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쾅―! 장범희는 반쯤 나가떨어진 문짝을 보며 얼이 빠졌다. 귀에 딱 걸리는 소음을 기민하게 잡아낸 순간부터 작업 중이던 노트북을 닫고 삼단 봉을 쥐었지만, 이내 살벌하게 걸어오는 권채우의 기세에 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저 눈초리. 수틀리는 건 전부 손아귀 하나로 비틀어 찢어 버렸던 그때의 익숙한 기운.
“……도련님이십니까?”
그건 본능적인 예감이었다.
“범희야.”
권채우는 핏기라곤 하나 없는 얼굴로 범희의 멱살을 쥐고 벽으로 밀어붙였다.
“윽……! 대체 어떻게―”
“설명해.”
깊게 파인 미간과 사납게 치켜 올라간 눈썹이 매섭다. 어둑어둑한 눈동자는 혼란과 불신으로 가득했지만, 등대처럼 번뜩이는 한 가지가 정확히 읽혔다. 장범희의 흉곽이 기대하듯 부풀었다 가라앉는다. 그는 터져 나오려는 기침 대신 웃어 보였다.
“저는 권기석 이사님 밑으로 들어갔습니다. 도련님이 명하셨던 대로.”
“…….”
“정말 돌아오신 게 맞습니까?”
“네가 여기에 굴을 팠다는 걸 아는 정도로는.”
그가 느긋하게 목을 울리며 장범희의 방 안을 슥 둘러보았다. 커다란 듀얼 모니터, 실행 중인 프로그램, 창가 쪽에 붙어 있는 망원경, 테이블에 널려 있는 사진들까지.
“도청은 왜.”
권채우가 모니터 쪽으로 턱짓을 하며 물었다.
“권 이사님이 소이연 씨의 동태를 빠짐없이 확인하라 하셨습니다.”
“…….”
그는 한쪽 눈썹을 까딱하기만 했을 뿐 별다른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한쪽 벽에는 가문비 나무병원과 동물 센터 사람들의 간략한 신상을 붙여 두었고, 특히나 소이연의 파파라치 샷이 한 더미였다.
무심한 눈길이 마침 그곳에 멈추었다. 순간 올가미에 걸린 듯 시선이 옴짝달싹 못 하고 메여 버린다. 권채우는 한 여자의 얼굴만 탐닉하듯 뚫어져라 응시했다.
“나랑 내내 떡치던 여자 얼굴이야, 이거.”
은근히 짜증이 배인 목소리에 장범희가 멍하니 되물었다.
“예?”
“분명 아내라고 그랬는데.”
“…….”
“이상하잖아. 나는 결혼을 한 적도, 아내라는 걸 둬 본 적도 없는데. 약 맞은 짐승 새끼도 아니고, 미친놈처럼 저 여자 다리 사이를 들락거렸거든. 정신이 완전히 빠져서는.”
“도련님, 혹시 기억이 좀…….”
그의 미묘한 말투에 장범희가 미간을 찌푸렸으나 돌아오는 말은 없었다. 권채우는 여전히 소이연의 사진만 집요하게 노려보는 중이었다.
그런 여자의 옆에는 언제나 한 남자가 따라다녔다. 그녀의 손을 잡고, 어깨를 감싸고, 그녀의 머리에 스스럼없이 입을 맞추는 권채우. 퍽 다정하게 웃고 있는 자신의 얼굴이 남처럼 낯설기 그지없다.
그는 수많은 사진들을 하나하나 빠뜨리지 않고 살펴보다 고개를 천천히 되돌렸다.
“저 여자랑 틈만 나면 뒹굴었다는 건 알겠는데 거기까지야.”
“……!”
“그러니까 설명해 보라고, 범희야.”
흘러나오는 시퍼런 서슬에 장범희는 퍼뜩 허리를 세웠다.
“저 집에서 내가 도대체 뭘 하고 있던 건지.”
권채우는 신경질적으로 장범희의 멱살을 던지듯 놓았다.
“……가스라이팅 성범죄라.”
