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5화 (96/158)

#95

삐이이― 날카로운 이명이 머릿속을 할퀴었다.

“―세요?”

빛과 색이 한 뭉텅이가 되어 흔들리는 시야. 그 사이로 흐리멍덩한 실루엣이 잡혔다. 

“구조자분, 이제 정신이 좀 드세요?”

낯선 목소리가 몸의 스위치를 별안간 콱 눌렀다. 깜짝 놀라 상체를 벌떡 일으킨 이연은 공기를 처음 마셔 보는 사람처럼 흉곽을 거칠게 들썩였다. 확장된 동공이 하얀 천막을 훑고 눈앞의 구급대원까지 담았다. 아무래도 산 아래에 자리 잡고 있던 응급 대처실인 것 같았다. 

“갑자기 일어나시면 어지럽습니다. 누워 있으세요.”

구급대원은 당황하지 않고 이연의 어깨를 부드럽게 밀어 눕혔다. 그는 이연의 턱에 거즈를 붙이고, 열이 오른 손등에는 식염수를 부어 주고 있었다. 금세 한 통을 다 쓰고도 또 한 통을 뜯었다.

“보호자 분이 계속 옆에 있으셨거든요. 곧 오실 거예요.”

“…….”

기파에 떠밀려 앞으로 고꾸라졌던 것이 그녀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넘어지면서 돌멩이에 확실히 턱이 찍히긴 했는지 정신을 차린 순간부터 통증이 치밀고 있었다. 도대체 이런 상태로 어떻게 현장을 빠져나왔는지 모르겠다. 

그때 천막이 열리고 익숙한 신발이, 저지가, 그리고 창백한 얼굴이 차례로 들어왔다.

“이연 씨, 괜찮아요?”

걱정으로 포장된 목소리가 희미하게 남아 있던 몽롱함을 싹 걷어 갔다. 흠칫한 이연이 베드 끝까지 엉덩이걸음으로 도망치듯 거리를 벌렸다. 

그 탓에 식염수를 들이붓고 있던 구급대원도 그녀의 손을 놓치고 말았다. 이연은 남몰래 하얀색 시트를 꽈악 쥐었다. 심장박동이 제멋대로 어긋나기 시작했다. 

“무슨, 어떻게 여기……”

“아아, 이연 씨는 기억이 안 나려나요?”

“네? 뭐가……”

그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이연의 몸은 눈에 띄게 경직되었다. 그러나 권채우는 뻔뻔하고 상냥한 눈빛으로 그녀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그는 구급대원이 들고 있던 식염수를 자연스레 뺏어 들고 이연의 손을 붙들었다. 그녀의 어깨가 움칫 요동을 쳤다. 

“내가 먼저 내려갔었잖아요, 이연 씨만 놔두고.”

그의 고요한 시선에서 묘한 조롱이 느껴졌다. 이연은 권채우에게 붙잡힌 손을 빼내고 싶었지만 그게 좀처럼 쉽지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물집이 잡힌 이연의 손등을 손톱으로 꾹 누르며 무언의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그런 주제에 표정은 숫기 없는 청년처럼 결백했다.

“소리나 냄새에서 안 좋은 기류가 느껴졌어요.”

“…….”

권채우는 특별히 예민하다. 그래, 그걸 모르지는 않았다.

“다행히 밑에서 소방관들이 작업하는 걸 보면서 올라왔거든요. 그래서 바로 계산이 섰어요.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큰 산불로 번졌을 거예요.”

이연은 하릴없이 입만 열었다 닫았다. 

“이연 씨가 무사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남자의 말만 들으면 문제 될 것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는 골든 타임을 지키기 위해 앞장서고 애쓴 한 명의 시민일 뿐이었다. 

“아내분, 정말 큰일 날 뻔했어요……! 그 불길 한 가운데서 조금이라도 늦었어 봐요. 하필 그 구역에 개미 한 마리도 안 지나갔다면서요. 남편 아니었으면 크게 화상 입었을지도 몰라요. 그래도 폭발 충격으로 기절한 거 말고는 다 괜찮아요. 그게 얼마나 천만다행이게요.”

