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하하, 소이연……, 네가 연락 다 끊고 살더니 예의범절까지 홀라당 까먹었나 보지?”
남자가 이연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밀었다. 선명한 악의가 그의 동공에 미소처럼 고인다.
그 익숙한 시선을 받고 있자니, 이연은 자신이 얼마나 비참함을 잊고 살았는지 불현듯 깨달았다. 권채우의 애정과 보호가 그렇게나 단단했었던 것이다.
“너 이대로는 안 되겠다.”
턱을 악다문 사촌이 이연을 질질 끌어낼 때였다.
마침 자동문이 열리고 똑같은 저지를 입은 무리가 안으로 들어왔다. 이연은 귀싸대기를 두 대나 맞았음에도 동요하지 않던 심장이, 눈에 익은 저지의 로고를 보는 순간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녀가 허둥대는 사이 몸은 지푸라기처럼 쉽게 딸려 갔고, 동시에 권채우와 눈이 마주쳤다.
“……!”
“…….”
부어터진 뺨과 피가 비치는 입술을 확인한 그가 싸늘하게 굳는다. 그 단순한 표정 변화에도 이연은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사촌 오빠는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 낄낄대며 소를 끌고 가듯 움직였다.
“형이랑 누나들이 없으니까 나라도 정신 똑바로 차려야지, 안 그러냐?”
그가 손아귀에 힘을 주며 사뭇 비장하게 읊조렸다.
“……갈 거면 얼른 가요.”
“뭐?”
“답답하게 뭉그적대지 말고 빨리빨리 데리고 나가라고요.”
“허……!”
이연이 목소리를 한껏 낮춰 사촌을 재촉했다.
권채우에게, 그리고 그의 팀원들에게, 이런 치부를 보이면 안 된다는 생각이 불호령처럼 내리꽂혔다. 자신 때문에 권채우의 평판이 깎여선 안 된다고.
이연은 집단 속에서 사람이 어떻게 고립되는지를 질리도록 겪어 봤기에 그에게만큼은 이 더러운 추문이 묻지 않길 바랐다. 그렇게 너절한 기분을 감내해 가며 눈을 질끈 감을 때였다.
“소이연, 눈 떠.”
“……!”
귓가를 파고드는 목소리에 흠칫 소름이 끼쳤다. 고압적인 명령이 서려 있는 짤막한 음성에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눈이 번쩍 뜨였다.
“나를 봐 놓고도 왜 시선을 피하는지 모르겠네. 그것도 남편이 오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채, 채우 씨.”
“이 새끼 가죽 벗겨놓기 전에 설명해요.”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권채우가 선득한 시선을 보내며 읊조렸다.
“얼굴은 다 터져 놓고 어디를 그렇게 급하게 가는지. 어차피 곧 반병신 될 새끼랑 빨리빨리 나가서 뭘 할 생각이었는지―”
“씨팔, 넌 뭐야?!”
“이연 씨, 내가 묻잖아요.”
그때 사촌 오빠가 눈을 부라리며 권채우의 어깨를 퍽 쳤다. 그럼에도 그는 동요 없이 이연을 뚫어져라 쳐다볼 뿐이었다. 특히나 그녀의 불그스름한 뺨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표정은 백지처럼 고요했지만 가늘어진 동공은 달랐다. 대답을 듣기 전까진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겠다는 비상한 집착이 느껴져서. 이연은 다급히 두 사람 사이로 끼어들었다.
“저, 저기 오빠, 경솔하게 말하지 말고―”
혹여 사달이라도 날까 얼른 제 사촌 오빠부터 만류했다. 그러자 대뜸 반응을 보인 건 권채우였다.
“……오빠?”
그가 이연을 향해 느릿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지금 제가 들은 것이 맞느냐고 확인받듯이.
내내 탈색된 것 같던 남자의 얼굴에 마침내 표정이라 부를만한 것이 생겼다. 그는 여유가 사라진 목소리로 그녀를 매섭게 추궁했다.
“무슨 오빠요. 이연 씨가 오빠라고 부를 만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권채우의 눈가 어딘가가 경련하듯 떨렸다.
“모텔로 들어가는 것보다 얼른 나가자고 조르는 것도 기가 막히는데. 대체 무슨 오빠?”
