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하……, 아는 척을 하지 말라?”
이불을 들추고 들어오려던 권채우가 픽 비웃음을 흘렸다.
“그 많은 부정행위들을 두고 하필이면 나부터 부정할 줄은 몰랐는데요.”
어느새 다가온 취침 시간.
이연은 이불 테두리를 꽈악 붙잡은 채 일자로 누워있었다. 그녀는 공문을 받고부터 내내 생각했던 당부를 그에게 막 건넨 참이었고, 남자는 듣자마자 표정을 바로 구겼다.
“그래서, 낮에는 모른 척하고 밤에만 몰래 들어와라?”
권채우는 웃기지도 않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침대 안으로 들어왔다. 매트리스 반쪽이 채워지고 그가 기압처럼 밀려들었다. 이불을 방탄조끼처럼 붙들고 있던 이연의 손가락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이연 씨는 내가 그런 쓰레기였으면 좋겠어요?”
“아니, 뭔가 오해가―”
“그런 걸 원한다면 굳이 사양하진 않을 건데, 자신 있어요?”
“네?”
“저번에는 고작 좆 한 번 빨았다고 울었잖아요.”
“……!”
“잘 생각하고 말해요.”
권채우는 이연의 말캉한 입술을 톡 건드리며 회유하듯, 혹은 협박하듯 기다려 주었다. 그러나 신중하면 신중할수록 현장에서의 잡음은 덜 날 것이다.
“그래도……, 조심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이미 다른 병원이 유리한 상황을 선점했는데도 몸만 사릴 생각이에요?”
그가 한쪽 손으로 얼굴을 괸 채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정치질이 먹힐 만한 구멍을 만들어 뒀다는 건 지극히 의도적인 거고, 이제 거슬리는 병원은 떨어뜨리겠다는 뜻이에요. 안됐지만 이연 씨는 여기까지예요.”
“…….”
“이번 심사에서 누굴 뽑을지는 이미 정해진 사안이라고 봐야 해요. 거기에 진심으로 달려들면 이연 씨만 놀아나는 꼴이에요.”
그가 건조한 눈으로 더없이 탁하게 내뱉었다. 이연은 움찔했지만 납득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끝까지 해 봐야 아는 거잖아요.”
“글쎄요, 나는 윗물이 맑았던 적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어디서 봤는데요?”
이연이 눈 밑까지 이불을 끌어 올리며 조심스레 물었다. 흔들리는 그녀의 동공을 본 권채우는 이내 천천히 표정을 바꾸었다. 냉랭하게 메말라 있던 안면이 거짓말처럼 풀어지면서 이연의 머리카락에 코를 문질러 댄다. 이런 자잘한 스킨십은 그가 자주 하던 것이었고, 그래서 이연은 쉽게 마음을 놓아 버렸다.
“밖에서 일하면서죠.”
“…….”
“왜요? 식물인간이었던 주제에 그런 말을 하니까 영 못 미더워요?”
“네에, 조금은.”
이연이 장난치듯 뻔뻔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권채우는 별처럼 반짝거리는 그녀의 눈을 손바닥으로 덮으며 다소 이르게 밤 인사를 건넸다.
“얼른 자요.”
“채우 씨도 잘 자요. 꼭 내일 아침에 다시 보구요.”
눈꺼풀을 감은 이연이 그의 팔뚝을 힘껏 끌어안았다.
권채우는 그녀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며 품 안의 여자가 곤히 잠들기를 기다렸다. 익숙한 손길, 규칙적인 박자. 찌르르, 찌르르 풀벌레만이 고요 속에서 울고 있었다. 권채우는 그녀의 숨소리가 아기처럼 고르게 들릴 때까지 어두운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그의 형형한 눈동자 속에 잠기운은 하나도 없었다.
진짜 집으로 돌아가야 했던 열세 살 이후, 권채우는 그 누구와도 이렇게 살갗을 마주 대고 자 본 적이 없었다. 새근새근 세상모르게 잠든 소이연을 보고 있노라면 몸이 제멋대로 날뛰고, 피가 급격하게 돌고, 또다시 페니스가 딱딱해졌다. 여자를 홱 밀쳐 내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남자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제 의지보다 앞서는 몸의 반응을 볼 때마다 패배한 기분이 들었다. 그건 심연의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가짜 권채우에게 주도권을 빼앗긴 것이라고.
“이 새끼는 밥 먹고 그 짓만 했나.”
혀에 기름칠을 한 듯 다정한 척 구는 것도 가끔은 속이 메슥거렸다. 발발 떠는 똥강아지도 아니고, 매번 이연 씨, 이연 씨.
그럼에도 복종하듯 머리를 부비고, 빈틈없이 서로를 껴안고, 길고 진하게 눈을 맞추는 일련의 동작들이 습관처럼 익숙했다.
이미 잘 닦여진 길을 따라 걷기만 하면 되는 같잖은 흉내. 그러나 그건 또 그거대로 달갑지 않은 일이라 기분은 매번 땅바닥을 쳤다.
“으음, 권채우 씨…….”
남자는 마침 들려온 소리에 귀를 긁으며 인상을 썼다.
간지럽게 중얼거리는 저것이 제 이름이 맞나.
“……씨발.”
권채우는 턱을 불끈 악물고 그녀에게서 팔을 신경질적으로 빼내었다.
길어 봤자 일주일.
권채우는 그 안에 화이도를 벗어날 생각이었다.
* * *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거 손 참 빠르네……!”
