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하지만 그는 오해하고 있었다. 단지 돈 때문에 윤주하를 팔아 치우듯 넘긴 게 아니다. 이대로 내버려 뒀다간 그녀가 꼭 죽을 것만 같아서 어떻게든 방법을 찾았을 뿐이다. 아들을 만나러 가겠다는 그녀를 도와준 것뿐이라고, 이연은 얼마든지 자신을 변호할 수 있었다.
‘집에 가고 싶어 했던 건 그분이었어요. 그분은 아들이 그리워서 돌아간 것뿐이에요.’
그러나 거기까지 생각을 마쳤을 때, 이연은 문득 뒷덜미가 서걱 베이는 듯했다.
“……!”
그건 저에게만 후련한 말이지 상대에겐 또 다른 고통이 될 수도 있다. 경고처럼 스친 생각에 돌연 혀가 뻣뻣하게 굳었다. 단순히 제 억울함을 풀기 위해 뱉어 내도 되는 말일까. 머리가 굳은 듯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렇게 멈칫하고 있는 사이, 콧잔등이 닿을락 말락 그가 고개를 숙여 왔다.
“이런 우리가 어떻게 같이 살아.”
남자의 눈 밑이 경련하듯 떨리고 있었다.
“내가 너를, 무슨 수로 견디라고.”
“…….”
“보기만 해도 이렇게 치가 떨리는데.”
“……나는―”
미움에는 언제나 이유가 있다.
이연의 태생이 그러했듯 이번에도 누군가의 상처가 됐다는 이유로 괴롭힘을 받는다. 매번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비뚤게만 흘러가는 일에 순간 울컥하는 감정이 치솟았다. 그럼에도 권채우를, 제 이모처럼 만들고 싶지 않아서. 생각할 겨를도 없이 성급하게 입이 열렸다.
“내가, 내가 그런 게 아니에요. 나는 정말로……, 심부름만 한 거예요. 전화만 대신 걸어 줬어요. 집에 가고 싶어 했던 건 그분이었어요.”
“…….”
별안간 이연의 멱살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남자는 입매를 꽉 다물고 있었지만, 눈썹부터 조금씩 일그러졌다. 그는 실핏줄이 터진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며 옅은 웃음을 터트렸다.
“차라리 가만히나 있지.”
“…….”
“내가, 입만 열면 거짓말이나 치던 여자를 어디까지 봐줘야 해. 이제는 아무렇게나 뱉고 보는 네 침까지 핥아먹으라는 거야?”
“……!”
“아직도 내가, 네 말 한마디 한마디를 맹신하던 병신으로 보여?”
“그, 그게 아니에요, 진짜, 이번엔 진짜예요!”
새된 목소리가 절박하게 터져 나왔다. 이연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마구 저으며 그의 손목을 꽉 움켜쥐었다.
양치기 소년의 말로가 이러할까. 이연은 제 모든 호소와 설득이 단번에 부정당하자 간신히 끌어 올렸던 용기가 유리처럼 깨지는 듯했다.
손이 벌벌 떨렸다. 어떻게 해도 그는 떠나갈 것 같았다. 그 불길한 예감이 괴물처럼 커지고 있었다.
“미쳤다고 그 사람이 제 발로 거길 들어올까.”
그가 이연의 멱살을 떨구듯 놓았다. 뜨겁게 끓던 눈이 조금씩 가라앉고, 눈동자 한가운데를 겨누던 시선도 미련 없이 거두어진다. 그 모습에 이연은 마음이 다급해졌다.
“미우면……! 더 옆에 두고 괴롭혀야죠.”
“뭐?”
“우리 이모가, 사촌들이 그랬던 것처럼 권채우 씨도 그렇게 해요. 원래 미울수록 더 가까이 두고, 주기적으로 찾아와서 트집 잡아요. 나 그런 데에 익숙해요. 익숙하니까……, 채우 씨도 그렇게 해도 돼요.”
황당하다는 듯 터지는 숨결 하나가 담배 연기보다 독했다.
“내가 왜.”
벌레만도 못한 것을 내려다보는 시선이 싸늘했다.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하등 없다는 말투였다.
