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거기서 멀뚱히 뭐 해요? 와서 안 안아 줄 거예요?”
웃음기가 배인 말에 이연은 눈가를 한 번 쓸고 그의 허리를 뒤에서 껴안았다.
“……채우 씨, 어제 어떻게 된 거예요? 내 옆에서 잤어요?”
“제대로 자고 일어났어요.”
“……!”
이연은 어떻게든 권채우의 표정을 보고 싶어서, 그의 겨드랑이 사이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 적극적인 태세에 흠칫 놀란 남자는 프라이팬부터 높이 들어 올렸다.
“이연 씨, 기름 튀잖아요.”
그가 이연의 얼굴 반절 가량을 손으로 덮으며 다소 매섭게 주의를 주었으나 그녀의 시선은 또랑또랑할 뿐이었다.
“정말로 자고 일어난 거예요? 나, 다시 효과 있어요?”
“무사히 잘 깼고, 악몽도 안 꿨어요.”
“진짜죠? 거짓말 아니죠?”
“거짓말 아니에요.”
그녀의 눈동자에 기쁜 기색이 빛처럼 번졌다. 권채우는 부르튼 입술로도 순하게 웃어 보이는 여자를 가만히 응시하다 고개를 돌렸다.
“악몽은 다른 사람한테 옮겨 간 건지도 몰라요.”
“옮겨 가요?”
그녀가 되물었으나 권채우는 뜻 모를 미소만 지었다.
“얼른 식탁에 앉아요.”
이연은 괜한 아쉬움에 그를 힐끔거리며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끼익, 의자 끄는 소리가 들리자 권채우는 애써 유지하고 있던 미소를 싹 허물어트리고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하룻밤, 아니 일주일 정도는 능히 자지 않고도 버틸 수 있다. 그가 밥 먹듯이 했던 게 바로 그런 훈련들이었다.
어젯밤, 함께 밤을 새우자는 말이 무색하게도 이연은 침대에 올라가자마자 잠이 들었다. 가끔씩 채우 씨, 하고 잠꼬대하듯 그의 이름을 중얼거릴 때면 절로 인상이 구겨지고 배알이 뒤틀렸다.
언제나 풍경처럼 간직했던 얼굴.
저보다 키도 크고 나이도 많은 누나 주제에 늘 울상이었던 못난이. 커다란 나무 밑에 앉아 무릎을 세우고 얼굴을 자주 파묻었던 소녀.
그러나 첼로 연주가 바람결에 흘러 들어가면 소녀는 하늘과 땅을 휘휘 올려다보거나 허리춤에 두 손을 얹고 고개를 연신 갸웃거렸다. 제 음악을 들으면서 울고, 웃고, 낮잠을 자고, 노래를 흥얼거리는 모습은 우중충했던 첫인상과는 달리 생기가 넘쳤다.
허름한 창문 밖으로 언덕 아래의 소이연을 구경하는 것은 당시 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했던 권채우의 유일한 취미였다. 산간 오지에 숨어 사람들과 일절 교류를 하지 않던 어머니였기에 열세 살 아이의 세계는 그만큼 좁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이름 모를 누나는 소년의 첫 번째 관객이었고, 또 다른 세상이었으며, 사계절이었다.
녹음이 우거지고, 단풍이 물들고, 나뭇가지에 눈이 쌓였다가 다시 분홍색 꽃봉오리가 올라와도 소녀는 늘 그곳에 왔으므로.
“엄마, 맨날 똑같은 자리에 있는 건 뭐라고 불러요?”
“글쎄, 나무일까?”
“그치만 나무보다 훨씬 작고 예뻐요.”
“아하, 그럼 꽃이지.”
권채우는 매일매일 창문을 닦으며 그녀를 기다렸다. 작은 손바닥으로 유리창을 짚고 소녀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노라면 뜨거운 입김이 창가를 뿌옇게 적시기 일쑤였다.
낡고 덜컹거리는 창틀은 나무와 소녀를 가두는 액자였고―
“……우 씨, 권채우 씨!”
