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생각지도 못한 화제에 눈동자가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다. 남자는 몸을 떼고 이연을 내려다보았다.
속수무책으로 벌어진 거리에 이연은 사탕을 놓친 아이처럼 눈만 끔뻑거릴 따름이었다.
감정이 읽히지 않은 새까만 눈동자가 낯설다. 그녀는 급변한 분위기에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당장이라도 불을 켜고 권채우의 다정한 담갈색 눈동자를 확인하고 싶어 손이 움찔거렸다.
“지금부터 아주 신중하게 말을 골라야 할 거예요.”
“……채우 씨?”
“이연 씨, 좆 빨아 봤어요?”
“네?”
그건 난생처음 들어 보는 외국어 같았다.
남자는 그녀의 입술을 뭉근히 매만지는가 싶더니 손톱 끝으로 반달 모양의 자국을 남겼다. 따끔한 감촉에 이연이 후다닥 뒷걸음을 쳤지만 그 찰나를 놓치지 않은 권채우가 그녀를 다시 끌어당겼다. 붙잡힌 손목이 욱신욱신했다.
“괜찮아요, 어렵진 않을 테니까. 이연 씨가 잘하는 거 있잖아요.”
“채우 씨, 지금 무슨 말을―”
“제멋대로 혀만 굴리면 되거든요.”
“……!”
순간, 뒷머리 전체가 저릿저릿해질 정도로 소름이 일었다.
“그러니까 잘 대답해 봐요.”
그가 비밀스럽게 목소리를 낮추었다. 낯선 음역대는 기어이 가슴속에 파문을 남겼다.
“만약에 내가 권기석을 죽여 버리면 어떨 것 같아요?”
“……!”
“이연 씨는 그래도 날 좋아해 줄 거예요?”
이게 대체 무슨 말인지, 이연은 그가 건너뛴 공백을 좀처럼 읽어 낼 수 없었다.
얼굴을 맞대고 있음에도 보이지 않고 목소리는 오고 가는데 기대했던 대화가 아니다.
오랜만에 느껴 보는 타인의 벽.
이연은 초조하게 손바닥만 말아 쥐었다. 이렇게 좋은 날, 권채우에게 겁을 먹었다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채우 씨, 갑자기 무슨 소릴 하는 건지, 나 잘 모르겠어요.”
“내가, 권기석을 죽이면 어떨 것 같냐고 물었어요.”
대수롭지 않게 흘러나온 음성은 평연했기에 더욱 이질적이었다. 역시나 잘못 들은 말이 아니다. 이연은 말라붙은 입술로 곧장 말했다.
“일단 거실 불부터 켤게요.”
그녀가 자리를 피하듯 스위치가 있는 쪽으로 몸을 돌린 순간이었다. 그 행동이 어떻게 비쳐졌는지 권채우가 이연의 얼굴을 거칠게 잡아 돌렸다. 서로의 코끝이 뭉개지듯 부딪혔다.
“그게 이연 씨 대답이에요?”
“네?”
“지금 나한테 등을 보인다는 건 딱 한 가지 뜻 같은데.”
“아니, 아니에요. 나는 그냥 채우 씨 얼굴 좀 보고 이야기하려고……!”
“여기서 말해요.”
은근히 강압적으로 구는 권채우 때문에 이연은 자꾸만 멍해졌다. 눈이 마주친 그는 너무 어둡고, 너무 가까워서. 그저 커다란 덩어리가 자신을 집어삼키는 것 같았다. 당혹스러운 마음에 불현듯 머리를 거치지 않은 말이 흘러나왔다.
“……채우 씨 맞아요?”
그의 손이 확 느슨해진 것도 잠시, 다시금 강한 악력이 그녀를 옥죄었다. 이연은 반 강제적으로 시선이 고정되었다.
“내가 이연 씨 남편이 아니면 대체 뭐예요.”
