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
그 세 글자가 느닷없이 머리를 친다. 이연은 전봇대에 부딪히기라도 한 사람처럼 이마를 문질거리다 도로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품이 넉넉한 주머니임에도 몇 번이나 헛손질을 했다.
이런 적이 처음이어서 그런 걸까. 고작 전화 한 번 안 받은 게 무슨 대수라고, 심장이 온 힘을 다해 가슴팍을 발길질해 댔다.
생각해 보면 그동안 꼬박꼬박 상전 대하듯 권기석의 전화를 받은 그녀의 비굴함이 더 큰 문제였지 않나.
그때 집요하게 울리던 진동이 뚝 그쳤다. 혹시나 받을 때까지 끊임없이 걸어 오진 않을까 신경이 곤두섰지만 전화는 다시 오지 않았다.
“소장님, 이거 지금, 사람 콧구멍을 흙으로 꽉꽉 채운 거랑 똑같거든요.”
“아……!”
“일단은 흙부터 좀 파내겠습니다.”
“어?”
설명을 듣고 있던 현장 소장이 그녀의 등 뒤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오늘 건설사에서 누가 온다고 했었나?”
소장은 눈썹을 찌푸리며 은근한 성가심을 내비쳤다. 그의 중얼거림을 들은 이연이 덩달아 뒤를 돌아본 순간이었다.
흠결 하나 없이 고급스러운 세단이 소리 소문 없이 미끄러지듯 멈춰 섰다.
그때 다시 한번 핸드폰이 울렸다. 차의 뒷문이 열리고 새까만 구두, 정장, 은색 테의 안경을 쓴 권기석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핸드폰을 귀에 붙인 채 이연을 정확히 쳐다보고 있었다.
“…….”
“…….”
2년 전 그날 밤 이후,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는 건 처음이었다. 지이잉, 지이잉. 얇은 바지 천 너머로 허벅지를 때리는 진동이 아프다.
이연은 저도 모르게 다리를 뒤로 움찔거렸다. 권기석은 그런 그녀를 무미건조하게 훑어보더니 보란 듯 통화를 종료시켰다.
“받기 싫으면 타십시오.”
그가 고갯짓으로 차 안을 가리켰다. 피해 의식 때문인지 ‘좋은 말로 할 때’라는 말이 절로 들린 것 같았다.
“소장님……. 저 잠깐―”
“점마는 누군데?”
그때 우물 작업을 준비하고 있던 추자가 심각한 얼굴로 끼어들었다.
“채우 씨 형이에요.”
이연은 속삭이듯 중얼거렸고, 추자는 모자의 창을 깊숙이 내리며 “그 협박꾼?”하고 복화술로 물었다. 맞다는 듯 턱을 한 번 집어넣자 추자는 “흐미……!”하며 혀를 내둘렀다.
“형제가 쌍으로 보통이 아이네.”
“……추자 씨, 저 잠깐 자리 좀 비울 테니까 미리 수간 주사만 준비해 주세요.”
“해코지라도 당하면 우짤라꼬. 내가 순경이라도 데따 놓으께.”
“소용없어요.”
“응?”
사방에서 압박해 오는 이 기세가 낯설지 않다. 결국 이연은 차 쪽으로 질질 끌리듯 들어갔다.
시가 냄새가 은근하게 배어 있는 차 안.
이연은 무릎 위에 두 손을 정직하게 올려놓았다. 권기석은 시트에 깊숙이 기댄 채 콧대를 꾹 눌렀고, 그 바람에 살짝 헐렁해진 안경 너머로 그의 맨얼굴이 보였다. 그녀는 보아선 안 될 것을 봤다는 듯 화들짝 고개를 돌렸다.
그는 이연을 태우고도 관심 하나 없다는 태도였다. 그러나 감정 없이 흘러나온 목소리는 정확히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진범을 잡았습니다.”
그녀의 눈이 확 커졌다.
“……진범을, 잡아요?”
이연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를 쳐다보았다.
얼마쯤은 포기하고 있었던 일이다. 그녀를 다짜고짜 납치하여 사인까지 받아 냈던 그가, 그 정도의 행동력으로 진범 하나 잡지 못했을 리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1년, 그리고 또 1년이 지났을 때 이연은 어느 정도 체념을 해버렸다.
가끔, 힘의 논리에 의해 이유 없는 불행이 닥치기도 하는 법이니까. 이연은 제가 그런 사고를 당했다고 생각했다. 평생을 짊어지고 가야 할 장애가 생긴 것처럼, 권채우를 떠맡게 된 거라고. 남자가 깨어나기 전까지는 그렇게 마음을 억눌렀었다.
“조직 내부에서 찾느라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그가 뒷좌석의 콘솔 박스를 열어 서류를 건넸다. 진범의 얼굴과 간단한 신상이 적힌 파일이었다.
2년 전의 기억은 흐릿했지만 사진을 보니 단번에 알겠다. 생매장을 당하고 있던, 권채우의 머리를 결정적으로 푹푹 내리찍어 정신을 잃게 했던, 그 남자의 얼굴이 분명했다.
생각지도 못한 수확에 그녀는 얼떨떨하기만 해서 나머지 글자는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우리 쪽의 응징은, 이제 소이연 씨가 아니라 그 진범이 받게 될 겁니다.”
불현듯 코끝에 돼지의 사체 냄새가 스치는 것 같았다. 아무리 신사적인 옷차림을 하고 있어도 그게 얼마나 얄팍한 꺼풀인지 이연은 알고 있다.
