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아름다운 화이도.
고즈넉한 숲속에 발을 들이자 상쾌한 공기가 콧속을 파고들었다.
이연은 커다란 현수막을 올려다보며 규백이의 손을 단단히 잡았다. 아이는 품 안에 곤충백과사전을 꼭 안은 채 두 뺨을 붉게 물들였다.
“청띠제비나비는 날개가 크고 늘씬합니다. 특히 나비들은 서로 꼬리를 물고 줄지어 날아갑니다.”
오늘따라 규백이의 목소리가 노래를 부르듯 들떠 있었다.
<아름다운 화이도>의 일환이었던 생태 복원 사업. 화이도와 산림청, 그리고 곤충 연구 협회가 함께한 이 사업은 멸종 위기종의 나비를 대량 번식시키자는 취지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최근 2천 마리 이상의 청띠제비나비를 번식시키는 데 성공하면서, 마침내 ‘나비 날리기’ 축제가 열리게 되었다.
“원장 선생님, 꼭 소개 부탁합니다.”
규백은 이연의 손을 쭉쭉 잡아당기며 벌써 수십 번째 당부하는 중이었다.
“알았다니까.”
“저는 자만추가 좋습니다.”
“자만추? 그게 뭔데?”
“자연스러운 만남 추구입니다.”
“…….”
이연은 잠시 벙쪘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말은 어디서 배운 거야?”
“기본입니다.”
곤충 연구 협회는 규백이 평소 선망하던 곳으로, 매달 그곳에서 발행되는 잡지를 모으기 위해 여덟 살 인생 전부를 걸고 있을 정도였다.
특히나 협회에 소속된 나비 1부장과 나비 2부장, 그리고 딱정벌레부장을 맡고 계신 교수님들의 참석 소식을 듣고는 거울 앞에만 서면 가르마를 타기 바빴다. 그 결연한 눈빛 속에는 지지 않겠다는 어떤 각오가 느껴졌다.
“나비는 100km이상 떨어진 거리에서도 암컷을 알아봅니다.”
축제를 구경하러 온 사람들은 저마다 가족들이나 연인의 손을 잡고 있었다.
만면에 미소를 띤 그들을 보고 있자니 이연도 자연스레 한 사람이 떠올랐다.
어젯밤, 손에 묻은 끈적한 액체를 피해 달아나듯 눈을 감고 색색거리는 사이, 잠이 들었다.
일어나 보니 손은 말끔했고 권채우는 달라진 것 없는 일상 한가운데서 아침을 차리고 있었다.
요즘 들어 두 사람은 찢어진 자리를 급한 대로 꿰매고 기워 입으며 가까스로 굴러갔다.
‘그치만 대체 언제까지?’
그녀의 얼굴이 내심 어두워졌을 때, 규백이 폴짝폴짝 뛰기 시작했다. 커져 가는 웅성거림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5m쯤 되어 보이는 커다란 새장 수십 개가 차례로 들어오고 있었다.
꼭 마술을 위한 무대처럼 숲 중앙을 빙 둘러싼 크림색의 앤티크한 새장.
사회자와 관련 협회장들의 축하 멘트가 이어지다 마침내 새장 문이 열렸다.
“와아―!”
규백이의 입에서, 그리고 사람들의 입에서 커다란 감탄이 떨어졌다.
그건 수천 개의 꽃잎이 솟구치는 광경이었다. 공중에 흩뿌려진 나비들은 무리를 지어 하늘하늘 내려갔다 솟아오르기를 반복했다. 그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회오리처럼 아래에서 위로 둥글게 올라갔다.
아슬아슬한 날갯짓은 종종 사람들의 머리를 스쳤고 이연은 나비 떼에 푹 파묻혀 버렸다.
그녀는 눈앞을 현란하게 날아다니는 신비를 멍하니 바라보다 돌연 버거운 듯 얼굴을 파묻었다. 반짝이는 편린이 그간 이연이 감춰두었던 비밀과 닮아있어서.
빛을 반사하는 제각각의 날개가 자신마저 필사적으로 속여야 했던 순간들을 깨진 거울처럼 보여주는 것이다.
‘이연 씨, 좆 빨아 봤어요?’
‘만약에 내가 권기석을 죽여 버리면 어떨 것 같아요?’
‘그러게 입으로 뭔가를 할 때는 항상 조심해야죠.’
