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3화 (84/158)

#83

집으로 돌아온 그는 곳곳에 배어 있는 익숙한 체향에 멈칫하며 인상을 썼다. 그동안 속수무책으로 길들여진 몸은 특정 체취에 긴장이 풀리고 아래가 바짝 서는 습성이 있나 보다. 권채우는 부지불식간에 벌어진 신체 변화에 욕이 씹혀 나왔다. 기억을 잃었던 자신이 이렇게까지 천치였다고.

“…….”

코와 입 점막에 달라붙은 냄새는 순식간에 습기를 앗아 갔다. 병신 권채우가 늘 발정하던 소이연의 향. 그는 온 집을 헤집고 돌아다니며 창문을 열고 환기를 했다.

“씨발, 좆같은 냄새.”

하루아침에 타인의 기억이 머릿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건 남의 집 책장을 뒤적거리거나, 혹은 흑백의 필름을 감흥 없이 훑어본 것에 지나지 않아서. 권채우는 처음부터 끝까지 냉정을 유지했다.

그때 어린 발자국 소리가 총총총 들리더니 현관문이 활짝 열렸다.

“소똥구리는 소똥이나 말똥을 먹고 삽니다. 어른벌레는 똥을 경단처럼 동그랗게 빚어서 미리 파 놓은 굴로 굴린― 아.”

말소리가 멎었다. 규백이는 거실 한 가운데에 우뚝 서 있는 남자를 보고 입을 벌렸다. 저렇게 커다란 건 이 나무 집에서 딱 하나다. 규백이 반가운 수놈을 향해 도도도 달려 나가는 순간이었다.

“힝……?”

이상하게 다리가 주춤거렸다. 애지중지 키우던 곤충이 술에 취한 할아버지 발밑에 짜부라진 것을 목격했을 때처럼 눈이 커다래졌다. 돌연 뒷걸음을 친 아이는 방향을 바꿔 소파 뒤로 숨어 버렸다. 이내 규백이는 숨까지 헐떡거리며 빽빽 소리를 질러 댔다.

“가짜, 저 수놈은 가짜입니다……!”

권채우의 고개가 하찮은 것을 향해 느릿하게 돌아갔다.

그는 어설프게 빼꼼 나와 있는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후다닥 제 얼굴을 가려 버리는 게 우습기 짝이 없었다. 

아, 쟤. 

그는 이 황당무계한 꼬맹이에 대해 떠오르는 기록을 페이지 넘기듯 훌훌 넘겨보았다. 그동안 저 꼬마에게 놀고먹는 수놈 취급이나 당했단 말이지.

“너―”

“수놈 없습니다. 내 수놈 없어졌습니다.”

규백이가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눈가를 가렸다 떼기를 반복했다. 권채우가 성큼성큼 다가가자 아이는 아아아―! 냅다 소리를 지르며 도망치는 토끼처럼 거실을 빙글빙글 돌았다. 

남자의 턱에 굵은 힘줄이 튀어 오른다. 그는 성가시다는 얼굴로 창밖을 한 번, 시계를 한 번 힐끗거렸다. 이런 상태에서 소이연이 돌아온다면 골치가 아파진다. 

권채우는 곧장 힘으로 규백이를 낚아채 훌쩍 소파에 앉혔다. 무릎을 굽히고 앉은 그는 아이의 두 팔을 꽉 잡아 누르고 눈높이를 맞추었다. 이렇게 작은 건 어떻게 해 본 적이 없는데. 권채우는 짧게 혀를 찼다.

“꼬맹아.”

“원장 선생님 불쌍합니다. 큰일 났습니다. 수컷 사마귀는 먹히지 않기 위해 암컷과 몸싸움을 벌입니다. 조심스럽고 전략적으로 접근을 합니다. 수놈이 딴맘을 먹고 있습니다. 원장 선생님은 속고 있습니다.”

“뭐?”

아이는 강박적으로 시선을 피하며 알아듣지 못할 말을 연신 중얼거렸다.

