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3화 (104/158)

#103

“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

팔과 목덜미에 소름이 쭈뼛 돋았다. 그건 이연을 간신히 지탱해 온 발밑을 박살 내는 물음이어서, 그녀는 꼼짝없이 속눈썹만 파르르 떨었다. 간신히 이어 붙여 온 무언가가 마침내 깨지고 있었다. 

“언제부터였어? 내가 다짜고짜 좆부터 욱여넣을 때였나?”

“……!”

“그땐 나도 정신 차리고 몇 시간 안 됐을 때라, 흉내가 좀 어설펐어.”

악의적으로 쭉 찢어진 입꼬리, 확연히 보이는 비웃음, 정체를 알 수 없는 묘한 희열. 그 복잡다단한 것들이 짐승의 타액처럼 길게 떨어졌다. 

“그래도 제법 비슷하지 않았어요?”

그가 권채우를 재차 연기하듯 퍽 다감하게 웃어 보였다. 아무런 감정도, 알맹이도 없이 그저 비슷하게 흉내만 낸 거죽은 여전히 이연을 농락하고 있었다. 

그녀는 억지로라도 숨을 몰아쉬며 차갑고 축축해진 손바닥을 꽉 말아 쥐었다. 머릿속에선 온갖 말들이 회오리쳤으나 하필이면 가장 연약한 문장만이 입에 붙었다.

“어디까지 기억하고 있어요?”

어쩌지 못하고 목소리가 흔들렸다.

“……나를 기억하긴 해요?”

이연은 그의 눈동자에 들어가 있는 자신을 확인하기 위해 눈도 깜박이지 않았다. 그 절박한 시선에 권채우의 미소는 조금 더 진해졌다. 

“당연히 기억하지, 널 한시도 잊어 본 적이 없어.”

“……!”

그녀의 눈에 일말의 희망이 스쳤다.

“날 식물인간으로 만드는 데 일조해 놓고, 아내라고 거짓말까지 친 여자를 어떻게 잊겠어.”

그러나 곧장 이어지는 신랄함에 이연은 맥없이 손이 풀렸다. 

“오리 새끼 길들이면서 재미는 좀 봤어?”

권채우는 시야가 서넛으로 찢어졌다 겹쳐지는 초점에도 태연히 웃어 보였다.

전부, 어쩌면 그는 기억 전부를 되찾았는지도 모르겠다. 이연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자신을 어떻게 변호해야 하는지, 머릿속이 그저 새하얘졌다. 들키고 싶지 않았던 것, 동시에 매 순간 털어놓고 싶었던 짐. 이건 권채우를 만난 이후 내내 품고 있던 근원적인 공포였다. 이연은 허둥대면서도 주먹을 꽉 쥐었다. 

“……거짓말은 미안해요. 내, 내가 그때는 권채우 씨 너무 무서워서 그랬어요. 나는 정말……, 나는 살려고 그런 건데 아무도 내 말을 안 믿어 줬어요. 채우 씨를 떨어지게 한 건 다른 사람이었는데……, 권채우 씨 형도 내 말엔 관심도 없었어요.”

남자는 무표정하게 이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연은 호두만 한 설움이 목구멍에 콱 박히는 듯했지만 이내 꾸역꾸역 삼켜 냈다. 

“그런데 채우 씨는, 적어도 내가 정당방위였다는 걸 알잖아요.”

“…….”

그는 소이연이 단순한 목격자인 줄 알고 쫓아갔을 때를 상기했다. 오로지 입을 다물게 할 요량으로 목을 졸랐던 그 순간을 떠올리자 왜인지 눈앞이 아찔해지고 손가락이 움칫, 튀었다. 그는 어금니에 힘을 주고 간신히 표정을 다잡았다. 

“내가 미안한 건 터무니없는 거짓말이지, 나를 지키려고 했던 행동은 아니에요.”

“…….” 

“거짓말한 건……, 정말 미안해요. 충분히 사과할게요. 정말로, 채우 씨 마음이 풀릴 때까지요…….”