이연은 그의 시퍼런 눈초리에 꿀꺽 침만 삼켰다. 입이 얼어붙어 꼼짝도 안 했다.
“이래서 모른 척하자고 했어요? 손찌검이나 하는 새끼랑 몰래 만나서 남편 속 뒤집으려고?”
“그, 그런 거 아니에요, 사촌 오빠예요……!”
“사촌?”
권채우는 일전에 장범희가 알려 주었던 소이연의 가정사를 떠올리곤 천천히 입꼬리를 늘였다.
“아아, 그 좆같은 덩어리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사촌의 머리통을 꽉 쥐었다. 그러자 자잘한 관절이 손아귀 위로 팽팽하게 튀어 올랐다.
자존심이 뭉개진 상대는 느닷없이 쪼여 오는 손을 치워 보려 했으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점혈이 눌린 그는 아아악―! 하고 굵은 신음이나 터트릴 따름이었다.
“으으윽……! 씨팔, 남편? 남편이라고?”
그는 권채우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볼썽사납게 바닥을 나뒹굴었다. 이윽고 독기에 찬 사촌이 험상궂은 얼굴로 고래고래 외치기 시작했다.
“세상이 이렇게 불공평해서야 되겠냐? 네가 망쳐 놓은 사람 머릿수가 대체 몇 갠데, 그동안 너는 남편 만나 시시덕거리면서 살았데?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 엄마, 이모부, 형, 누나들. 네가 멀쩡한 사람 행세하면서 결혼이나 처할 동안, 우리는 정신과 다녔어, 씨팔!”
이연은 온갖 시선이 이쪽으로 쏠리는 것 같자 눈두덩이가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사촌들의 자기연민은 어릴 적부터 극치에 달해있었다. 작게는 연필심이 부러지거나 걷다 넘어지는 일부터, 크게는 시험에 낙방하고 재산을 탕진하는 일까지. 그들 개인의 불행은 전부 부적절하게 태어난 이연의 탓이 되었다. 그런 저열한 관성에 젖어 산 지 오래였다.
“네가 평범하게 누릴 거 다 누리고 사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한편, 권채우는 팔짱을 낀 채 시시각각 변하는 이연의 안색을 주시하며 잠복 중인 장범희를 향해 수신호 몇 가지를 보냈다.
“우리 집 식구 중에 정신병 안 달고 사는 사람이 없어. 죄다 어디 하나씩 망가져서 병원에 갔더니 그러더라. 잘못한 사람은 따로 있는데 왜 애먼 사람들이 고생하는지 모르겠다고. 생판 남도 이렇게 우리를 이해해 주는데, 대체 너는 뭐야? 지 혼자 잘 살겠다고 번호도 바꾸고, 주소도 안 남기고 튀는 게, 그게 사람이야? 씨팔, 인간이냐고!”
“…….”
그는 보란 듯이 목소리를 키웠고 역시나 수군대는 목소리들이 일시에 쏟아졌다. 이연은 수많은 시선들 때문에 얼굴이 타는 듯했다.
하지만 이런 말 없는 비난쯤이야 대수롭지도 않다. 단지, 권채우와 그의 직장 동료들이 미치도록 신경 쓰여서.
“불륜한 연놈도 결국엔 네 부모라 이거야? 너도 가족보다 남자가 더 중해? 그래서 남자랑 붙어먹느라 가족은 내팽개쳤어? 안 봐도 뻔하지, 네 남편이란 작자도―”
결국 이연은 덩달아 바닥에 주저앉아 사촌의 입을 세게 막고 말았다.
“제발……. 이만하면 됐잖아. 더는 말하지 마.”
“……!”
전에 없던 그녀의 돌발 행동에 사촌의 눈이 커다래졌다.
“부탁이니까 여기까지만 해.”
이연은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그를 노려보았다. 제발, 그만해. 내 소중한 사람까지 먹칠하진 마.
살면서 못 견디게 힘든 순간들이 더러 있었지만, 지금처럼 제 자신이 초라했던 적은 없었다. 이연은 차마 권채우를 올려다보지도 못했다.
“저 사람, 내 남편 아니야. 나 결혼한 거 아니야. 오빠 착각이야.”