맹목적인 그의 눈빛과 말투는 예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나를 이렇게 만들고 닦아 놓은 게 누군데요.”
“그, 그런데 왜…….”
“담배 냄새가 나잖아요, 꼭 밀폐된 공간에 있다 온 사람처럼.”
그가 고개를 기울여 이연의 귀밑에 코를 슬쩍 갖다 대었다.
“그리고 난 그게 권기석이라는 것도 알 것 같은데.”
“……!”
“오늘은 얌전히 이연 씨만 기다렸던 게 아니라서. 아무리 생각해도 집 지키는 개새끼는 성질에 안 맞아요.”
문득 그녀는 권채우가 자신의 반응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토록 가까운 거리임에도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남자의 호흡이 그러했고, 느릿하게 이연의 얼굴을 배회하는 시선이 그랬다.
대답을 미룰수록 이 기묘한 대치 상황은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연은 어쩐지 불안정해 보이는 권채우를 보며 소란스러운 제 마음은 잠시 넣어두기로 했다.
당연히 답답하고 화가 나겠지.
한 달 만에 일어나 훌쩍 달라진 날짜를 보는 게,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들이 조금씩 앞서 나가며 바뀌는 게, 충분히 짜증스러울 것이다.
그녀는 권채우가 그런 답보 상태를 겪는 것이라 믿으며 손등을 살살 쓸어주었다.
“……예전에 내가 한 말 기억해요? 나는 채우 씨가 예쁘고 좋은 것만 봤으면 좋겠다고요. 나는 나무를 살리는 사람이지, 그, 그런 뒤처리를 도와주는 짓은 못 해요.”
이연은 힐끔힐끔 그의 눈치를 보면서도 말을 이어 나갔다.
“그래서 만약, 내 의견이 궁금했던 거라면 나는 반대예요. 죽인다니, 그, 그런 엄한 생각은 하지도 말아요. 내 앞마당에는 무조건 꽃만 심을 거예요.”
“…….”
“그리고 내 감정을 물어본 거라면, 도의상 권기석 씨를 애도할 순 있겠지만 금방 잊어 먹을 거예요. 남보다도 못했던 사이인데다, 난 원래 사람보다 나무를 더 좋아해요. 그런데―”
그녀가 잠깐 말을 끊고 숨을 들이켰다.
“……나는 내가 걱정이 돼요. 채우 씨를 만질 때 멈칫거릴까 봐.”
“……!”
권채우의 몸이 순간 경직됐다는 것이 맞닿은 살갗을 통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채우 씨한테 입 맞추고 안길 때 내가 겁먹고 주춤할까 봐요.”
“…….”
“채우 씨는 내가 그러길 바라요?”
이연은 떨리는 목소리로도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러자 남자는 헛웃음인지, 숨인지 모를 것을 터트리며 그녀의 얼굴을 팽개치듯 놓았다. 그녀는 곧장 얼얼했던 옆머리를 문질거리며 그를 곁눈질했다.
이미 권채우는 멀찍이 떨어진 채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고 있었다. 얼핏 그 모습이 짜증스러워 보여 이연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매사 직설적이고 단순했던 남자인데 갑자기 어렵고 막막해진 느낌이 들었다.
“……채우 씨. 일단 병원에 가서 검사부터―”
“검사? 무슨 검사요?”
날카롭게 말을 끊는 그의 목소리가 사뭇 반항적이다. 이연은 저도 모르게 한쪽 손을 내밀고 그와 안전거리를 두었다. 으르렁거리는 개에게 접근하듯 한발 한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게……, 한 달 만에 갑자기 일어났으니까 혼란스러운 건 당연해요. 의사 선생님도 채우 씨 깨어나면 바로 연락 달라고 했었고, 또……, 채우 씨 지금 많이 예민해 보여요. 갑자기 적응하기 힘든 것도 이해해요.”
“그래서 정상이 아닌 것 같아요?”
