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주동미는 “흐응―” 하는 오묘한 비음을 흘리며 팔짱을 꼈다. 그에 이연은 낭패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빠르게 지우며 테이블 쪽으로 상체를 숙였다. 은밀하게 흘러나온 목소리가 의외로 날카로웠다.
“혹시 들켰어요?”
“네?”
“등 뒤는 제대로 확인하고 튄 거예요?”
“어…….”
주동미는 희한한 이채가 돌고 있는 이연의 눈동자에 잠시 시선을 빼앗겼다.
“그렇게 무시무시한 광경을 목격했다면 대가는 따라오게 돼 있어요.”
“무슨…….”
“문단속 잘 하구 어두울 때 혼자 돌아다니지 마세요. 쫓아올지도 모르니까.”
“……!”
“목, 항상 조심해요.”
손가락 두 개로 턱 밑을 베어 가는 시늉을 해 보인 이연은 진지하다 못해 으스스했다. 주동미는 입을 반쯤 벌리고 있다가, 이내 픽 웃음을 터트렸다.
“그쵸? 역시 원장님도 안 믿기시죠?”
아니, 나만큼 잘 아는 사람도 없을 걸요……! 그러나 입을 벙긋하기도 전에 그녀가 선수를 쳤다.
“분명 경찰이라고 들었는데 말입니다. 어디서 근무하는지도 안 알려 줍니다. 아무리 섹파여도 그렇지, 사람이 너무 미스터리한 거 아님까? 쌍팔년도 조폭 영화도 아니고, 나는 신파 찍기 싫슴다!”
주동미는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이내 미약한 짜증과 씁쓸한 고민이 엉긴 눈초리가 이연을 향했다.
“원장님은 그 고질라한테 뭐 들은 바 없슴까?”
“……네.”
“조폭 새끼도 아니고, 대체 왜 거기서 사람을 묻고 있었는지 모르겠슴다.”
주동미는 남자를 단칼에 잘라 낼 것처럼 굴어도 여전히 핸드폰을 놓지 못한 채 입술을 짓씹고 있었다. 그녀는 어떤 정답을 바라는 얼굴로 길쭉한 팔을 뻗어 이연의 소매를 붙들고 늘어졌다.
“원장님이라면 어떻게 하실 검까?”
그녀의 우는 소리에 이연은 땀을 삐질 흘렸다.
이연이야말로 머릿속이 말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찬 상태였기에, 누군가의 고민에 쉽게 입을 댈 처지는 아니었다. 그러나―
‘내 남자가……, 내 남자가 아닌 것 같슴다.’
이연은 어깨를 축 내려뜨리고 마당의 자그마한 텃밭을 바라보았다. 어느 것 하나 소홀하게 대하지 않았다. 아끼고 싶은 것들을 손수 골라 매일 들여다봤으며, 그렇게 손을 탄 씨앗들이 이제는 열매를 맺기 직전이었다.
“나무가 내 손을 떠나기 전까지, 먼저 포기해 본 적이 없어요.”
―나무의사들이 하는 일이 보통 그렇거든요. 침착한 사유가 묻어나는 목소리는 낮게 부는 바람처럼 고요했다.
“그래서 저는 참아 보려구요.”
“뭐를 말임까?”
“…….”
이연의 옆모습에선 도무지 표정이랄 게 읽히지 않았다. 주동미는 말없는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다 별안간 뺨을 긁적였다.
“그치만 끝이 정해져 있다면, 그건……. 참는 게 아니라 조금씩 이별하는 거 아님까?”
“……!”
머리 위로 바윗덩이가 쾅 떨어지는 것 같았다. 이연은 굳은 듯 눈꺼풀도 깜빡거리지 않았다.
반박하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이 들었지만 정작 그녀가 방패처럼 두를 수 있는 말은 하나도 없었다.
* * *
그날 밤, 권채우는 핸드폰 액정만 두드리고 있는 이연을 못마땅하게 바라보았다.