권채우는 그동안의 보고서들을 무심히 읽어 내려가다 노트북을 탁 닫았다.
“당시 도련님은 후유증으로 수면 장애까지 앓던 환자이기도 했습니다.”
“씨발, 어떻게 그딴 거짓말에 속아 넘어갔을까.”
그가 입매를 위악적으로 비틀었다. 입만 열면 거짓말이나 해 대던 여자. 가짜 어머니로도 모자라 이번엔 가짜 아내라니. 어설프기 짝이 없는 세 치 혀에 그동안 넋을 빼고 살았던 것만 생각하면―
“내가 그 정도로 병신같이 굴었단 말이지.”
그가 주먹을 쥐었다 풀 때마다 우두둑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건 기억을 잃었다고 덩달아 지능까지 깎인 듯 행동했던 자신에 대한 노여움이기도 해서. 남자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신경질적인 한숨을 내뱉었다.
“몇 개야.”
“예?”
“그래서 그 집에 도청 장치는 몇 개나 심어 놓은 거냐고.”
그가 뻐근한 목을 한 바퀴 돌리며 짐짓 탐탁지 않게 내뱉었다.
“총 열두 개입니다.”
그러자 잇새 사이로 피식 웃음을 흘린 그가 볼 안쪽 살을 혀로 무겁게 눌렀다.
“여기 있는 모니터 죄다 때려 부수기 전에 알아서 지워.”
“……예?”
“그 여자랑, 떡치던 소리도 들었을 거 아니야.”
“……!”
마디를 토막 내듯 읊조리는 권채우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러자 그 즉시 얼굴을 굳힌 장범희가 “아닙니다―!” 하고 목청을 드높였다.
“필요한 정보만 선별해서 권 이사님께 보고드린 겁니다! 특히 소이연 씨가 도련님을 상대로 가스라이팅 성범죄를 저지른 점이나 직업, 나이 등에 관한 허위사실, 학력에 관한 명예 훼손, 그리고 심리 조작 정황이 뚜렷하게 포착되어 보다 면밀하게 보고서를 작성했던 것뿐입니다. 그 외, 다른 의도는 결단코 없었습니다!”
장범희는 올곧은 눈동자로 억울함을 호소했으나 권채우는 무표정할 따름이었다.
“그래, 그 여자가 날 가지고 놀았지.”
“허위 사실을 말함으로써 상대를 착오에 빠지게 하는 건 확실한 기망 행위입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가, 그걸 모를 것 같아?”
일말의 감정까지 천천히 거두어 가는 얼굴이 싸늘했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맨바닥엔 누군가 힘껏 할퀴고 간 자국만이 잔상처럼 남아 있었다. 장범희는 아차, 싶어 곧장 고개를 숙여 왔다.
“……죄송합니다.”
권채우는 목덜미에 깍지를 낀 채 잠시 눈꺼풀을 감았다. 이제는 희미해진 오랜 과거에서부터 종종 이름 붙일 수 없는 무언가가 이렇게 팔팔 끓곤 했다. 예민한 성질이 뭉쳐 있는 미간이 딱딱하다. 욱하고 올라오는 불덩이가 식도를 다 태워 버릴 것처럼 뜨겁고 아팠다.
“대체 권기석이랑 소이연은 무슨 관계야.”
“처음에는 협박으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모종의 협력 관계입니다.”
“협박?”
쏘아보는 눈초리가 막 사냥을 시작하려는 짐승처럼 날카로웠다.
“일종의 등가 교환이었습니다. 소이연 씨가 도련님의 사고 현장에서 바로 붙잡혔거든요. 이사님은 소이연 씨의 처분을 미루는 대신, 식물인간인 도련님을 내밀었습니다.”
“……덫에 걸린 거잖아, 멍청하게.”
권채우는 무언가를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엄밀히 말해 등가는 아니었다. 정신을 잃기 전, 등 뒤로 누군가 접근해 오는 소리를 분명히 들었으니까. 그럼에도 자리를 피하지 않은 건 권채우 스스로의 선택이었다.
순간 딱딱한 입술을 가르고 조소가 흘러나왔다. 아둔했던 건 자신이었다.