“그, 그럼 나 없으면 권채우 씨 어떡하려구요.”
이연은 한겨울도 아닌데 턱을 덜덜 떨었다.
“나 없으면……, 일어나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나랑 떨어져서 살려구요.”
외줄이라도 타듯 그녀가 내뱉는 모든 말들이 위태로웠다. 그럼에도 방법이 없었다. 그의 증오와 불신을 당장에 해치워 줄 수도 없어서, 약점을 꼬집는 이런 치졸한 말밖엔 할 줄 몰랐다.
“채우 씨 나 필요하잖아요.”
“……아직도 그런 착각에 빠져 있었어? 내 연기가 완벽하긴 했나 봐.”
“……!”
권채우가 찡그리듯 웃었다.
“너 쓸모없어진 지 오래야.”
그는 이연이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던 끈마저 너무도 쉽게 끊어냈다. 두 사람을 강하게 묶고 있던 사슬을 옷에 묻은 지푸라기처럼 털어버리는 것이다.
서로의 무게가 이토록 다름을 확인한 이연은 창피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내내 가파르게 뛰었던 심장박동이 느리게 무뎌지고, 늑골이 짓눌리는 듯했다.
권채우는 그런 이연에게 쐐기를 박았다.
“나한테 너, 필요 없다고.”
그게 마지막이었다. 남자는 별다른 인사도 없이 그렇게 왔던 길을 뚜벅뚜벅 되돌아갔다.
망가진 숲에, 망가진 악기. 그리고 그가 기어이 망가뜨린 이연을 남겨 두고서.
심장이 깎여나가듯 아팠다. 더 이상 그를 붙잡을 만한 게 없었다. 이연은 이 현실이 믿기지 않아 점점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만 멍하니 쳐다만 보았다.
“…….”
그녀는 또다시 홀로 남아 누군가의 등을 하염없이 덧그렸다. 기억나지도 않는 부모, 무서웠던 이모, 거리를 두던 친구들의 수많은 외면이 권채우의 등에 조각처럼 달라붙었다.
더 이상 그녀가 떼도 쓰지 못하게, 너무도 타당한 이유를 들먹이며 떠나 버리는 사람들의 환상을 본다. 그러자 숨이 거칠어지고, 눈앞이 깜깜해졌다. 멀어지는 권채우의 거리만큼 길고 짙은 발톱 자국이 두 사람 사이를 끈처럼 잇고 있었다.
이대로 그를 잃고 나면, 다시는, 다시는 회복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다리가 한 발 움직였다. 이렇게 제 인생이 비참해져서는 안 된다고. 이연은 스스로를 위해 한 번 더 애를 썼다.
“약속했잖아!”
이제는 허상에 불과해진 것을 부르짖는 목소리가 볼품없이 갈라져 나왔다.
“분명 알아서 버리고 묻을 거라고, 그렇게 말했잖아요!”
“…….”
“노력해 보겠다고, 우리 사이에 방해가 될 만한 기억은 필요 없다면서……!”
“…….”
“나랑 약속했잖아요!”
그러나 야속하게도 권채우는 멈추지 않았다. 그 무엇으로도 그를 잡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죽을 때까지 모른 척하고 살 수 있었어!”
원망에 가득 찬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그간 참고 또 참아 온 설움이 부서지듯 터져 나왔다. 이연은 어린아이처럼 숨을 씩씩대면서 흐느꼈다. 그럼에도 그와의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그런데 왜……! 당신은 왜 못 해!”
“…….”
“난 권채우 씨가 어떤 사람이라도 감수하고 갈 수 있었는데……!”
“…….”
“왜 나만, 왜 나만 이렇게 아프고, 너는 가장 먼저 나부터 버려!”
이연은 걷잡을 수 없이 터지는 눈물을 닦지도 못한 채 미아처럼 헐떡거렸다.
이제 그녀는 거의 악에 받쳐 속도를 냈다. 다리에 힘이 빠져 대차게 넘어졌어도 다시 벌떡 일어나 그를 향해 달려갔다.
“……!”