연거푸 리모콘을 눌러 채널을 바꾸자 모니터에서 새어 나온 빛깔이 권채우의 얼굴을 시퍼렇고 빨갛게 물들여 그는 마치 도깨비 같아 보였다.
그때마다 단말마처럼 짧게 잘리는 오디오가 신경 쓰일 법도 한데, 이연의 시선은 한결같이 핸드폰에만 꽂혀 있었다. 참다못한 권채우가 그녀 쪽으로 몸을 돌렸다.
“누구예요?”
“네?”
이연은 먼저 대답을 한 뒤, 나중에야 고개를 들었다. 누가 봐도 성의 없고 기계적인 태도였다.
권채우는 경직된 아래턱을 좌우로 움직여 보며 알 수 없는 감정을 내리눌렀다. 그가 고갯짓으로 이연의 핸드폰을 가리켰다.
“사적으로 연락하고 지내는 친구는 없는 걸로 아는데.”
“아……, 사적인 일 아니에요.”
“스스럼없이 밤에 연락할 정도면 충분히 사적인 영역 아닌가?”
그의 눈썹이 짜증스레 구겨졌다.
“그냥 대학생이에요.”
“대학생?”
“소나무 동호회 회장인데요, 방학이라서 화이도에 오는데 가이드를 부탁한다고―”
이연의 시선이 자연스레 핸드폰으로 내려가자 권채우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손을 뻗었다.
그러나 다가오는 그림자를 미리 인식한 그녀가 움찔 고개를 뒤로 뺐다.
“……!”
“…….”
그의 손이 갈 곳을 잃고 허공에 잠시 멈추었다. 차가운 정적이 두 사람 사이를 휘감았다.
“어, 그게…….”
뒤늦게 당황한 이연이 눈을 굴렸으나 그럴 듯한 변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모, 모기가 있어서…….”
누가 봐도 지어낸 게 분명한 대답에 권채우는 천천히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이연은 뒤늦게 남자의 눈치를 열심히 보았지만, 그가 화가 난 건지, 어이가 없어 웃는 건지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애새끼들 가이드를 왜 이연 씨가 하는데요?”
이내 권채우는 다시 손을 거두고 아무렇지 않게 물어 왔다. 가슴이 철렁할 정도로 싸했던 순간은 그가 화제를 돌리면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얼기설기 무마되었다.
그러나 칼처럼 잘 벼려진 목소리는 언제든 그 순간을 푹 찍어 도마 위에 올려놓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아 이연은 마른침을 삼켰다.
“대학생이면 돈도 없을 텐데, 설마 무상으로 봉사하는 거예요?”
“그 반대예요. 많이 주겠대요.”
소나무 동호회는 수도권 대학들의 연합 동아리였다. 그들은 화이도의 유명한 소나무들을 소개해 줄 전문가가 필요했고, 동호회 회장은 인맥을 이용해 이연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 학생의 삼촌이 바로 이연이 누군가를 고발할 때 자주 손을 잡곤 했던 K 일보의 환경부 기자였다. 사람과 부대끼는 일이라면 거절부터 했을 그녀였지만 지금은 바쁘게 나가서 행동할 거리가 필요했다.
“그래서 그 시커먼 놈들이랑 소나무를 보러 다니겠다고요, 이연 씨.”
권채우의 목소리는 지극히 단조로웠지만 묘하게 머리채를 잡아당기는 음산함이 있었다.
“시커멓긴 누가 시커메요?”
“수염 난 놈들이 이연 씨만 와글와글 따라다닌다고 생각하면―”
그때 이연이 불현듯 손을 들어 권채우의 말을 막았다. 남자는 눈앞에 들이밀어진 손바닥에 말문이 막혔고, 이연은 막 울리기 시작한 핸드폰을 냉큼 받았다.
“여보세요?”
권채우는 “하…….” 하는 짧은 숨을 내뱉으며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지?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굵은 목소리가 바늘처럼 귀에 박혔다. 그는 통화를 부드럽게 이어 나가는 이연을 보며 들고 있던 리모컨으로 제 허벅지를 툭툭 쳐 댔다.