‘씨발,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
‘눈물 나네. 혼자 보기 아깝게 언제 이렇게 진심이 됐어요.’
‘……내가, 이연 씨 애원 하나에 빌빌 기면 좋겠죠?’
‘이제 와서 약한 모습 보이지 마요. 계속 뻔뻔하게 굴어야 소이연이지.’
‘원래 사냥감이라는 게, 살아선 나갈 수 없는 건데.’
간혹 무정하고 적대적으로까지 느껴졌던 남자의 눈빛, 말투, 행동들을…….
이제는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권채우의 줄을 태웠던 밤. 당신이 기억을 찾지 않는다면, 나도 당신의 과거는 이대로 묻고 살겠다는 다짐을 했었기에.
어쩌면 이연이 홀로 새겼던 그 각오는 가짜 혼인 신고보다 더 강력한 구속력이 담긴 맹세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권채우가 계속해서 남편인 척을 해 준다면, 그녀도 기꺼이 속아줄 수 있었다.
‘―해 볼게요. 나랑 함께 하는 데 가장 방해가 되는 게 옛 기억이라면. 나도 필요 없어요. 이연 씨가 먼저 부탁하지 않아도 내가 알아서 버리고 묻었을 거예요.’
그가 그렇게 말했으니까.
무작정 그가 낯설게 느껴질 때에도 이연은 불안한 마음을 애써 툭툭 털어 냈다.
별것 아닐 거라고. 그의 말마따나 알아서 버리고 묻는 과정일 거라고. 이 과도기만 지나면 그가 품고 있는 혼란도 잠재워질 것이라고.
“기다릴 수 있어요.”
이연은 햇빛을 한껏 머금은 나비가 너무 푸르러 잠시 눈을 가렸다. 이 관계를 지키기 위해 그녀가 눈을 감았던 것처럼.
현실을 외면하면서까지 그녀가 지키고 싶어 했던 것. 허울뿐이라도 좋았던 것. 순간순간 뒷덜미를 스치는 위화감을 누르고 또 억누르면서. 그녀가 붙잡으려 했던 건 오로지 권채우뿐이었다.
남에게 거짓말을 치다 못해 이젠 스스로를 속이는 지경에 다다랐지만, 자기기만은 달콤했다.
묻고 싶은 것을 삼킬수록, 의심스러운 것을 털어 낼수록, 이 관계는 안전하다 믿었다.
간신히 마음을 주고받은 사람을 놓치지 않으려면 무언가를 눈치채서도, 입에 담아서도 안 됐으니까.
마침 바람에 나부끼던 나비들이 일시에 솟구쳤다. 이연은 이마를 치고 날아가는 나비들 때문에 방어하듯 팔꿈치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다시 팔을 내렸을 땐―.
“……!”
마치 나비들이 그를 데려온 듯 활짝 열린 시야로 익숙한 남자가 나타났다.
이연은 다리가 굳어 그저 꿈결인 양 권채우를 바라보았다.
그는 센터 저지를 입고 입술 근처에 무전기를 갖다 대고 있었다. 아직 그녀를 발견하지 못한 남자는 나비가 날아가는 쪽으로 고개를 젖히고 입술을 움직였다. 두 음절이 넘어가지 않는 짤막한 보고는 낯 뜨거운 말을 퍼붓던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나비 떼가 그를 치고 지나가도 권채우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단지 바람에 흐트러진 앞머리가 새까만 강처럼 모여들 뿐이었다.
자세히 보니 센터 측에서 지원을 나온 건지 새장을 미는 사람들이 전부 눈에 익었다.
이윽고 나머지 새장들이 잇따라 열리고 여러 빛깔이 흐르는 나비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소리, 사람들의 넋 빠진 환호, 규백이의 흔치 않은 웃음소리는 권채우와 눈이 마주친 순간 까마득히 멀어졌다.
“…….”
“…….”
그는 내리쬐는 햇볕에 눈썹을 와락 찌푸리면서도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반가움이 담긴 눈빛은 그녀가 익히 알던 권채우가 틀림없어서. 오랜만에 심장이 깎이는 것이 아닌, 두근두근 어여쁘게 뛰었다.
이연은 저도 모르게 한 발, 한 발 앞서 나가다 이내 달리기 시작했다. 그에게 도달하기도 전에 밀려드는 체향이 달고 시원했다.
