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네 몸 상태, 정신 상태는 전부 서면으로 받아 봤다.”
“…….”
권채우는 자신과 닮은 얼굴을 낯설게 바라보며 경직돼 있던 목을 뚝뚝 꺾었다.
조금 전 머릿속이 산산이 분해됐다 재조립되면서 느꼈던 극치감은 빠르게 잦아들고 이내 모든 게 따분해졌다.
소이연이 아니면, 기본적인 오감과 취향, 즉각적인 호불호까지 반투명한 비닐에 쌓인 듯 투박해지는 것 같았다.
그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눈앞의 권기석을 짐짓 지루하게 감상했다.
“수면 장애는 여전하고. 기억은 불완전한 건지, 불안정한 건지 모르겠다만. 당분간은 사냥개로 복귀하지 말고, 밀린 사교 활동이나 하면서 놈들이랑 어울려 놀아. 지저분한 현장까지 찍어 오면 더 좋고.”
권기석이 말하는 ‘놈들’이란, 대기업 총수, 혹은 삼선 이상 국회 의원들이 꽁꽁 숨겨 놓은 자식들을 뜻했다.
그들의 약점은 권 가(家)가 습관적으로 수집하는 돌멩이나 마찬가지였고, 공공연히 수국 제약의 망나니 새끼라 불리는 권채우의 위치는 제법 쓸모가 많았다. 겉으로는 같은 부류인 양 흥청망청 어울려 주다, 결정적인 순간 그들의 등을 찔러 언제나 이득을 보아 왔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옷매무새를 만지던 권기석이 흘끗 시선을 보냈다.
“소꿉놀이는 그렇게 끝내서 아쉽지 않겠어?”
“그게 무슨 말이야.”
권채우의 눈빛이 서늘하게 식었다.
“낳아주신 부모님한테도 살갑게 군 적 없던 녀석이, 그렇게 납작 엎드려서 아양 떠는 꼴을 본 건 그때가 처음이라서. 시집살이 시키지 말라고?”
다시 생각해도 기가 막혔던지 마지막은 혼잣말에 가까웠다.
“그래서, 짧게나마 목줄 잡혀 본 소감은 어땠나.”
“……몰라서 물어? 좆같았어.”
눈매는 그대로인데 입꼬리만 느긋하게 추켜올렸다. 권채우는 식물인간이 되기 전, 그러니까 소이연과 깊이 얽히기 전의 모습을 그대로 답습했다. 권태롭고 방종했으며 통제 불능이었던 도련님처럼.
“지금도?”
“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뭐야.”
그가 신경질적으로 미간을 좁히자 권기석이 한 발 다가왔다. 엇비슷한 눈높이, 설풍처럼 풍겨 오는 기백. 현미경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동공이 별안간 묘한 빛을 냈다.
“네 머릿속이 궁금하지.”
“의사한테 들어.”
“형은 네 입으로 직접 듣고 싶은데.”
그의 집요함에 권채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저 눈빛―.
익숙하지만 이질적인 형의 눈동자.
갑자기 알고 있던 본관이 하루아침에 바뀌어 권 가(家)에 들어오게 되었을 때. 몹시도 예민하고 공격적인 막내아들을 보며 점점 인내가 닳아 갔던 친부모와 달리, 권기석의 반응은 조금 유별난 데가 있었다.
집안사람들은 밤이고 낮이고 첼로만 끌어안고 버티는 아이가 스톡홀름 증후군에 걸려서 이상해진 거라고 수군거렸지만, 스물다섯의 권기석만큼은 기묘한 눈으로 어린 권채우를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고양이처럼 까만 머리카락, 건드리면 물어뜯을 것처럼 경계하는 얼굴, 작은 손발, 범상치 않은 삼백안까지.
그렇게 집요하리만치 뜯어보면서도 끝까지 시선을 주지 않았던 게 바로 산속에서 가져왔다는 윤주하의 첼로였다.
“채우야.”
어린 채우는 자라고 자라, 어느새 큰형과 눈높이가 같아졌을 때야 비로소―.
“소이연이 정말 끔찍이 싫기만 해?”
겹겹이 둘러싸인 곳에 자리한 권기석의 진짜 눈빛을 읽어 낼 수 있었다.