이연은 꺾여버린 꽃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제 발끝만 쳐다보았다. 차마 그의 눈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아 가만히 아래만 보고 있자니, 별안간 눈덩이가 뜨뜻해지면서 물기가 스며들었다. 그녀는 바르르 떨리는 입술을 한 차례 깨물었다.

“……그래도요, 그 거짓말이 내 인생을 완전히 바꿔 놨어요.”

이연이 그의 소매를 미약하게 붙잡았다. 

“전부 처음이었단 말이에요, 누가 날 숨 막히도록 좋아해 주는 게. 이 세상 사람들이랑 전부 싸워줄 것처럼 끌어안아 주는 게.”

“…….” 

“그러니까 괜찮아요, 나한테 마음껏 화내고 실망해도 내가 더 잘할―”

“아직도 꿈에서 못 깼네.”

순간 픽, 하고 흘러나온 조소가 그녀의 말을 냉정하게 잘랐다. 권채우는 정수리만 보이는 여자의 머리채를 물속에 처박았다 빼내듯 들어 올렸다. 

“소용없어, 네가 무슨 짓을 해도. 너는 절대로, 네 남편을 다시 만날 수 없을 거거든.”

“으……, 그게 무슨―”

권채우는 허리를 굽혀 그녀의 눈에 깃든 무엇인가를 말살하듯 노려보았다. 그가 잔인하게 속삭였다.

“지금 여기서, 너와 관련된 기억은 전부 폐기하고 갈 거야.”

“……채, 채우 씨.”

“억울할 게 뭐 있어, 모든 걸 원래대로 돌려놓자는 건데.”

“…….”

“그러니까 너도 잊어.”

그는 쯧, 혀를 차며 그녀의 머리를 놓아주었고, 이연은 얼얼한 두피에 차마 손도 대지 못했다.

“사람이 염치가 있어야지.”

“……!”

갈비뼈 사이로 날카로운 막대기가 푹 꽂혀 들어서. 

염치 좀 있어라, 그 말은 사촌들과 이모에게 숱하게 들어왔던 말 중 하나였다. 그러나 저에게만큼은 한없이 너그러웠던 권채우에게 똑같은 지적을 들으니 타격은 배가 되어 그녀를 흔들었다. 

“그래도 우리는……. 권채우 씨는 나를…….”

권채우는 저 얄팍한 기대가 우스웠다. 밟아 꺼트리면 사라질 것처럼 위태로운 주제에, 퍽 눈물겹게 구는 꼴을 보니 그 뿌리를 다 뽑아 놓고 싶다는 충동이 치밀었다. 

“내가, 널 사랑한다고 정확히 말한 적이나 있어?”

“……!”

이연은 세게 맞기라도 한 듯 명치끝이 욱신거렸다. 

“기억을 잃어서, 정신이 온전치 못해서, 그냥 너한테 의탁한 거라는 생각은 안 해 봤어?”

그녀는 뜨겁게 북받쳐 오르는 덩어리를 삼키느라 절로 숨이 가빠졌다.

“……그래도 매 순간, 권채우 씨가 알려 줬잖아요.”

목소리 끝이 불분명하게 흔들렸다. 

“눈을 떴을 때부터 잠들기 전까지. 낮에는 채우 씨 그림자가 항상 따라왔고, 밤에는 한 번도 찬바람을 느껴 본 적 없어요……. 화단에 나가면 돌부리가 다 사라져 있고, 채우 씨가 밥을 차려 주면서부터 생선 가시는 삼켜 본 적도 없어요…….”

“…….”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안전해졌어요. 그게 얼마나 신기한 경험이었는지 알아요?”

어느새 눈물이 고여 들었지만 이연은 대수롭지 않게 커다란 눈망울을 소처럼 슴벅거렸다.

“태어나 처음이었어요. 나는 어딜 가든 항상 객식구였는데, 유일하게 채우 씨 앞에서만큼은……. 꼭 거인이라도 된 것 같았어요. 구석에 있던 나를 매번 벽난로 한가운데로 끌어와 놓고는…….”

“…….” 

“이게 어떻게…… 사랑이 아니라고 할 수 있어요.”