그건 소년이 가진 모든 것이기도 했다.
“채우 씨, 괜찮아요?”
남자는 제 팔뚝을 붙잡고 흔드는 힘에 고개를 퍼뜩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연이 그를 걱정스럽게 쳐다보고 있었다. 권채우는 저도 모르게 그녀의 잔머리를 넘겨 주려다가 멈칫, 주먹을 쥐고 손을 거두었다.
이런 얼굴로, 이런 목소리로, 손가락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서 왔다 갔다 하니 그런 허술한 거짓말에도 속아 넘어간 거겠지.
“별거 아니에요, 잠깐 딴생각 좀 했어요.”
“무슨 생각이요?”
“그냥, 이연 씨 처음 만났을 때요.”
“…….”
그러자 이연이 흠칫하며 시선을 어색하게 돌린다.
거짓말쟁이.
권채우는 속으로 비딱하게 읊조렸다.
그는 쓸데없었던 감상들을 가벼운 피로와 함께 털어 버렸다. 이윽고 접시에 음식을 옮겨 담은 남자는 여유롭게 식탁으로 다가갔다. 오랜만에 함께 하는 아침이었다. 이연은 그가 내미는 포크를 건네받고 얼떨결에 노릇노릇 잘 구워진 소시지부터 한 입 베어 물었다.
“……근데 채우 씨, 혹시 손가락 아파요?”
“아니요, 왜요?”
“어…….”
남자는 시원스레 입을 벌려 음식을 여상히 먹고 있었고, 이연은 그의 한쪽 손을 보며 잠시 머뭇거렸다.
“……왼손으로 젓가락질하는 건 처음 봐서요.”
그 말에 권채우는 잠깐 멈칫하더니 자연스럽게 볶은 야채를 집었다.
“이연 씨는 몰랐어요?”
“네?”
“불편하지 않은 거 보니 원래부터 양손잡이였던 거 같은데.”
“어, 그게…….”
권채우는 턱을 다물고 음식물을 씹으면서도 이쪽을 빤히 주시했다. 그 날카로운 시선에 이연은 바짝 긴장하고 말았다.
“내, 내 앞에선 오른손을 자주 쓰길래요.”
“그랬어요?”
이연은 고개를 어설프게 끄덕이며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러자 손가락만 꼼지락거릴 뿐, 식사는 하는 둥 마는 둥 하는 그녀에게 별안간 권채우가 제 소시지를 덜어 주었다.
그는 얼결에 다시 포크를 집어 든 이연을 쳐다보며 물을 마셨다. 꿀꺽 꿀꺽, 목젖이 잇따라 물을 받아 넘기는데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권채우는 원인을 알 수 없는 갈증이 치밀어 결국 한 컵을 전부 마시고 말았다.
“후우…….”
모종삽으로 흙을 팡팡 다지던 이연이 손등으로 이마를 훔쳤다. 그녀는 무릎을 쭈그리고 앉아 지난 한 달간 방치해 두었던 화단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권채우가 깨어났다는 소식에 추자와 주동미가 집에 들렀다 간 것도 고작 몇 시간 전이다. 이연은 한차례 소란스러웠던 순간을 무사히 넘기고, 지금은 단둘이 독대 중인 두 사람을 틈틈이 힐끔거렸다.
‘안―! 니다……!’
마침 주치의의 손짓이 커졌다.
이연은 유리창으로 된 몰딩 도어 너머로 두 사람의 입 모양과 표정을 보기 위해 고개를 점점 쭉 내밀었다.
‘―면…… 할 수……!’
‘…….’
그녀는 목청을 높이는 의사와 심드렁하게 팔짱이나 끼고 앉은 권채우를 초조하게 번갈아 보았다.
그 순간, 이쪽으로 귀신같이 고개를 돌린 남자가 매정하게 한쪽 커튼을 홱 쳤다.
“아……!”
