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내가 권채우 씨 아, 아내, 거든요.’
그가 눈을 번쩍 떴을 땐 얼음물 속에 잠겨 있다 나온 사람처럼 입술이 새파랗게 질린 채였다. 평균보다 체온이 떨어졌는지 이상하게 몸이 떨리고 추웠다.
살갗에 닿는 공기가 선선한 걸 보니 잠든 새 무더위도 한풀 꺾인 듯했다.
대체 얼마나 잔 거지?
그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손바닥으로 꾹 누르며 오래 쓰지 않아 갈라진 목소리를 내보냈다.
“이연 씨.”
그가 익숙하게 옆자리를 더듬었다. 그러나 손에 잡히는 건 낯선 이불의 감촉뿐, 널찍한 침대에는 저 혼자뿐이었다.
“…….”
멈칫한 남자는 뿌연 머릿속을 정리하듯 천천히 미간을 찌푸렸다. 낯설지만 동시에 익숙한 방안.
이연 씨―. 그가 차가워진 손을 쥐었다 펴며 재차 불러 봤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는 매트리스에 팔꿈치를 지탱한 채 상체를 일으켰다. 느슨하게 풀린 자세만큼이나 몽롱한 동공이 무언의 경계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이연 씨, 나 끔찍한 악몽을 꿨어요. 그가 열없이 피식거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리운 체취를 담뿍 들이마시며 그녀를 바스러지게 껴안고 목덜미를 빨아들이고 싶었다.
정말로 말도 안 되는 꿈을 꿨어요. 그렇게 엄살을 부리며 부드러운 살점을 혀로 마음껏 문지르고 싶었다.
반쯤 감긴 나른한 눈이 꽉 닫힌 문을 향했다. 당장이라도 저 문이 열리고 그렁그렁 눈물을 매단 이연이 쏜살같이 제 품으로 달려올 것 같았다.
그러면 신령목은 잘 회복했는지, 심사가 끝나면 하고 싶다던 이야기는 무엇이었는지, 그녀를 제 다리 사이에 앉혀 두고 경청하고 싶었다. 날씬한 배에는 깍지를 끼고, 조붓한 어깨에는 제 턱을 끼우고 싶었다.
그러나 가습기 소리만 들려오는 이 적막함에 심장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벽지를 새로 도배한 것도 아닐 텐데 나무 병원 특유의 차분한 냄새가 꿈결처럼 사라져 있다.
결국 침대 밖으로 발을 디딘 권채우는 치미는 현기증에도 이를 악물고 일어나 커튼부터 홱 열어젖혔다.
그리고 끝도 없이 보이는 탁 트인 정원은―.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얼굴을 확 일그러뜨리자 대번에 남자의 인상이 달라졌다. 약에 절여진 듯 녹진했던 눈가가 순식간에 복면을 쓴 사냥개처럼 날카롭게 벼려졌다.
이곳은 그의 본가다.
눈앞에서 빛이 명멸하고 머릿속이 잡탕처럼 뒤섞였다. 극명히 다른 두 개의 기억들이 서로 부딪쳤다 튕겨 나가기를 반복했다.
공존해선 안 될 자아가 힘겨루기를 하는 사이, 두통이 밀려들었다. 그는 미간을 좁히며 제 관자놀이를 도구처럼 툭툭 쳐 보았다.
무언가가 생각날 듯 수면이 크게 출렁이는데, 결정적으로 드러나는 건 하나도 없었다.
“…….”
그러다 일순 소강상태가 된 의식에 권채우는 본능대로 움직였다.
정돈되지 않은 머릿속은 일단 제쳐 두고, 당장 급한 것부터, 몸이 찾으라고 그를 충동질하는 것부터, 그렇게 갈증이 이는 것을 향해 발을 움직였다. 두서없이 엎치락뒤치락하는 머리가 아니라, 몸이 기억하는 것을 따라갔다.
거칠게 방문을 열고 나간 권채우는 마침 꽃병에 물을 갈고 있던 사용인을 붙들었다.
“아이고머니나……!”
그는 다짜고짜 유리병을 뺏어 꽃을 잡아 빼냈다. 나이가 지긋했던 사용인은 꽃병의 물을 벌컥벌컥 마셔 대는 키 큰 남자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입가를 따라 흘러내린 물줄기가 턱을 적시고, 한껏 젖혀진 목울대는 위아래로 정신없이 움직였다.