나비 길을 가로지르며 그의 허리를 단숨에 껴안자 권채우도 화답하듯 숨 막히게 끌어안아 주었다. 그 안락한 품속에서 그녀는 코끝이 찡해졌다.
‘이 사람이 자꾸 이러니까…….’
허울이라도 좋다. 서로를 기만하는 관계일지라도 이연은 감수하고 싶었다.
“……채우 씨, 언제 왔어요? 왜 얘기 안 했어요?”
“깜짝 놀라게 해 주고 싶었는데 내가 더 놀랐어요.”
별안간 그가 이연을 떼어 내더니 눈동자만 내려 빠르게 살폈다.
“넘어지면 어쩔 뻔했어요.”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이연의 무릎을 거쳐 발끝까지 내려갔다 올라온다. 그 살뜰한 걱정에 이연은 또다시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기억, 돌아오고 있는 거죠? 그래도……, 나랑 함께할 거죠? 목 끝까지 차오른 물음을 꾸역꾸역 삼키느라 입매가 딱딱해졌다.
“웬일로 도망을 안 치나 했더니, 또 그렇게 웃네.”
미간을 설핏 찌푸린 권채우가 그녀의 입꼬리를 엄지로 살살 매만졌다.
“도망이라뇨?”
“나 혼자 싸게 뒀으면서. 그동안 모르고 행동했다는 게 더 기가 막히는데요.”
이연은 입을 떡 벌리고 그의 어깨를 쳤다.
“여기 밖이에요, 말 좀 가려서 해요……!”
그러나 권채우는 대수롭지 않게 으쓱해 보이며 이연의 뺨을 만졌다.
“죽어서도 생각날 거 같아요. 달려오던 이연 씨랑, 나비요.”
“…….”
이연은 익숙한 뜨거움에 눈을 감았다 떴다.
은하수처럼 흘렀다가 흩어지는 날갯짓 속에서, 이 경이로운 자연 속에서 그녀는 언약을 맺고 싶다는 충동이 북받쳐 왔다.
“……나는 이 풍경보다 권채우 씨가 더 귀해요.”
그가 움찔, 얼굴을 굳혔다. 나비들은 여전히 두 사람 사이를 환상처럼 날아다녔다.
“그래서 나처럼 없이 자란 사람은요, 그런 거 못 놓쳐요.”
“……!”
“그러니까 계속 내 옆에 있어 줘요.”
용기 낸 고백에도 권채우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잠시 눈빛이 흔들린 듯했으나 역시나 착각이었는지 표정이랄 게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가시처럼 튀어나온 무감각한 얼굴이 낯설다. 그러나 대체 무엇을 삼킨 건지 그의 목울대가 크게 일렁였다.
그때 이연의 콧잔등에 나비가 내려앉았다. 난데없이 시야를 가린 곤충을 확인하느라 그녀의 두 눈동자가 가운데로 모여들었다. 이연은 나비를 홱 치우지도 못하고 미약하게 그를 불렀다. 정확히는 입만 뻐끔거리는 수준이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그 모습에 권채우는 꿈틀거리는 제 입가를 손으로 꾹 눌렀다.
“비료도 잘 만지고 병충해도 잘 잡는 사람이 왜 그래요.”
“그게 아니라요…….”
“네.”
“너무 예쁘잖아요, 그런데 내 입김 때문에 날아갈까 봐요…….”
생각지도 못한 말에 남자의 동공이 멍하니 풀어졌다.
이연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눈을 질끈 감고, 콧대를 간질이는 느낌을 견디고 있었다. 그런데 속눈썹을 건드리던 얇은 날개 대신, 더 무겁고 촉촉한 무언가가 콧잔등에 꾸욱 눌렸다.
화들짝 눈을 떠보니 바로 코앞에서 나비가 아닌 권채우와 눈이 마주쳤다.
“……지금 무슨―”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입술이 맞물렸다. 정돈되지 않은 숨결이 성급하게 달라붙었다. 거친 입술이 아프게 부딪쳤다 떨어지고, 또다시 파고들었다 깨물기를 반복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그의 감정이 생생하게 손에 잡혔다.
그는 이연의 뺨을 단단히 움켜쥐고, 쓸었다가, 목뒤를 강하게 붙잡으며 정신없이 밀려들었다. 그답지 않게 흐트러진 호흡이 이상하게 절박해 보였다.
그러나 권채우는 어떠한 연약도 끝까지 입에 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