권채우의 결백에 힘을 실어 주듯 구급대원이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자 원액처럼 까맸던 불안이 조금씩 별것 아닌 것으로 희석되어 갔다. 

그녀의 혼란이 묽어지고, 덩달아 날카로운 예감과 직감도 무뎌졌다. 아니, 무뎌지게끔 내버려 두었다. 

“……권채우 씨는 다친 데 없어요?”

“그럼요.”

“다행이에요.”

이연은 가까스로 입매를 들어 올렸다. 그러나 피로가 안개처럼 낀 얼굴은 감출 길이 없었다. 

그때, 권채우가 한쪽 팔을 짚고 고개를 비딱하게 기울여 왔다. 이연은 저도 의식하지 못하는 새 숨을 멈추었다. 

훅 끼치는 그의 호흡, 이마 위로 드리워지는 큼지막한 그림자. 그녀를 얼어붙게 할 만큼 충분히 어둡고 차가운 것들이었다. 이내 비밀을 말하듯 권채우가 속삭였다.

“이 심사는 이연 씨가 이겼어요.”

“……네?”

“나무 의사가 위험한 곳에 혼자 있다가 다쳤으니, 얼마나 기특하고 불쌍해요.”

“……!”

“어제의 소란 같은 건, 곱씹을 겨를도 없을 거예요.”

귓가에 차가운 입김이 내려앉자 솜털이 바짝 섰다.

“이연아, 이기 무신 일이고―!”

마침 우렁찬 목소리가 천막을 열어젖히고 사색이 된 추자가 달려들었다. 그녀는 멀쩡히 붙어 있는 이연의 팔다리를 확인한 다음에야 응급 베드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추자 씨.”

궁지에 몰린 듯 몸을 구기고 있던 이연이 추자를 덥석 끌어안았다. 

“야, 야가 와 이라노……!”

추자는 처음 접해 보는 상황에 안절부절못했고, 이연은 말없이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렇게 아랫입술을 깨물고는 울음처럼 터지려는 어떤 것을 참고 또 참았다. 직면하기 어렵고 무서운 것이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이연은 더욱 깊숙이 얼굴을 감추었다.

“어데 치근댈 사람이 없어서 내한테 이카나!”

그러나 말은 그렇게 해도 잘게 떨리는 이연의 몸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는 추자였다. 

“권 서방 아니었으면 참말 큰일 날 뻔했대이.”

“…….”

그런 말에도 이연은 잠깐만 움찔했을 뿐,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한편, 권채우는 자신을 거부하듯 쳐다보지도 않는 여자를 무감한 눈으로 좇았다. 친절과 기만을 뒤집어썼던 남자의 낯은 어느새 싹 벗겨진 채였다. 들고 있던 식염수 통을 구기듯 움켜쥐자 그것이 우유갑처럼 터진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 * *

2박 3일의 심사 일정이 모두 끝났다. 

그가 단언했던 대로 3차 심사를 통과한 쪽은 이연이었다. 솔개 박 원장이 부루퉁한 얼굴로 “소 원장, 로비를 하더라도 안전하게 돈으로 해―!” 라며 비꼬았지만 차마 웃을 수 없었다.

이연은 못대산에서 돌아오는 내내 흐리멍덩한 정신으로 잠만 잤다. 

그 후 아무렇지 않게 그를 대했고, 웃었고, 함께 밥을 먹었다. 습관적으로 입꼬리에 힘을 줘 올리는 순간들이 잦아졌지만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권채우도 완벽한 그림처럼 굴었다. 묘하게 강압적이었던 행동이나 언행들을 하루아침에 싹 지워 내곤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렇게 두 사람 사이를 메꾸기 시작한 건 그럴듯한 평화였다.

“―님! 내 말 듣고 있슴까?” 

별안간 끼어든 주동미의 목소리에 이연이 흠칫 앞을 보았다. 

집 앞마당에 내놓은 작은 티 테이블. 

커다란 그늘 아래, 주동미가 아이스티를 빨대로 휘젓자 얼음이 달그락거렸다. 이연은 재빨리 사색을 털어 내곤 유리컵을 두 손으로 말아 쥐었다. 시원한 온도에 정신이 바짝 들었다.