“그건 저희도 마찬가집니다. 도련님이 항거 불능의 상태로 이사님 손에 있다고 암암리에 말이 돌아서, 실제로 지난 2년 동안 우리 쪽 세력이 많이 위축됐습니다.”
그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 그때 남자의 무심한 얼굴을 단박에 깨부수는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오늘, 권 이사님이 소이연 씨를 만났습니다.”
“뭐?”
장범희가 다시 노트북을 열었다. 파일을 클릭하자 검은색 세단 앞에서 마주 보고 있는 권기석과 소이연의 사진이 떴다. 권채우의 콧대가 와그작 가차 없이 구겨졌다. 한 차에 타는 두 사람의 모습, 권기석이 그녀 쪽으로 상체를 숙이는 모습, 진지한 대화를 나누는지 한층 무거워진 얼굴, 차에서 내리는 소이연과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권기석의 알 수 없는 눈빛 등이 차례로 넘어갔다.
“몇 시에.”
“얼마 안 됐습니다. 두 시간 전입니다.”
“…….”
“현재는 권 이사님이 소이연 씨의 거짓말을 눈감아 주시고 계십니다.”
“하….”
권채우는 이맛살을 찡그리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혼인 신고나 신분증 외에도 도련님이 취업하실 때 제출하셨던 서류 대부분이 위조입니다. 검정고시 합격증이나 운전면허증, 통장 사본도 전부 이사님 손을 거친 거거든요. 가짜 신분증이지만 웬만한 은행이나 포털 사이트도 전부 뚫을 수 있을 정돕니다.”
“씨발, 대체 뭐 하자는 거야.”
권채우가 주먹을 꽉 쥐자 손등의 뼈가 갈퀴처럼 툭 튀어나왔다.
“그러니까, 둘이서 나를 속이고 있다고. 둘이 말이지.”
그는 테이블 위에 널브러져 있는 소이연의 사진을 구기듯 움켜쥐었다.
“도련님,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하실 겁니까.”
남자는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그저 창밖으로 보이는 소이연의 집을 가만히 응시할 뿐이었다. 그 뒷모습이 언뜻 허망해 보이기도, 차가워 보이기도 해서. 장범희는 역광을 받아 어두워진 실루엣을 보며 알 수 없는 불안을 느꼈다. 이 질 나쁜 쾌락주의자가 대관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떻게 하기는.”
그때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묵직하게 깔렸다.
문득 권채우의 시선이 공구 박스 어딘가에 닿는다. 그곳엔 그가 자주 애용하곤 했던 현악기 줄이 뱀처럼 둥글게 말려 있었다.
“본가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이 상태를 유지한다.”
“……도련님도, 말입니까?”
별안간 뜻 모를 미소가 그의 입꼬리에 아슬아슬하게 걸렸다.
“그 여자는 차라리 내 배때기를 쑤셨어야 했어.”
“……예?”
―거짓말을 치는 게 아니라. 그가 혼잣말을 오싹하게 중얼거렸다.
“나는 입으로 장난질 치는 것들은 용서할 생각이 없거든.”
감히 겁도 없이 거짓을 말하고, 자신을 백치처럼 길들인 소이연. 앞으로는 그녀도 똑같이 겪게 될 것이다.
더러운 사냥개는 소이연이 가장 아파하는 부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 지점을 정확히 물어 죽일 생각이었다. 남자는 눈앞에 보이는 회색빛 줄을 반사적으로 감아쥐었다.
“일단은 확인해 볼 거야. 그 여자가 권기석의 사람인지 아닌지. 그리고―”
그녀를 진짜 아내라 믿었던 순종적인 권채우는 이제 없었다.
“돈을 받고 어머니를 팔았는지 아닌지.”
그가 직접 겪지 않은 기억은 그저 하나의 기록일 뿐이었다. 잠시 제 몸을 빌려 썼던 다른 새끼의 기록. 그에게는 찢어 버리면 그만인 낙서.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소이연의 남편 권채우’는 그렇게 밑바닥으로 처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