“으읍!”
이연은 붙잡힌 손목이 꺾일 것처럼 아팠지만 필사적으로 버텨 냈다. 발발 떨리는 손으로도 그의 입을 짓누르듯 막았다. 여전히 주동미를 포함한 그의 동료들이 심각하게 이쪽을 쳐다보고 있어서. 어떻게든 권채우에게 묻은 그을음을 닦아 주고 싶어 안달이 났다.
“오빠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니까 말 함부로 하지 마. 차라리 나가자. 쌓아둔 얘기는 내가 다 들을 테니까 그런 말은 나한테만 해.”
“으읍, 퉤!”
사촌은 그녀의 손목을 뿌리치며 바닥에 침을 뱉었다.
“씹, 너 이게 무슨……!”
“거기서 한 발짝이라도 움직여 봐요, 이연 씨.”
“……!”
그때 이를 빠득 가는 그의 목소리가 이연의 발목을 잡았다.
“남편이었다가, 아니었다가, 이연 씨 변덕에 왜 이렇게 화가 치미는지 모르겠는데. 지금은 다정할 자신 없으니까 기어서라도 와요.”
“채우 씨, 이건―”
“저딴 개소리는 들어서 어디에 쓰게.”
“그…….”
“됐고. 이리 오라고 했어요.”
그럼에도 그녀가 주위 눈치를 보며 머뭇거리자 권채우가 살기 띤 음성을 벼락같이 터트렸다.
“소이연!”
흠칫 놀란 이연이 반사적으로 일어섰다.
그 미묘한 대치 상황을 지켜보던 사촌이 그녀를 향해 악귀처럼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보다 앞선 권채우가 이연을 번쩍 안아 올리며 사촌의 얼굴을 발로 찍어 눌렀다.
그는 남자의 뒤통수를 짓이기듯 밟고 섰다. 사촌은 바닥을 팡팡 두드리며 상스러운 욕설을 연신 뱉었고, 그럴 때마다 권채우는 그의 머리통을 거듭 깨부수었다.
퍽, 퍽, 퍽, 잔인하지만 고도로 절제된 동작이 끊임없이 이어지자 구경꾼들은 금세 하얗게 질렸다. 그러나 누구 하나 나서서 말리는 이가 없었다.
권채우는 표정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채 이연에게 여상히 물었다.
“사람 눈 돌아가게 하니까 재미있어요?”
“……으윽, 씨, 씨팔, 너 아까부터 뭐야?”
“그러게요, 이연 씨. 나는 대체 누구예요?”
그는 발꿈치를 가차 없이 내리찍으며 시험하듯 질문을 넘겼다. 이연은 흔들리는 눈으로 권채우의 날카로운 시선을 받아 냈다.
바닥을 쿵쿵 찧으며 박 터지는 괴이쩍은 소리가 계속해서 울렸지만, 권채우는 여전히 그녀만을 바라보았다.
“이연 씨가 말해 봐요.”
“나, 나는 채우 씨가 창피할까 봐 그랬어요.”
이연은 그의 어깨에 두르고 있던 팔을 느슨하게 풀었다. 그러나 그녀의 겨드랑이며 무릎 뒤를 받치고 있는 남자의 손길은 굳건하고 뜨거웠다.
“이런 골 아픈 소란에 휘말리지 않게, 기분 나쁜 일은 안 당하게 해 주고 싶었어요. 여기 있는 사람들 좀 둘러봐요. 다들 어떤 눈빛인지.”
이연은 몸을 웅크리듯 고개를 숙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러니까 지금은 내 남편이 아닌 걸로 해요. 그래 줄 수 있잖아요.”
그 순간 권채우가 그녀의 머리를 눌러 제 어깨에 푹 파묻히게 했다. 별안간 뭇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차단되어 눈앞이 깜깜해졌다. 고개를 돌릴 수 없도록 뒤통수를 압박하는 힘이 제법 묵직했다.
“이제 다시 말해 봐요.”
“……!”
간질간질한 접촉과 달큼한 체취에 심장이 끝 모르게 뛰었다. 그때 낮은 음성이 고막을 재차 파고들었다.
“내가 누구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