권채우는 보란 듯 피식 웃으며 그녀를 응시했다.
“오늘만큼 머릿속이 깨끗했던 적도 없어요.”
“……그건, 다행이에요.”
이연이 우물쭈물 두 손을 맞잡았다. 그렇게 대화가 끊긴 두 사람은 얼마쯤 어색하게 서 있기만 했다.
권채우는 낯선 타국의 글자를 보듯 여자의 이목구비며, 몸이며, 손톱 모양까지 찬찬히 주시했고, 이연은 그 노골적인 시선에 어쩔 줄을 몰라 하다 결국 침실 쪽으로 몸을 돌렸다.
“채우 씨, 그럼……. 나 먼저 씻고 나올게요.”
그녀는 티셔츠를 부채질 하듯 펄럭거렸다. 이연은 걸음을 옮기면서도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말라붙은 땀보다도 찝찝한 무언가가 그녀의 뒷머리를 잡아당겼으나, 남자는 별다른 반응 없이 고개만 끄덕거릴 뿐이었다.
이윽고 화장실의 문이 닫히고 나서야 권채우는 비로소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가까스로 남편을 연기하고 있던 얼굴이 싸늘하게 굳는다. 눈 깜짝할 새의 변화였다.
“그동안 이렇게 홀렸단 말이지.”
그녀의 체취가 첫 번째 고비였다. 슬쩍 땀이 밴 냄새는 특히나 자극적이어서 그는 하마터면 그녀의 목덜미에 입술을 박고 샅샅이 핥을 뻔했다.
게다가 말캉한 젖가슴이 복근 어딘가를 눌렀을 땐 머릿속이 크게 들썩거렸다. 착한 남편 노릇을 하는 게 생각만큼 쉽지는 않아 보였다.
그러던 그때, 벌컥 문이 열리고 이연이 침실 밖으로 뛰쳐나왔다. 남자는 안면에 남아 있던 서리를 재빨리 털어 냈고, 그녀는 귓가를 붉게 물들인 채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채우 씨 혹시……!”
다급히 꺼내 드는 목소리에 긴장이 묻어 있다. 이연은 까칠까칠한 입술을 핥으며 요동치는 맥을 누르듯 팔뚝을 꼭 끌어안았다. 그녀는 또 다른 가설 하나를 막 떠올린 참이었다.
“내가 눈치가 없었던 거예요?”
순간 권채우는 경계하듯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좆, 아니 아니, 그러니까 거기를, 사실은 그렇게 해 보고 싶었던 건데 내가 둔했어요? 채우 씨는 그게 필요했던 거예요?”
“……!”
“나랑……, 오랜만에 하면…….”
“…….”
“마음이 좀 진정될까요?”
이럴 때 백치 권채우는 어떻게 대답을 했더라.
그는 장범희가 보여 준 보고서를 떠올리며 두 사람의 대화 방식을 곱씹어 봤으나 적절한 대답은 끝내 찾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육중한 주먹이 바지춤을 밀어 올리듯 어느새 아랫도리가 빳빳해져 있었다.
씨발, 돌아버리겠네. 그는 욕설을 짓씹었다.
신체가 반응하는 속도가 빨라도 너무 빨랐다. 권채우는 여자의 붉은 입술을 노려보며 가까스로 다정한 남편 행세를 했다.
“……그런 거 아니니까 얼른 씻고 나와요.”
“그럼 오늘 안 해요?”
그는 사레가 들린 듯 천장을 바라보았다.
“……우리, 많이 밀리기도 했는데.”
그 한마디를 남기고 이연은 다시 화장실 안으로 쏙 들어갔다. 권채우는 떨리는 눈꺼풀을 감았다 뜨며 잔혹하게 피어나려는 성질을 애써 내리눌렀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애정과는 거리가 먼 정복욕이 기어이 고개를 내밀고 말았다.
“하, 저게 뒤지려고 용을 쓰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