“그, 그리고 거미는 암컷을 물거나, 독을 주입하거나, 거미줄로 꽁꽁 묶어 두고 짝짓기를 합니다. 이것은 야생입니다. 그런데 나 이규백은 유리 상자 안에 개입할 수 없습니다. 모름지기 박사는 그래야 합니다. 피터 조나단의 저서 서문 셋째 줄.”

규백은 창백해진 얼굴로 네모난 집 안을 공연히 훑어보았다. 남자는 동공이 팽창하고 가쁜 호흡에 들썩거리는 작은 몸을 가만히 바라보다 결국 팔을 놔주었다.

“껍데기를 벗은 곤충에게 가짜라고 하진 않지.”

“그런 건 변태입니다.”

“…….”

“불완전 변태와 완전 변태가 있습니다.”

“…….”

“원장 선생님은 수놈이 완전 변태가 됐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권채우의 얼굴이 서서히 찌푸려졌다. 도무지 말이 통하지를 않는다. 결국 남자는 규백이를 품에 가두듯 두 팔을 넓게 짚었다. 혹시나 겁을 줄까 봐 잠시 억눌렀던 기세도 구태여 감추지 않았다.

“잘 봐, 정말로 네가 알던 수놈이 아니야?”

“내 수놈은 늙고 게으르고 병약합니다. 그런데 완전 변태는 눈이―”

“눈이?”

“음흉합니다.”

“…….”

“화투 치는 우리 삼촌이 할아버지 비상 통장 뒤질 때 꼭 그렇습니다.”

“…….”

“뒤통수치려고 합니다.”

권채우는 고개를 뚝뚝 꺾으며 소파를 짚은 팔에 별안간 힘을 주었다.

“새끼 원숭이, 너 똘똘하잖아. 맥락은 못 읽어도 본질 파악은 제대로 한다던데.”

그는 규백이의 까슬까슬한 머리를 공처럼 붙들고 강제로 눈을 맞추었다.

“그럼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겠어?”

규백이는 얼굴을 짜글짜글 일그러뜨릴 정도로 있는 힘껏 눈을 감았다.

“원장 선생님이 도망가야 합니다!”

“아니, 아니지.”

이마에 힘줄이 돋아났지만 그는 성질을 꾹 내리눌렀다.

“입 다물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지.”

권채우가 아이의 자그마한 입술을 집게처럼 꾹 쥐었다 놓으며 말했다.

“꿈 깨고, 힘도 빼. 원장 선생님은 네가 못 구하니까.”

“…….”

그러자 아이는 기가 죽은 듯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 모습에 덜컥, 쥐고 있던 머리를 놓아주자 규백은 꽁지 빠지게 도망가 버렸다. 

시무룩했던 얼굴이 묘하게도 신경에 거슬렸지만 이 감정 또한 제 것이 아니다. 학습된 몸의 기억일 뿐, 권채우는 허상에 속지 않기로 했다.

그런 경험에 얽매여 사는 건 한 번이면 족했으므로.

‘그런데 노래하는 나무라…….’

권채우는 도청 기록에 몇 번이고 언급돼 있던 그 단어를 떠올리며 차갑게 미소 지었다. 돌이켜보면 그것도 벌써 십오 년 전의 일이다. 

오랜만에 잡아 보는 줄의 감촉은 매끈했고, 사냥을 기다리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즐거워서. 단조의 어둑한 콧노래가 느릿하게 흘러나왔다.

나 혼자만 널 생각했던 건 아니었나 봐.

* * *

“우리 정말, 오랜만이에요.”

이연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묘한 미소를 짓고 있는 권채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눈앞이 깜깜했던 지난 한 달은 정말 최악의 장마였다. 꿉꿉하고 울적했던 날들이 이어지면서 집 안은 늘 우중충했고, 그녀는 때때로 우산을 쓰고 싶지가 않아졌다. 

처음으로 가져 본 온기의 부재. 이연은 주저앉고 싶었지만 하루도 빠지지 않고 나무를 돌보았고, 어떻게든 수저를 들었다. 숲속에 잠든 이를 지키며 살아가는 것. 그 이름은 숲지기였고 기다림이었다.

“이연 씨는 달라진 게 거의 없네요.”

“권채우 씨……!”

“꽤 긴 시간이었는데 하나도 안 변한 것 같아요.”