그건 강렬하고도 설익은 질투였다.
“그 여자가 왜 네 어머니야!”
그가 술병을 벽에 던지자 와장창― 소리와 함께 벽을 타고 누런색 액체가 흘러내렸다.
언제나 깔끔하게 빗어 넘겼던 머리는 흐트러지고 목 끝까지 강박적으로 잠갔던 단추도 엉망이었다. 대리석처럼 반듯한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은 꼭 금이 간 자국을 보는 듯했다.
“호칭, 똑바로 해야지, 채우야.”
간신히 화를 억누르는 듯 떨리는 목소리가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권기석의 그런 드문 모습에도 권채우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막 케이스를 하나를 끝마치고 오느라 맨몸에 들러붙은 검은색 상의, 어깨와 허리선을 조이는 권총 홀스터는 벗지도 못한 상태였다.
권채우가 손등으로 얼굴을 닦자 피부에 죽 그어지는 핏물이 짙었다.
“왜 나한테 거짓말했어.”
“…….”
“즉사였다고, 교통사고로 다 뭉개져서 시체도 못 찾았다고 했으면서. 사실은 이 집안사람들이 내 어머니를 지하에서 어떻게 말려 죽였는지, 형은 다 알고 있었어.”
권채우가 칼날 같은 기세로 그의 멱살을 들어 올렸다.
“아아―. 알고 있었지.”
권기석은 파르르 입가를 떨더니 차분하게 머리를 정돈했다.
친모는 일찍이 신경 쇠약으로 칩거에 들어갔고, 친부는 병세가 깊어 사경을 헤매는 중이었다. 권채우는 끓어오르는 감정을 어쩌지 못하고 현재 이 집안을 떠받치고 있는 후계자에게 권총을 장전했다.
“교복이 잘 어울렸던 그 학생도 알다마다.”
“……!”
“이름이 이연이랬나.”
일순 어깨가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흔들리는 동공을 본 권기석이 느른하게 웃었다.
“그 애가 윤주하를 팔아넘긴 대가로 무얼 받아 갔을까, 채우야.”
왜 여기서 그 여자애가 나와.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권채우가 가진 것 중, 유일하게 비틀리지 않은 것. 희미하지만 어여쁘게 자란 풀 한 포기가 바로 풍경 속의 소녀였다.
부적절한 사람에게 향해 있던 그리움도, 가족들을 향한 분노도, 무언가 꼬이고 잘못된 거라며 정당하지 못한 취급을 받았다.
어디에서도 받아들여지지 못한 마음은 시간이 지날수록 쓰레기장에 파묻힌 칼처럼 녹슬었지만,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살아남았던 게 그 소녀였다. 그런데 왜―.
“죄를 묻고 벌할 사람이 필요해? 그렇다면 네가 겨누고 있는 총에도 순서를 매겨.”
“……수작 부리지 마. 그렇다 한들, 어머니를 말려 죽인 건 네놈들이었어.”
“옷을 잘못 꿰입었다면 그건 첫 단추의 잘못이지.”
“…….”
“채우야, 네가 가장 잘하는 걸 해.”
권기석은 파르르 경련하는 동생의 뺨에 묻은 핏자국을 문질러 닦아주었다.
“살, 살려 줘……!”
권채우는 번들거리는 검은색 우비를 입고 평소 즐겨하던 방식대로 사람을 파묻고 있었다.
제 분노를 어떻게든 밖으로 돌려 보려는 권기석의 시도는 처음부터 빤히 읽혔다.
어차피 어떤 대가를 치르든, 얼마나 오래 걸리든 권 가(家)를 부수겠다는 마음은 불변이었다.
그럼에도 화이도로 내려온 건―.
“제, 제발……! 다 말할게, 다……!”
저를 부추긴 주제에 미행까지 붙여 감시하는 꼴이 우스워서.
그는 꼬리에 붙은 권기석의 수족을 잡아다 뒷산에서 처리하는 중이었다. 흙을 뚫고 올라온 팔이 필사적으로 땅바닥을 긁었지만 그는 가차 없이 구둣발로 내리쳤다.
“틀렸어, 여기선 죽여 달라고 해야지.”
공황 상태에 빠져 허우적대는 놈과 달리, 권채우는 단조의 음을 느릿하게 흥얼거렸다.
