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1화 (92/158)

#91

속에서 뜨거운 덩어리가 왈칵 터질 것 같았다.

아무것도 보이질 않으니 세상에는 오직 두 사람뿐이었고, 복잡했던 계산마저 사라지니 감추고 싶은 욕심이 드러났다.

그곳이 어디든 함께 가고 싶다는 욕심.

그러나 이연은 끝까지 입술을 깨물고 버텼다.

“…….”

“…….”

그 침묵에 권채우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모른다. 다만 무서울 정도로 조용했던 그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권채우는 로비를 가로지르는 동안에도 이연의 뒤통수를 아기 다루듯 어깨에 묻은 채였다. 

그의 목덜미에서 맥박이 거칠게 뛴다. 뜨겁게 용솟음치는 박동에 이연은 온 신경이 팔려 있었다.

“이연 씨 몇 호실이에요.”

“그게, 아직…….”

권채우는 더는 묻지 않고 저벅저벅 나아갔다. 분명 줄이 길게 있었던 것 같은데, 어찌 된 일인지 곧장 프런트까지 다가가 이연의 이름을 대고 카드 키를 받는다. 신발 밑창이 바닥을 끄는 소리가 단체로 찍, 난 것도 같았다.

“소이연―! 엄마가 아파. 엄마가 아프다고……!”

“……!”

헐떡이는 목소리가 마지막 발악처럼 이연을 붙잡고 늘어졌다. 그가 말하는 엄마는, 이연에게 있어 이모였고, 그녀를 도맡아 키운 사람이었다. 

어쩔 수 없이 얼굴이 설핏 굳었지만 권채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엘리베이터로 직진할 뿐이었다. 

그럼에도 이연은 멀어지는 사촌의 목소리를 피할 길 없이 들어야했다. 치미는 거부감에 입술을 깨무는 순간, 커다란 손바닥이 이번엔 그녀의 귀를 막아주었다.

“끽해야 일 년 알고 지낸 삼촌 병원비도 네가 댔다면서, 그보다 열 배는 더 마음고생한 우리 엄마는 뭣도 아니야?!”

“…….”

“너 그때 무슨 사례금으로 돈도 잔뜩 받았다면서. 그거 다 어쨌어……!”

문득 권채우의 걸음도 멈춘 것 같았지만 찰나였다. 그의 걸음 수에 맞춰 다시 몸이 흔들렸다. 이연은 귀를 틀어막은 채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한편, 권채우는 싸늘하게 식은 얼굴로 잠입 중인 장범희를 곧장 찾아내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소리 없이 나타난 장정 하나가 여전히 악을 쓰고 있는 사촌을 로비 밖으로 끌어냈다. 

이 시끄러운 소란을 숨죽인 채 보고 있던 주동미의 눈이 별안간 커다래진다. 

그녀는 두 남자가 감쪽같이 사라진 자동문 밖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 * *

카드 키로 방문을 긁고 들어간 권채우는 이연을 내려놓자마자 벽으로 밀어붙였다. 

간신히 냉정을 유지하고 있던 얼굴이 산산이 부서지고 날 것의 무언가가 으르렁댔다.

“왜 하필 나한테 그딴 꼴을 보였어요.”

그는 유리 조각을 잘근잘근 씹듯 읊조렸다. 벽에 부딪힌 어깻죽지가 쓰라렸지만, 사납게 날뛰는 그의 눈빛에 이연은 숨도 쉬지 못했다.

“그냥 지나치지도 못하게 사람을 기어이 나서게 해 놓고. 고작 한다는 말이 남편 아니야, 결혼한 거 아니야, 착각이야. 씨발,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

그는 벽을 짚고 있던 팔뚝에 제 이마를 짜증스레 문질렀다. 그 바람에 권채우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게 됐지만 콱 구겨진 미간과 딱딱한 입매만큼은 선명했다. 

이연은 가슴팍이 들썩거릴 정도로 거칠어진 그의 호흡에 어깨를 굳히고 숨을 죽였다. 동시에 제 배려를 몰라 주는 남자가 야속했다.

“……내가 다 설명했잖아요. 나는 권채우 씨가 그런 상황에 엮이는 게 싫었다고.”