마침내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멈춰 선 권채우의 등 근육이 순간 딱딱하게 굳었다.
“……지금 이렇게 가면 나 다시는 안 기다려요. 날 미워하는 사람을 인내하는 건 이제 지쳤어요. 그런 짓, 다시는 안 할 거예요.”
그녀는 무언가를 다짐하듯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고일 새도 없이 흘러넘치는 눈물은 연약했지만 돌연 단단하게 뭉쳐 드는 눈동자는 형형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이연은 숱한 경험으로 뼈저리게 알고 있다. 한 번 떠난 마음은 무슨 짓을 해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
억겁 같은 순간이 지나고, 그녀는 반응 없는 남자로부터 이미 충분한 대답을 들었다는 듯 눈을 툭 감았다. 그리고 까맣게 죽은 낯빛으로 팔을 풀려고 할 때였다.
힘이 빠지는 그녀의 손을, 권채우가 본능적으로 꽉 부여잡았다.
“……!”
“……!”
무의식에 가까운 반사 신경이었다. 얼음장처럼 차가워진 손이 서로를 아슬아슬하게 붙들고 있었다. 그러나 퍼뜩 정신을 차린 권채우가 그녀의 손을 내치듯 뿌리쳤다. 남자는 턱을 악물고 주먹을 꽉 쥐었다.
때마침 검은색 세단 몇 대가 흙먼지를 날리며 거칠게 진입했다. 브레이크 소리를 내면서 멈춘 차량에선 마찬가지로 새까만 슈트를 입은 남자들이 문을 열고 나왔다. 그들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한 사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권채우는 다시 쪼개지듯 흔들리는 시야 속에서, 유일하게 휩쓸리지 않은 목소리로 못을 박았다.
“바라던 바야.”
그렇게 그는 다시 멀어져 갔고, 이연은 온 힘을 소진한 사람처럼 비틀거렸다.
이연은 멍멍하게 선 상태로 우락부락한 남자들의 인사를 받는 그를 낯설게 바라보았다. 덩치가 큰 남자들은 몸에 밴 습관처럼 권채우를 에스코트하며 차 뒷문을 열어 주었다.
“아이고, 소 원장아, 이연아―!”
그때 멀리서 추자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그녀는 웬 꼬장꼬장한 할아버지들과 사나운 눈초리의 사람들을 꼬리에 매단 채였는데, 그들은 무섭게도 곡괭이를 하나씩 들고 있었다.
추자는 연신 이연을 불러 젖혔지만 이미 망부석이 된 그녀는 묵묵부답이었다. 추자는 낭패라는 듯 울상이 됐고, 잔뜩 성이 난 사람들은 곧장 이연의 머리채부터 붙잡았다.
“이 노인네가 미칫나!”
추자가 벌컥 화를 내며 몸으로 막아섰지만, 머릿수 차이가 너무 났다.
“이게 다 이 돌팔이 의사 때문이지! 너 이걸 어떻게 책임질 거야, 너 때문에 우리 마을 신령목이 죽었는데……!”
이연은 사람들 틈에 끼어 휘청휘청하는 와중에도 권채우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렇게 온 가지를 다 자르더니만, 치료하기는커녕 결국 죽여 놓은 게 이년이잖아!”
어르신들이 이연을 이리저리 막무가내로 잡아당기는데도 그녀는 반항 한번 하지 않았다. 흔들리면 흔들리는 대로, 그저 멍한 눈빛으로 허공만 바라볼 따름이었다.
그 순간, 여러 대의 세단을 뒤로 한 채 이쪽을 빤히 응시하는 권채우와 눈이 마주쳤다.
“…….”
“…….”
그녀를 내려다보는 무감한 시선은 어쩐지 즐거워 보였다. 사람들의 억센 손길에 의해 머리카락이 뜯기고, 목 부근이 할퀴어지고, 심지어 바닥에 넘어져 구를 때에도. 그는 유유자적하게 구경만 했다.
뜨거웠던 여름이 슬슬 물러날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이연이 다시 울음을 터트렸을 땐, 이미 권채우는 감쪽같이 사라진 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