표정은 평연하기 그지없는데 발길질은 미친놈처럼 사나웠다. 상대의 손가락은 그대로 와그작, 작살이 났다.
“그아악……!”
흙 알갱이를 머금은 비명이 땅 밑에서 웅웅거렸다.
“네가 이럴수록 나만 더 신나는 거 몰라?”
“으……!”
“너처럼 멍청하고 질긴 새끼들이 가끔씩 튀어나와 주니까, 내가 이 짓을 못 끊어.”
“윽……, 끄윽……!”
그때, 파삭, 하고 미약하지만 이상하리만치 거슬리는 소음이 났다. 그 어떤 요란한 비명보다도 뒷머리를 거칠게 잡아당기는 소리였다.
“씨발, 이건 또 뭘까.”
권채우는 의도적으로 삽을 떨어트리며 수풀 사이를 노려보았다.
“안 도망쳐도 되겠어?”
흠칫 놀라 달아나는 가냘픈 등을 보자 그럴 리가 없는데도 희한하게 입맛이 돋았다.
목격자는 내버려 두면 귀찮아진다. 권채우는 누군가 흘리고 간 전동 톱을 주워 들고는 유유자적하게 따라갔다.
어둠 속에서도 탐스러워 보이는 머리채에 시선을 떼지 못하다가, 더 늦기 전에 첼로 줄로 그녀를 휘감았다.
“……!”
그리고 그녀가 필사적으로 몸을 돌린 순간―.
죽을 때 죽더라도 당신 얼굴은 보고 죽겠다는 결의가 느껴지는, 공포에 잠식됐을지언정 조금도 망가지지 않은 그 눈동자를 보았을 때.
손에서 힘이 풀렸다.
찾았다.
기절부터 시킬까, 아니면 이대로 버둥거리는 걸 둘러업고 끌고 갈까. 어떻게 똑같이 갚아 줄 수 있을까. 일단은 네 입부터 열어야겠지. 그런데 너는 아픈 걸 잘 견딜 수 있을까. 나는 타깃을 한 번도 배려해 본 적이 없는데.
평소에는 하지도 않던 온갖 잡생각들이 두서없이 휘몰아치는 사이, 불현듯 다가오는 인기척에 그녀를 감싸 안듯 움직였다.
이윽고 뾰족한 무언가가 머리를 재차 찧어 댔다. 두피가 찢어지고 뭉개지는 감각이 선연했으나 신기하게도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감기려는 눈꺼풀을 어떻게든 부릅뜨고 여전히 외롭고 순해 보이는 눈망울을 조금이라도 더 보려 했다. 시야가 완전히 암전될 때까지 굳어 버린 그녀의 낯을 보고, 또 보았을 뿐이다.
“소이연이 정말 끔찍이 싫기만 해?”
“…….”
권채우는 무표정하게 형의 눈을 꿰뚫듯이 응시했다.
윤주하와 음악을 잃고 폭력에 심취해 가던 권채우를 부추겨 화이도로 이끌었던 주제에, 미행을 붙여 그와 충돌하게 했던 권기석.
예기치 못한 사고에는 느닷없이 소이연을 협박해 그를 맡겨 두었고, 나중에는 그녀의 거짓말에 힘까지 실어 주었다.
의도를 알 수 없는 그의 변덕스러운 행동은 죄다 앞뒤가 달라 도무지 짐작하기 어려웠으나―
“역시 그 꽃은 미끼였구나.”
권채우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나무보다 훨씬 작고 예뻤던 것. 윤주하가 꽃이라 알려 주었던 소녀의 이름.
그의 의뭉스러운 수작질에 놀아나고 있는 건 소이연인가, 자신인가. 아니면 우리 두 사람 전부인가.
권채우는 텅 빈 방 안을 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너와 함께 살며 너를 사랑하게 된 게 과연 우연이기만 할까.’
쥐고 있던 장미꽃에 힘을 주자 손바닥에 가시가 박혔는지 피가 맺혀 떨어졌다.
권기석의 뱃속을 파헤치기 전까지 소이연은 화이도를 벗어나지 않는 게 안전할 것이다.
그럼에도 문득 타는 듯한 갈증에 질끈 눈을 내리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