그렇게 꽃병의 물을 전부 마셔 버린 그는 바닥에 유리병을 던지며 물었다. 한 손에 쥐고 있던 꽃다발이 단숨에 우그러졌다.
“나랑 같이 온 여자는 어디 있어요.”
“……네?”
사용인은 잔뜩 얼어붙어 발끝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내 아내 어디 있냐고.”
“그…….”
“세 번 말하게 하지 마세요.”
별채에 있으면서 입단속을 단단히 받은 그녀였지만, 갑자기 귀신처럼 닦달해 오는 모습에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녀는 좁은 어깨를 더욱 옹송그린 채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이, 이 별채는 도련님 혼자만, 사용 중이십……, 아―.”
그녀가 머뭇거린 찰나를 놓치지 않은 남자는 손등으로 턱을 닦으며 고갯짓을 했다.
“앞장서세요.”
“그, 그게……. 그 방은 지금 잠겨 있어서…….”
“뭐?”
“그게, 손님이 자꾸 탈출을 하시려고 해서…….”
권채우의 얼굴이 야차처럼 확 일그러졌다. 수면 기간 동안 살이 내린 이목구비는 한층 더 예리하게 깎여 있었고, 그 탓에 조금만 낯을 달리해도 보는 이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그렇다고 사람을 가둬?”
우드득 말아 쥔 주먹이 하얬다. 이미 머릿속에는 방에 갇힌 소이연이 눈앞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그는 사용인을 인질처럼 앞세워 걸음을 재촉했다.
어두운 복도는 마치 누군가의 배 속처럼 의뭉스러웠고, 발바닥에는 대리석의 한기가 들러붙었다. 그렇게 모퉁이를 돌며 벽에 붙어 있는 거울을 대수롭지 않게 스친 순간이었다.
무표정한 제 눈과 마주친 그 순간.
‘―사랑, 그딴 개소리를 운운하고 싶어?’
총에 맞은 듯 그가 상체를 휘청거리며 멈춰 섰다.
‘지금 여기서, 너와 관련된 기억은 전부 폐기하고 갈 거야.’
거울에 비친 악의적인 얼굴에 한쪽 안면이 곱아들듯 경련을 해 댔다.
‘―네가 무슨 짓을 해도. 너는 절대로, 네 남편을 다시 만날 수 없을 거거든.’
‘사람이 염치가 있어야지.’
‘내가, 널 사랑한다고 정확히 말한 적이나 있어?’
‘정신 똑바로 차려, 소이연. 씹질이 그렇게나 좋았어?’
그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 메슥거리는 독기를 직시했다. 이제는 하다 하다 낮에도 꿈을 꾸나. 아니면 기어이 미쳐 버린 건가.
그러나 환상 같은 목소리는 다름 아닌 자신의 것이 맞았고―
‘나는 애초에 널 파묻을 작정으로 화이도에 온 거야.’
‘한 번 네 목을 졸랐던 사람이 두 번은 못 할 것 같아?’
한번 물꼬를 튼 기억은 소나기처럼 흠뻑 쏟아졌다. 제 손과 발에 누군가의 껍데기가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소름 끼치는 감각. 그건 권채우가 권채우를 끼워 입는 현장이었다.
“……도, 도련님?”
사용인은 별안간 움직이지 않는 그를 의아하게 보았으나, 권채우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죽어라 거울만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가 다칠 줄 알면서도 항공유 속에 내버려 두었고, 심사를 망쳤고, 매달려 오는 그녀를 짓밟았다. 신령목을 베어 버렸고, 마지막에는 광분한 주민들 속에 파묻힌 여자를 보며 비웃기까지 했다.
‘내가 너를, 무슨 수로 견디라고.’
‘보기만 해도 이렇게 치가 떨리는데.’
불완전했던 그가 소이연에게 어떤 악심을 품었으며, 그것을 얼마나 저열한 방식으로 풀었는지.
그 모든 것들이 하나하나 선명했다. 그때의 광경이, 그때의 잔해가, 젖어들던 그녀의 속눈썹 한 올까지, 눈알에 박혀 들었다.