이연은 등 뒤에서 구시렁거리는 솔개 나무 병원 박 원장의 목소리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가 화이도를 벗어나는 건 아주 오랜만의 일이었다. 해상 다리를 건너 김해까지 단숨에 갈 관광버스. 이연은 그 커다란 단체 버스에 올라타 비좁은 복도를 지나고 있었다. 아까부터 자꾸 여봐란듯 군소리를 지껄여 대는 박 원장만 아니었다면, 출장길의 시작은 훨씬 가벼웠을 것이다.
“역시 젊은것들은 무섭다니까, 무서워.”
“…….”
“소 원장, 대체 무슨 수를 쓴 거여?”
그가 이연의 등판을 쿡쿡 찌르자 그녀가 기겁을 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명품 의류로 치장한 박 원장은 브랜드 커피를 쭉 빨고 있었다. 현재 쓰고 있는 선글라스마저도 휘황찬란한 로고가 경첩 부근에 박혀 있다는 것만 빼면 어디에서나 볼 법한 중년 남성이었다.
이연은 시꺼먼 렌즈 위로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보며 딱 잘라 말했다.
“등 찌르지 마세요.”
“아니이, 나도 좀 같이 알자고. 대체 뭘 어쨌길래 동물 센터 사람들이 소 원장만 알아보고 달려와? 가문비가 그렇게 고객이 많은 곳도 아니잖아. 여기 사람들한테 커피 돌린 건 난데 대체 뭔 짓을 한 거여?”
“…….”
“요즘 같은 더위에 에어컨보다 더 죽이는 게 있었나?”
여기 사람들이 신입을 너무 귀하게 여겨서요…….
이연은 창가 쪽 자리에 몸을 구기듯 집어넣었다.
그렇지 않아도 난감하던 참이었다. 구조센터 직원들은 박 원장이 통 크게 돌린 수십 잔의 커피를 넙죽 받으며 동시에 이연에게 다가와 꼭 아는 척을 하고 갔다.
일부러 권채우와 마주치지 않기 위해 멀찍이 떨어져 있었는데도 소용이 없었다.
“에이, 말 좀 해 보라니까. 젊은 사람들 감각은 달라도 뭔가 다를 거 아니야.”
뒷좌석에 앉은 그는 고개를 앞으로 쭉 내밀면서까지 물어왔다.
“그런 거 없어요.”
“아 거참, 소 원장도 뭔가 돌렸잖아. 치사하게 혼자만 시치미 떼지 말고오―!”
진짜 말하기 좀 그래요…….
내가 돌린 게 아니라, 같이 사는 남자가 본의 아니게 그쪽에서 구르고 있다고 어떻게 말해요.
이연은 괜스레 목청을 가다듬으며 외면하듯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얇은 집업 저지를 입고 있는 누군가의 뒷모습에 곧장 시선이 박혀 들었다.
전부 같은 바람막이를 입고 있는 센터 사람들 중에서 머리 하나만큼이나 훌쩍 큰 남자. 곧고 넓은 어깨와 새까만 머리카락을 가진 그는 멀리서도 쉽게 눈에 띄었다.
권채우는 무심한 얼굴로 고개를 짧게 끄덕이거나 미간을 좁히며 주동미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가문비랑 붙으면 운이 지지리도 없다는 말이 있던데, 나는 그거 안 믿거든.”
하나, 둘, 셋, 넷, 이연은 들려오는 말을 무시한 채 센터 사람들의 머릿수를 세기 시작했다.
그늘 한 점 없이 뙤약볕이 속수무책으로 떨어지는 한여름의 날씨. 그 속에서 청량하게 반사되는 권채우의 희멀건 낯빛은 많은 이들의 이목을 끌었다.
벌써부터 땀으로 번들거리는 뭇사람들과 달리, 빳빳하게 잘 다려진 하얀색 셔츠 같은 얼굴. 불쾌한 습기 하나 묻어나지 않는 남자는 그 무리에서 가장 이질적인 존재였다. 그녀는 여전히 쓰라린 입 안쪽을 혀로 쓸어 보며 희미한 불안을 내리눌렀다.
“소 원장, 내 말 듣고 있어? 왜 센터 직원들이 소 원장만 반기냐고오.”
이윽고 센터 직원들이 우르르 버스에 올라타자 실내는 금세 시끌시끌해졌다.
그때 목을 슬쩍 굽히고 좌석 사이로 걸어 들어오는 권채우와 눈이 마주쳤다. 여름용 집업 저지를 체대생처럼 소화하는 남자를 보며 이연은 심장이 술렁거렸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홀린 듯 박 원장에게 답변을 했다.
“……여기에 아는 얼굴이 있어서요.”
“그래? 누군데? 팀장? 아니면, 센터장?”
그러나 권채우는 무미건조하게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집을 나서기 전, 몇 번이고 아는 척은 하지 말자고 서로 타협을 봤음에도 불현듯 기습을 당한 것처럼 머리가 멍했다. 제 품에서 자고, 제 품에서 깨어나는 남자의 연기에 이렇게까지 흔들리다니. 우스운 일이었다.
“아는 사람이 대체 누군데 그래?”
박 원장은 이연의 어깨를 쿡쿡 찌르며 재촉했고, 그녀는 좌석 밖으로 삐져나온 권채우의 팔과 머리카락을 응시하며 말했다.
“아직은……, 저도 잘 모르겠어요.”
“뭐? 무슨 대답이 그래?”
버스가 못대산에 도착할 때까지, 권채우는 한 번도 이연의 자리를 뒤돌아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