목소리에는 울음기가 가득 배였지만 끝끝내 울지는 않았다. 그저 여린 새처럼 흉곽이 가냘프게 부풀어 올랐을 뿐이다.

“대, 대체 어떤 여자가, 자기 남편 욕 먹이는 짓을 해요.”

“…….”

“쪽팔린 건 나 혼자면 돼요. 권채우 씨는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초년생인데, 아내 태생이 막장이더라, 찝찝하더라, 그런 말이 나돌면 어떻게 되겠어요. 결국엔 끼리끼리라고 해요.”

“…….”

“겉으로는 그럴 수 있다고 어깨 두드려줄지 몰라도, 속으로는 안 그래요. 조금씩, 조금씩 무시가 섞여 들어가고 우습게 볼 거예요. 채우 씨는 그런 미묘한 시선 받지 말라구요. 내가 그렇게 해 주고 싶었고, 또 그럴 수 있었단 말이에요……!”

말을 하다 복받쳤는지 이연의 눈에서 기어코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졌다. 

그 처연한 얼굴을 말없이 구경하던 권채우의 낯에 알 수 없는 미소가 퍼진다. 찰나였지만 분명 비웃음이었다.

“눈물 나네.”

“……!”

그가 만면에 미소를 띠고 이연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혼자 보기 아깝게 언제 이렇게 진심이 됐어요.”

“……네?”

묘한 뉘앙스에 이연이 되물었다.

“그런데 어쩌죠, 나는 하나도 안 고마운데.”

남자의 커다란 손이 맞아서 터진 이연의 뺨과 입술을 한꺼번에 감쌌다. 살갗이 마주 닿자 욱신거리고 따끔거리는 통증이 뒤늦게 앞다투어 모여들었다.

“날 위해 거짓말 쳐 줘서 고맙다고 할 줄 알았어요? 집에서 키우는 개가 맞고 와도 성질이 뻗치는데, 하물며 나랑 씹질했던 여자가…….”

매서운 눈초리가 그녀의 상처에 정확히 내리꽂힌다. 그가 입을 다문 채 코로 숨을 들이켜자 턱관절이 불끈 솟아올랐다.

“다시는 이런 모습으로 내 눈에 띄지 말아요.”

“…….” 

“다시는.”

그가 냉혹한 눈으로 재차 경고를 새겨 넣었다.

“함부로 빌지 말고, 함부로 맞지 마요.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거짓말도 신물 나니까 그쯤 해요.”

“다음에도 또 그럴 거예요.”

“……뭐라고?”

“또 그럴 거라고 했어요.”

이연이 눈을 부릅뜨고 그를 직시했다.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고집스러운 시선이었다. 권채우는 헛숨을 터트리며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똑같은 일이 벌어져도, 내가 남들 앞에서 채우 씨를 남편이라고 소개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그 말에 권채우는 대뜸 표정부터 굳혔다.

“오빠가 했던 폭언은 전부 진짜고, 내가 갖고 태어난 오물이기도 해요.”

“씨발, 그 새끼는 이름도 없어요?”

이연은 느닷없는 그의 서슬에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눈을 내리깔았다.

“이건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 맞지만 채우 씨는 아니잖아요. 거짓말이 뭐 어때서요. 비겁해 보여도 이게 내 방식이에요…….”

권채우는 그녀의 감정에 전염이라도 된 듯 가슴속이 요동을 쳐 댔다. 올곧고 투명한 주제에 물기에 젖어 일렁이는 눈망울이 예쁘다. 아니, 제법 쓸 만하다.

그러나 여자의 웃기지도 않는 다짐을 듣는 순간, 그는 어금니를 사리물었다. 이연의 사촌들과 태생이 만들어 놓은 상처에 자신이 밀렸다는 것이 분해서. 불쑥 속이 뒤틀렸다.

그녀의 완고한 세계를 비집고 들어가 그보다 더 큰 흉터를 새기고 싶다. 그런 가학적인 충동이 치밀자 이내 비틀린 성질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잘 들어요. 나를 진짜 위하고 싶다면―”

권채우는 여자의 얼굴을 세게 들어 올려 억지로 제 눈을 쳐다보게 했다.