“남자 새끼 목소리네요.”
나지막한 읊조림에 통화를 하던 그녀가 멈칫, 이쪽을 쳐다보았다.
“아까 문자하던 것도 혹시 그놈이에요?”
“어…….”
이연은 양쪽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집중을 잃고 허둥대기 시작했다.
“이연 씨는 그런 귀찮은 일, 넙죽 안 받잖아요.”
“…….”
“나는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문득 권채우는 느슨하게 벌어진 두 사람의 간격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사람 한 명쯤은 족히 들어가고도 남을 법한 공간이 그들 사이에 구멍처럼 파여 있었다. 눈살을 찌푸린 그가 거리를 좁히는 순간, 공교롭게도 이연이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
“…….”
그는 실소를 흘리며 거칠게 TV를 껐다. 그러자 외부의 소음들로 가득 찼던 실내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러는 와중에도 이연은 통화를 계속해 나갔고, 권채우는 소파 등에 몸을 기댔다.
거실을 왔다 갔다 하는 그녀의 발걸음 수, 상냥한 호응을 하는 입 모양, 의미 없는 웃음 등, 그녀의 움직임을 기민하게 좇는 눈초리가 사납고 날카로웠다.
“―네, 네, 그럼 그때 뵙겠습니다.”
마침내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른 이연은 퍽 가라앉아 있는 집안 분위기에 권채우를 돌아보았다.
“채우 씨, TV는 왜 껐어요?”
“그보다 더 재밌는 게 생겨서요.”
권채우는 소파 등에 팔꿈치를 걸치고 싱긋 입매를 들어 보일 따름이었다.
그의 방만한 자세에 괜스레 시선을 피한 이연이었지만 우연처럼 눈길이 닿은 그의 바지를 보는 순간, 입이 떡 벌어졌다. 그녀는 불이 붙은 프라이팬을 쥔 듯 쩔쩔매며 소리쳤다.
“채우 씨 저, 저거 왜 저래요? 왜 갑자기 섰어요?”
“아아.”
그는 느긋한 목소리로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꼴린 거 아니니까 걱정 말아요. 이연 씨는 잘 모르겠지만, 남자 성기란 게 꼭 흥분할 때만 발기되는 게 아니거든요.”
“그럼 왜…….”
“흉기를 꺼내고 싶을 때도 좆은 서요.”
“네?”
이연의 얼굴에 희미한 경계가 서리자 그는 농담이라는 듯 가볍게 어깨를 추켜올렸다.
“그냥 기분 문제라는 거예요.”
이연은 그의 페이스에 끌려가는 것 같으면서도 강압적이지 않은 태도에 무엇이 진심이고 진심이 아닌지 헷갈렸다.
“그런데 이연 씨는 안 궁금해요?”
“뭐, 뭐가요?”
“이거요, 평소보다 더 딱딱해진 거 같은데.”
그는 기둥 하나를 세워 넣은 것처럼 불룩해진 앞섶을 툭 건드리며 물었다.
“다른 방식으로 피가 쏠려서 커진 건, 어떤 느낌일지 안 궁금해요?”
“어…….”
“이연 씨가 안 하던 짓을 하니까, 나도 자극이 돼서요.”
남자가 노골적으로 던지는 추파에 이연은 어깨를 웅크렸다. 귀밑을 긁적이며 방문을 차례로 훑는 눈동자가 꼭 도망칠 길을 탐색하는 초식동물 같았다.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그는 삐뚜름해지려는 입술에 꽉 힘을 주고 그녀가 겁먹지 않도록 보채듯 유인했다.
“네? 이연 씨.”
“저는 원래……. 기능이 다양한 건 별로 안 좋아해서요.”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후다닥 사무실로 들어갔다. 딸깍, 하고 방문이 잠가지기 전에, “나 오늘 야근할 거예요! 먼저 자요!”라고 선언하는 목소리가 권채우의 뱃속을 불쾌하게 쑤셨다.
이내 꽉 닫힌 문을 주시하는 남자의 동공이 얼음장처럼 싸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