서 무리한 걸 요구하기 전에, 먼저 선수를 쳐 버리는 거다.
“권기석 씨 같은 사람들이 사는 곳은 분명 부지가 어마어마하게 넓겠죠.”
원하던 대답이 아니었던지 남자의 미간에 미세한 금이 그어졌다.
“부자들의 상징은 당연히 정원일 테고요. 알고 계실지 모르겠는데, 제가 화이돔 프로젝트에 4차까지 올라갔던 나무의사예요. 당연히 제가 드릴 수 있는 노동력은 수목 관리구요. 싸게 잘해 드리겠습니다.”
“…….”
“……표정이 왜 그러세요?”
이연은 고개를 돌려 헛숨을 내뱉는 남자의 옆모습을 보며 물었다.
“아닙니다.”
투명한 렌즈 너머의 매서운 눈이 설핏 풀어진 듯도 보였다.
“그럼 규백이는 건드리지 않기예요.”
그녀의 다부진 말에 권기석의 눈매가 일순 가느다래졌다.
“개집이니 뭐니, 그런 곳에 두지 마세요. 좋은 방에서 좋은 음식 먹을 수 있도록 해 주세요. 아마 새로운 환경에서 스트레스 많이 받을 거예요. 민폐 끼치는 애는 아니니까 가능하다면 너그럽게 봐주세요.”
“…….”
“나중에 제가 확인했을 때, 규백이 몸에 멍이라도 들어 있기만 해, 해 봐요.”
권기석은 분명 겁에 질렸으면서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 구는 이연이 거슬렸다.
특히나 저 눈빛. 지킬 게 있는 여자의 눈은 언제 봐도 신물이 났다. 그는 미묘하게 좁혔던 눈가를 펴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게 끝이에요?”
그때 이연이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이쪽의 눈치를 살펴 왔다.
“저번처럼 계약서 쓰셔야죠. 제 급여, 업무 내용, 근무 시간, 휴일, 여기서 다 조율하고 가, 가세요.”
“…….”
“권기석 씨도 이번에는 대낮에, 야외에서, 좋은 말로 협박, 아니 협상하니까 머리가 바로바로 안 돌아가나 봐요. 이래 가지고 제가 어떻게 믿고 사인할 수 있겠어요.”
언제부터 저렇게 간이 커졌지? 채우가 단련시킨 건가? 권기석은 쓸데없이 떠오른 생각을 지워내며 턱을 기울였다.
“내가 소이연 씨를 해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얼마든지요.”
권기석의 입가에 짧은 웃음이 맺혔다 사라졌다.
“소이연 씨는 아마 짐작도 못 할 겁니다. 내가 얼마나 고마워하고 있는지.”
“……네?”
“윤주하를 내게 데려와 줬으니까.”
“……!”
이연이 흠칫 놀라 상반신을 떨었다. 그건 그녀를 송곳처럼 찌르는 아픈 이름이어서.
“윤주하…… 씨요? 어머니요?”
그러자 권기석이 처음으로 소리를 내 웃음을 터트렸다. 그 나직하고 짤막한 울림에는 시뻘건 조소가 섞여 있었다.
그 감정이 너무나 선명해서, 이연은 마치 군중 앞에서 창피를 당한 듯한 기분이 들고 말았다.
뱀 껍질처럼 서늘하기만 했던 남자가 내뱉는 진한 대소라니. 이연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 헛소리를 채우 말고 다른 사람한테 들을 줄은 몰라서.”
“네……?”
“윤주하는 유괴범입니다.”
“……!”
달그락, 찻잔을 잘못 건드리는 바람에 뜨거운 액체가 흘러넘쳤다.
“채우랑은 전혀 상관없는 남입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그렇게 말하는 권기석의 얼굴은 결벽적일 만큼 딱딱했다. 높낮이가 극단적으로 부족한 말투였지만 어금니에 씹혀 나오는 말들이 사나웠다.
이연은 렌즈 너머의 시선을 차마 마주 보지 못하고 테이블 어딘가로 눈길을 떨어뜨렸다.
대체 권채우는…….
‘이연 씨, 나는 입 밖으로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싫어요.’
가짜 엄마에, 가짜 아내. 거짓말이 드러나고, 믿었던 세계가 벗겨지는 순간을 늘 감당해야 했을 그를 떠올리니 불현듯 가슴 언저리가 따끔거렸다.
“악기 선생님이었던 윤주하가 내 막냇동생을 첼로 가방에 넣어 달아났습니다. 그 여자를 철석같이 믿고 동생을 보여 줬던 게 내 실책이라면 실책이겠죠. 윤주하를 다시 만난 건 그로부터 십 년 후였는데, 그때 내가―”
갑자기 말을 멈춘 그가 완벽한 매무새로 묶여 있던 넥타이를 조금 느슨하게 끌렀다.
“소이연 씨한테 얼마나 감사했는지, 당신은 감히 상상할 수 없을 겁니다.”
때마침 새가 지나가는지 두툼한 그림자가 권기석의 얼굴을 가로질렀다.
그러나 이연은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가 없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2년 전 식물인간 건으로 협박을 당했을 때부터 그녀는 권기석의 은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을 드럼통에 넣겠다느니, 진범으로 만들겠다느니, 협박을 했다는 건…….
이연이 하얗게 굳은 얼굴로 저도 모르게 물었다.
“대체……, 바라는 게 뭐예요?”
그건 첫 만남 때부터 지금까지, 내내 의뭉스럽기만 했던 권기석의 태도를 꼬집는 말이었다.
기어이 그녀를 협박해 권채우를 맡게 하더니, 어느 날은 이연의 거짓말에 힘을 보태줘서.
“아아―.”
질문의 본의를 파악한 권기석이 드넓은 바다를 바라보며 감정 없이 읊조렸다.
“나는, 채우가 나를 닮았으면 좋겠습니다.”
“……네?”
“우리는 형제니까, 나의 전철을 따라 밟다가 종래엔 내가 되길 바랍니다.”
알듯 말듯 아리송하고 묘한 말이었다. 이연은 조심스레 미간을 찌푸렸으나 더 이상의 부연 설명은 들을 수 없었다.
이윽고 드륵, 의자를 밀며 자리에서 일어난 남자가 별안간 턱을 문질렀다.
그리고 요 며칠, 권채우 생각을 하지 않고 나름대로 잘 지내던 그녀에게 숫제 커다란 폭탄을 던졌다.
“그런데 소이연 씨, 채우가 그쪽보다 네 살이나 어린 건 알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