“이연 씨 치부 속으로 내 대가릴 처넣어요. 못 빠져나가게, 더 깊이 가담시켜요.”

“……!”

“이미 이연 씨한테 놀아날 준비가 됐거든요.”

이연은 어두운 불꽃이 튀는 그의 동공을 보며 축축해진 손을 말아 쥐었다. 냉기인지 열기인지 모를 것들이 몸 전체를 휘저으며 급속도로 퍼지고 있었다. 심장이 무서울 만큼 빠르게 뛰었다.

“내가 이연 씨 보짓물도 받아먹은 새끼인데 그깟 오물이 대수일까.”

“……!”

그 순간, 그가 이연의 목덜미를 거칠게 잡아채 입술을 겹쳤다. 흐트러진 숨이 밀려들면서 두 사람의 몸이 빈틈없이 딱 맞붙었다. 두 다리가 섞이고 동시에 혀가 파고들었다.

남자는 고랑처럼 파인 입천장을 훑으며 혀를 문질러 댔다. 그럴 때마다 이연은 꼼짝없이 어깨를 떨며 고개를 위로 젖혔다. 

권채우는 그녀의 머리카락 깊숙이 손을 넣고 두툼한 머리채를 틀어쥐었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그녀의 혀를 쭉쭉 빨아먹었다. 입술이 무아지경으로 섞이는 동안, 아래로는 단단한 성기가 비벼지고 있었다.

“하아…….”

성대에서 낮은 신음이 들끓었다. 

자신을 기만한 여자인데, 권기석과 모종의 관계가 있는 여자인데. 권채우는 스스로도 혼란스러웠다. 

소이연이 자신을 기만했던 것처럼, 그도 똑같은 방식으로 그녀를 속이고 뻔뻔하게 남편 행세를 이어나갈 생각이었다. 이 여자를 버리고 떠날 그날까지. 

그러나 지금 그가 하고 있는 이 짓이 과연 연기의 일환인지 아닌지 구분 짓기 어려워서. 죽을힘을 다해 밀쳐 내야 하는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힘껏 끌어당겼다. 

어쩌지 못하고 속으로 욕설을 짓씹은 남자는 이연의 가느다란 목을 기울여 입술을 더욱 집어삼켰다.

설명할 수 없는 환희가 낯설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살점을 빨고 축축한 점막을 건드릴수록, 그리웠다는 감각이 물결처럼 퍼졌다. 

녹아내릴 듯 부드러운 혀의 감촉. 그녀를 쑤시듯 내리누르는 콧날. 그의 얼굴을 데우는 이연의 신음. 혀뿌리에서 샘솟는 타액은 나오는 족족 순식간에 바닥이 났다.

그는 이연의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가 이로 긁어내렸다. 점점 가빠지는 그녀의 신음이 달았다.

그 다양한 자극에 권채우의 신경 줄은 제각각 다른 소리를 내며 위태롭게 흔들렸다. 모든 음계를 다 꿰고 있던 그로서도 감히 이름 붙일 수 없는 것들이었다. 형언할 수 없는 안도감이 남자를 깊이, 더 깊이 끌어내렸다.

“읏, 채, 하아…….”

동시에 키스가 익숙해 보이는 이연을 보자 다른 의미로 머리에 불이 붙었다.

씨발, 누구랑 그렇게 입술을 부볐길래. 

권채우는 매섭게 추궁하고 싶었지만 그거야말로 볼썽사나운 짓이었다. 

이렇듯 뿌리를 알 수 없는 독점욕은 순간순간 그를 다른 사람처럼 변모시켜서.

“……앞으로는 어쭙잖은 배려 말고, 이연 씨가 가진 걸 내놔요.”

“하아…….”

“네가 기를 쓰고 숨기려는 좆같은 가족이라도 좋으니까.”

서로를 향한 목소리와 눈빛, 그리고 누구의 것인지 모를 뜨거운 숨결이 두 사람 사이를 꽉 메우고 있었다. 그가 이연의 입술에 대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내가 씹을 수 있게 당신의 조각을 던져.”

“……!”

“개는 그렇게 다루는 거예요.”

이연의 얇은 린넨 셔츠가 쫘아악― 찢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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