그녀는 곧장 그에게 달려가 허리부터 끌어안았다. 물기가 차오른 눈동자는 금방이라도 넘칠 것처럼 찰랑거렸다. 남자는 새끼 강아지처럼 파고드는 이연을 평소와 다를 바 없이 토닥거려 주었다.

“왜, 왜 바로 전화 안 했어요? 몸은 아픈 데 없어요? 배는 안 고파요? 혹시 두통은요?”

그녀가 숨도 쉬지 않고 빠르게 몰아붙였다.

“이연 씨 일하는 데 방해될까 봐요.”

“내가 얼마나, 얼마나 맘 졸이면서 기다렸는데요!”

목 끝까지 쌓여 있던 침전물이 마침내 씻겨 내려간다. 집 안을 가득 메우는 권채우의 존재감에 비로소 배가 고프고, 심장이 뛰고, 활기가 돌았다. 폐부 끝까지 한가득 숨이 쉬어지고, 투정이 나왔다.

“채우 씨 한 달 넘게 잤단 말이에요, 내가 그동안 얼마나……!”

“미안해요.”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요.”

막을 새도 없이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러자 그가 눈에 띄게 굳은 것도 같았다.

“이제, 이제 어떡해요. 나는 채우 씨한테 도움이 하나도 안 된단 말이에요. 시도 때도 없이, 매일 매일, 채우 씨 옆에 누워 봤는데도 소용이 없었어요. 그러면 채우 씨는 앞으로 더 힘들어질 테고, 나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고…….”

그때 권채우가 있는 힘껏 이연을 껴안았다. 그녀의 콧등이 딱딱한 가슴팍에 눌리고, 남자는 이연의 정수리에 턱을 올려 두었다. 빈 모서리를 끼워 맞추듯 서로의 몸이 완벽하게 들어맞는다. 오랜만에 느껴 보는 아늑함이었다. 이윽고 다정한 목소리가 차분하게 내려앉았다.

“아니에요, 내가 너무 늦게 온 거예요. 늑장 부려서 미안해요.”

“나는, 나 때문에, 흐윽, 내가 신목을 치료해서……! 채우 씨가 나 대신에……!”

“이연 씨 탓이 아니에요. 자는 동안 긴 꿈을 꿨거든요.”

“……흐, 꿈이요? 무슨 꿈이요?”

“글쎄요, 조금 우스운 얘기였는데―”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이연이 고개만 들어 권채우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불도 켜지 않은 거실에서 그의 표정을 보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사실 나무꾼은 사슴을 도와주지 않았고, 그래서 내내 쫓아오던 사냥꾼만 포식을 했고, 결국 선녀는 잃어버린 사슴을 그리워하다가 모두를 다 죽여 버린다는 이야기예요.”

“아…….”

“물론 꿈에서요.”

“그건 다행이지만, 채우 씨 또 악몽 꾸고 있었네요.”

정수리가 간질간질한 걸 보니 그가 옅게 웃은 듯했다. 

그러나 이연은 싸늘한 조소가 권채우의 흰자위며 입가에 핏물처럼 고여 든 것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연 씨가 나한테 꼭 필요한 거예요.”

“그치만…….” 

“못 믿겠으면 다시 자 볼까요?”

“절대 싫어요……!”

그녀가 숫제 경기를 일으키듯 몸을 파드득 떨었다. 그 예민한 반응에 잠시 정적이 돌았다. 선명한 두려움이 그녀의 눈동자에 안개처럼 스민다. 

생각만 해도 진저리가 쳐지는 그날의 아침. 깨어나지 않는 남자를 보는 상황은 몇 번을 반복해도 익숙해지지 않을 것이다.

“채우 씨, 내일이 주말이니까 우리 같이 밤새요.”

“이연 씨가 하라는 대로 할게요.”

선선히 따라주는 그의 대답에 이연은 안심이라는 듯 몸에서 힘을 풀었다.

“그런데 이연 씨.”

그녀는 대답 대신 권채우의 허리를 더욱 꽉 끌어안았다.

“오늘 형 만났다면서요.”

“……네?”

이연이 멈칫, 그를 올려다보았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