모든 기억이 떠오른 자리에는 흉측한 소름이 물집처럼 일어났다.
“윽…….”
방대한 양의 정보는 계속해서 충돌하며 상대를 밀어냈고, 머릿속은 뜨겁게 끓어올랐다.
그때, 거울 속에서 웬 시커먼 손이 왈칵 튀어나온 건 예상치 못한 환시였다.
“……!”
울었는지 다쳤는지, 실핏줄이 터져 눈이 시뻘게진 백치 권채우가 그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세상에서 가장 처절하고 볼품없는 꼴로, 내내 빛을 보지 못해 인간이 아닌 것만 같은 지저분한 몰골로. 권 가(家)의 막내아들이자 사냥개인 자신을 죽어라 할퀴며 울부짖었다.
한이 서린 악력에 숨이 막히고 목뼈가 기이하게 뒤틀렸다. 우스운 건, 그 백치야말로 진짜 사냥개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맹목적이고 충성스러운 눈빛, 한번 문 건 절대 놓지 않으려는 습성, 주인을 잃고 광견이 된 모습까지. 뚝 끊어진 목줄을 여전히 애지중지 매고 있는 짐승은 퍽 불행해 보였다.
“네가 소이연이랑 뒹굴던 그 새끼구나.”
권채우는 백치의 손목을 붙잡은 채 그것과 눈을 마주했다.
“좆은 한 갠데, 꼭 두 사람분 같아서 안 그래도 기분이 더러웠는데.”
그러자 백치가 으르렁거렸다.
“하나부터 열까지 소이연이 손수 만든 게 너라면―”
소이연의 남편으로 살았던 시간은 고작 한철. 그러나 그 짧았던 여름날이, 권채우의 전 인생을 덮어 버릴 만큼 강렬해서. 권채우는 생각하기도 전에 팔을 뻗어 사납기 짝이 없는 백치의 안면을 손바닥으로 덮어 눌렀다.
“너는 당연히 내 것이어야지.”
질척한 질투와 독점욕이, 설령 그것이 저 자신이라 할지라도 통째로 씹어 먹으라 속삭인다.
백치는 반항하듯 송곳니를 드러내며 얼굴을 흔들었고, 권채우는 더욱더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나무껍질 같은 백치의 피부를 손가락으로 쑤시며 바스러뜨리는데, 돌연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들렸다.
기다렸던 바야.
거울에 쩌저적, 하고 그에게만 보이는 금이 갔다. 별안간 백치 새끼가 기쁘게 웃고 있었다.
찐득한 물감처럼 흐르는 흑발, 그 사이로 드러난 짐승 같은 동공.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제 얼굴이었다. 갈라진 거울을 보며 입꼬리를 길게 찢고 있는 건 백치가 아닌 권채우 자신이었다.
“하아……, 하아…….”
등줄기가 식은땀으로 축축이 젖어 있었다.
온도부터 형태까지 완벽히 달랐던 두 세계가 끝끝내 부스러기 하나 남기지 않고 스며들었다.
백치가 사냥개를, 사냥개가 백치를. 기어이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었다.
“……도, 도련님, 괜찮으세요?”
“아니, 엉망진창이야.”
“혹시 몸이 안 좋으신 거면―”
권채우는 말없이 사용인을 지나쳐 걸음을 옮겼다.
본가에 소이연이 머물고 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혹시나 그가 깨어나지 못했던 동안 무언가 잘못된 거라면―.
복도를 박차고 걸어 나가는 다리가 제 것이 아닌 양 어색하다. 이제와 소이연을 마주한다 한들 서로 좋은 소리는 나오지 않겠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조급했다.
당신 남편이 돌아왔다고 그녀의 무릎에 질릴 정도로 뺨을 비비고 싶다가도, 또다시 가시 돋친 혀부터 나갈 것 같았다.
그러나 그가 손님방의 문을 강제로 뜯고 들어갔을 때,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텅 빈 방을 보며 얼마나 하릴없이 서 있었을까.
“채우야.”
신경을 긁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커프스단추를 매만지며 걸어오던 권기석이 무기질적인 눈으로 그를 훑어 내리고 있었다.
“이렇게 얼굴을 보는 건 한 달만, 아니, 2년 만인가.”
권채우의 눈썹이 미세하게 들렸다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