권채우는 금방이라도 속이 헐 것처럼 위장이 따끔거렸다. 지금 제 몸 상태가 얼마나 엉망인지 알고 있음에도 참으로 별스러운 통증이라고 자조했다. 남자는 이내 고막을 찔러 오는 이명에 고개를 한 번 털어 냈다. 악연을 끊어 내야 한다면 지금이 적기였다.

“순진한 건지, 멍청한 건지.”

악의에 가득 찬 동공이 눈발처럼 고요히 떨어진다. 그 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건 새까만 멸시뿐이었다. 권채우는 턱 끝을 올리고 태연자약하게 와이셔츠 단추를 하나씩 잠가 나가기 시작했다.

“정신 똑바로 차려, 소이연. 씹질이 그렇게나 좋았어?”

이연은 바짓단을 움켜쥐었다. 하얗게 튀어나온 뼈마디가 파르르 떨렸다.

“나는 애초에 널 파묻을 작정으로 화이도에 온 거야.”

“……!”

그녀는 번들거리는 우비를 입고 있던 남자와 다시금 눈이 마주치는 듯했다. 아슬아슬하게 차올랐던 울음이 한순간 얼어붙었다. 어두운 산속을 해치며 도망쳤던 그때처럼 맥박이 터질 듯 뛰었다.

“……왜, 왜요?”

이연은 목구멍이 죄어드는 통증을 견디며 눈살을 찌푸렸다.

“윤주하.”

그는 이연의 눈꼬리 끝에 매달린 눈물을 문지르듯 닦아 주었다. 이내 아치형 눈썹을 엄지로 덧그리고, 눈덩이를 훑고, 속눈썹을 쓸어내렸다. 그는 키스를 위해 달려들었을 때처럼 이연의 얼굴을 두 손으로 단단히 붙들었다.

“네가 돈 받고 넘긴 여자 이름이야.”

“……!”

그 순간, 시퍼렇게 내리꽂히는 벼락같은 깨달음이 있었다. 따로 떨어져 있던 조각들이 비로소 하나로 꿰어 맞춰진다. 그녀는 창백해진 시선으로 권채우의 이목구비를 하염없이 배회했다. 

혹시……, 혹시……. 

남자는 커다랗게 벌어지는 이연의 동공을 보며 입꼬리를 히죽 들어 올렸다.

“아마 네 생각이 맞을 거야.”

“……!”

“이제 좀 감이 와?”

그가 얼굴에 걸쳐 둔 미소는 잘못 걸린 액자처럼 어울리지 않았다.

“그런 나한테 저딴 음악을, 악기를, 보여 줘?”

그건 처음 들어 보는 목소리였다. 바닥을 긁으면서 올라오는 지독한 음성. 이연은 솜털이 비쭉 솟고 호흡이 들쭉날쭉 거칠어졌다. 

그러나 여전히 안개 속을 헤매듯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이연은 쉬이 꺼지지 않는 분노를 마주하고 있음에도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모, 모르겠어요……. 그분은, 그분은 집에 가셨는데 왜―”

“그 집에서 죽었거든.”

“……!”

“절대 돌아와서는 안 되는 집이었는데.”

권채우는 두 손을 내려 이연의 가냘픈 목을 간지럽히듯 쥐고, 제 입술을 혀로 축였다. 그녀가 비명을 지를 때까지 묶어 두고 울혈을 남기고 싶은 살갗이었다.

“어머니는 본가 지하에 7년 동안이나 감금당했어. 내가 머물렀던 방 바로 밑에서. 그렇게 햇빛도 한 번 못 보고 시체로 나왔다지.”

“읏……!”

진짜 권채우의 일면은 생각보다 더욱 끔찍했다. 이연은 두 눈이 시큰거려 저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다. 

“한번 네 목을 졸랐던 사람이 두 번은 못할 것 같아? 그런데도 사랑, 그딴 개소리를 운운하고 싶어?”

권채우가 그녀의 멱살을 거머쥐고 거칠게 끌어당겼다. 이연은 피할 새도 없이 찐득하게 쏟아지는 증오를 온몸으로 맞았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