이연은 저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고 말았다. 손바닥만 한 삽을 얼마나 세게 붙잡고 있었던지 손아귀가 다 아릴 지경이었다. 이연은 눈에 보이는 잡초를 기계적으로 뽑으며 입맛만 쩝 다셨다.
그때 대문 밖에서 누군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상대를 확인한 그녀는 선선히 웃으며 허리를 펴고 일어났다.
“규백이 왔어?”
그러나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후다닥 달려온 아이는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발을 동동 굴렀다. 그 심상치 않은 모습에 이연의 얼굴도 덩달아 굳어졌다.
“규백아, 왜 그래?”
“으으…….”
규백이는 앓는 소리를 내며 이연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원장 선생님. 원장 선생님.”
“규백아, 너 어디 아파?”
“수컷 거미는 짝짓기 도중 자신의 다리를 암컷에게 먹입니다.”
“뭐?”
이연은 그 말속에 담긴 으스스함을 읽고 얼굴을 찌푸렸지만, 규백이는 그저 무표정하게 문장만 읊어 댈 뿐이었다. 그러나 평소 높낮이가 없던 아이의 목소리가 오늘따라 다급하게 느껴진다. 그 미묘한 차이에 이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원장 선생님은 그거 먹으면 안 됩니다.”
“규백아,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암컷을 달래기 위한 전략입니다. 아무리 맛있어 보여도, 꼭 필요해 보여도 절대 받으면 안 됩니다. 앞으로 원장 선생님은 수컷이 주는 건 받아먹으면 안 됩니다. 약속입니다. 빨리 약속합니다.”
규백이가 새끼손가락을 내밀고 짤짤 흔드는 순간―
“이연 씨, 뭐 해요?”
현관문을 열고 권채우가 느긋하게 걸어 나왔다. 그 모습에 어깨를 움칫 떤 규백이가 이연의 등 뒤로 재빨리 숨어들었다. 그녀는 아이의 예민한 반응이 신경 쓰여 규백이만 알아들을 수 있도록 목소리를 낮추었다.
“규백아, 너 저번에 수놈 찾았잖아. 가서 안 놀려?”
“아닙니다, 아닙니다.”
“응?”
“원장 선생님. 원장 선생님 큰일 났습니다. 으으…….”
규백이는 자기 입술을 꼬집듯 붙잡고 다시 끙끙거렸다. 심각해진 이연이 아이의 행동을 말리려는데 어느새 코앞까지 권채우가 다가와 있었다.
“꼬맹이에요?”
그러자 규백이는 귀를 막고 백과사전을 읊기 시작했다.
“풀색꽃무지는 한여름에는 드문 풍뎅이입니다. 낮에는 꽃 속에 머리를 박고 꿀을 먹습니다. 꽃잎과 꽃술도 갉아먹습니다. 찔레꽃과 마타리 꽃에 많고 과일나무 꽃에도 모여듭니다.”
“채우 씨.”
이연이 눈에 힘을 주며 잠깐만 저리 가 있으라는 듯 고갯짓을 했다. 그에 남자는 턱짓 하나로 자신을 부리는 여자를 비딱하게 쳐다보았다.
“…….”
“…….”
이연은 느닷없이 고집을 부리며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않는 남자를 등 떠밀듯 노려보았다. 그렇게 계획에도 없던 기 싸움을 벌이고 있는데 때마침 핸드폰이 울렸다. 그녀가 끝까지 권채우를 주시하며 전화를 받자 그가 “하….” 하고 코웃음을 친 것도 같았다.
―원장님……! 죄송합니다만 지금 시간 되심까?
지친 기색임에도 광명을 찾았다는 듯 주동미의 목소리가 씩씩하게 울려 퍼졌다.
“집이긴 한데 무슨 일 있어요?”
―다름이 아니라 지금 원장님 도움이 필요한데 잠깐 와 주실 수 있슴까?
“네?”
―그게……, 천연기념물인 은행나무 안에 뱀이 들어가 살고 있지 말입니다!
이연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무심코 권채우를 바라보았다. 마침 그가 속을 알 수 없이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