“미안해요, 너무 더워서 그랬나 봐요. 계속 얘기해요.”

그렇지 않아도 주동미의 안색을 살피고 있던 참이었다. 

느긋한 일요일 점심, 권채우가 장을 보고 오겠다며 나간 사이, 왜인지 넋이 나간 얼굴로 주동미가 찾아왔다. 그녀가 발산하던 특유의 능글맞은 생기는 꼭 부서진 이파리처럼 말라 있었고, 눈 밑도 칙칙했다.

“그게……. 말을 꺼내는 것도 너무 어렵고 미치겠슴다…….”

주동미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진실로 괴로운 듯 머리를 감쌌다.

“내 남자가……, 내 남자가 아닌 것 같슴다.”

“……네?”

유리컵 표면에 맺혀 있는 물방울들을 닦아 내던 손길이 우뚝 멈추었다.

“그, 제가 괴롭히는, 아니, 제가 덮쳤던, 아니, 제가 예뻐하는 남자 말입니다.”

“그냥 좋아한다고 해도 돼요…….”

“저는 몸보다 마음이 깊어지는 걸 못 견디지 말임다.”

주동미는 팔뚝을 벅벅 긁어 댔지만 정작 붉어지는 건 귓불이었다. 

이연도 익히 알고 있는 얘기였다. 사귀지는 않지만 만나는 남자가 있다고. 그러나 핸드폰을 꼭 쥐고, 수시로 확인하며, 초조한 듯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자주 목격했던 이연으로선 지금처럼 거들먹거리는 그녀의 말을 적당히 한 귀로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게, 하…….” 

별안간 주동미가 주위를 휘이 둘러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마치 누가 들을까 무섭다는 태도였다.

“사람을 파묻고 있었슴다.”

“……!”

이연은 심장이 뚝 떨어지는 줄 알았다. 평정을 유지하기 어려워 간신히 침만 삼켰다. 

“처음엔 헛것인 줄 알았습니다. 설마, 내가 잘못 본 거라고요. 원장님이나 나나 산 타는 여자들이라 잘 알지 않슴까. 산속에서 얼마나 헛것이 잘 보이는지! 게다가 못대산은 사고 지역이니까 뭔가 흉흉한 게 나한테 들러붙어서 잠깐 오해한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는데 말임다……!”

절박하게 구겨져 있던 주동미의 표정이 점차 냉정을 찾듯 가라앉았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바보는 아니지 않슴까.”

“……!”

이연은 숨을 급히 내쉬고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진짜로 사람을 파묻고 있었슴다. 내 남자가, 나랑 섹스했던 남자가……!” 

“…….”

“저 어떡함니까, 원장님.”

이연은 아직 손도 대지 않았던 아이스티를 한입에 털어 마셨다. 명치에 뭔가가 걸려 도통 속 시원히 내려가지를 않았다. 심장이 벌렁거리고 어지럼증이 몰려오는 것 같았다.

“이걸 원장님께 말하는 이유는…….”

이연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있었다.

“그 못대산에서 말임다. 원장님 가족으로 보였던 그 꽥꽥 목소리만 크고 고질라처럼 생겼던 남자 있잖습니까.”

“아, 네. 사촌 오빠요.”

“네, 그 고질라요. 내 남자가 파묻은 새끼가 그 새끼라서 그렇슴다.”

“……!”

이, 이건 또 뭔 소리야? 이연은 사레가 들러 콜록콜록 마른기침을 해 댔다. 

“그래서 원장님은 뭔가 알고 있지 않을까 해서요. 어쩌면 아는 얼굴일 수도 있고.”

“……저는, 그런 사람은 딱 한 명밖에 몰라요.”

“예에―?!”

불현듯 주동미의 얼굴에 경악이 서린다. 이연으로선 도통 이해 못 할 반응이었다.

“혹시 그 사람이 내 새끼 아닙니까?”

“……네? 아니, 아니에요. 무슨 소릴 하시는 거예요. 그건 내 새끼, 아니……!”

이연이 고개와 손까지 사정없이 저어 가며 부정하다 입을 뚝 다물었다.

이상한 정적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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