“이 시간부로 소이연 씨는 자유입니다.”
“……!”
한순간 호흡이 멈추고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이연이 그토록 원하던 해방. 누군가의 감시와 협박에서 마침내 벗어나는 순간. 그녀는 땀이 나는 손바닥으로 제 무릎을 억세게 움켜쥐었다. 터무니없었던 혐의가 사라지고, 족쇄가 풀리고, 인생이 저당 잡혔다는 공포에서도 드디어 빠져나오는 것이다. 그것이 코앞이었다.
그런데 강렬하게 치솟던 희열이 별안간 푹 식는다. 이상하게 불안했다. 드디어 끝났다는 후련함이 아니라, 덜컥 무언가를 빼앗기는 기분이 들어서.
이연이 대답하지 못하고 가만히 얼어 있기만 하자 권기석이 자세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움직이는 대로 가죽 시트가 빠드득 이를 가는 듯한 소리를 냈다.
“채우는 다시 데려가겠습니다.”
“……!”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소이연 씨.”
“……저기, 잠깐, 잠깐만요.”
통보 같은 그 말에 이연은 그제야 자신이 놓치고 있던 것을 알아차렸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에요?”
“무슨 문제 있습니까? 계약서는 이미 효력을 다했을 텐데요.”
“맡기는 것도, 데려가는 것도 이렇게 마음대로……!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이연은 격해지려는 감정을 순간 내리누르고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나 사정없이 흔들리는 목소리는 감출 길이 없었다. 추운 것도 아닌데 몸 어딘가가 바들들 떨렸다. 그건 이연을 서늘하게 쳐다보는 권기석의 파충류 같은 시선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서로의 이익을 위해 거래를 한 것뿐입니다. 아니면 내가 그때, 소이연 씨를 기어이 감옥에 처넣었어야 됐습니까.”
“…….”
“만약 그랬다면 지금처럼 무지몽매한 소리는 듣지 않아도 됐을 텐데.”
이연은 입술을 슬며시 깨물었다. 그녀를 한심하게 여기는 듯한 어투에는 희미한 모멸감까지 들었다.
어쩌면 그의 지적대로, 불운한 시간을 전부 청산할 수 있는 기회를 덥석 물지도 못하는 자신이 바보인지 모른다. 하지만 이연은 버리고 싶은 게 아니라, 갖고 싶은 게 있었다.
“……그치만 혼인 신고는요.”
이연은 손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지문이 닳도록 그 끝을 연신 문질렀다.
“제가 권채우 씨한테 어떤 거짓말을 했는지 다 알고 계셨으면서, 왜 그렇게까지―”
“그래서 소이연 씨한테 불리했습니까?”
“네?”
“나는 도와주려고 한 겁니다.”
“그러니까 대체 왜요……!”
그녀가 거칠게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그때 권기석이 갑자기 상체를 내리더니 이연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소리 없이 파고드는 시선이 미끈하고 은밀했다.
“채우가 이 세상에서 가장 증오하는 게 뭔지 아십니까?”
“…….”
“거짓말입니다.”
안경 렌즈 너머로 보이는 날카로운 눈매가 권채우와 닮았다. 이연은 안 그래도 얼어 있던 심장에 작살이 박히는 듯했다.
“그런데 나는 소이연 씨 거짓말이 제법 마음에 들었던지라.”
이연의 눈빛은 까맣게 죽어 가는데 권기석은 시퍼런 귀기마저 풍기고 있었다.
“우리는 이미 한 배를 탄 거나 다름없습니다.”
뱃속을 쑤시는 듯한 말이었다. 권채우를 속이고 있다는 죄책감이 이 순간만큼 강했던 적도 없다. 이연은 괜스레 아랫배를 움켜쥐고 고개를 푹 떨구었다.
“……데려가지, 마세요.”
그녀가 개미만한 목소리로 부탁했다.
권기석은 하얗게 질려 있는 소이연 위로 여전히 선명하게 떠오르는 누군가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예기치 않게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건 잔금 하나 없던 백지장이 와락 일그러지는 모양새라 유달리 그 변화가 눈에 띄었다.
“거짓말이 진심이 되는 걸 또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머리 위에서 엷은 바람 소리가 들렸다. 권기석은 첫 만남 때와 마찬가지로 내내 사무적이었지만, 오히려 그 한결같은 태도 때문에 방금 그가 흘린 비웃음이 사사로운 감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팔걸이를 느릿하게 툭툭 두드렸다.
“현재 소이연 씨가 알고 있는 권채우 중에서 진짜는 단 한 개도 없는데.”
이연은 어깨를 흠칫 떨었다.
“그래도 후회 안 할 자신 있습니까?”
* * *
무슨 정신으로 일을 끝마치고 퇴근했는지 모르겠다.
이미 밤이 된 시각, 머리 한 구석이 멍하고 뒤죽박죽인 그녀가 막 현관문을 넘었을 때였다.
불도 켜지지 않은 어둠 속에서 그보다 더 짙은 그림자가 소리 없이 일어나 그녀의 발등을 덮는다. 화들짝 놀란 그녀가 왕진 가방을 쿵, 하고 떨어뜨렸다.
“……!”
이연은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눈을 마구 비벼 보았다. 심장은 터질 것처럼 뛰어 대고 순식간에 눈물이 차올랐다.
그곳에는 지난 한 달, 이연의 속을 까맣게 태워놓은 남자가 태연자약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장마보다도 길었던 잠의 여파 때문인지 눈빛은 탁해 보였지만, 그럼에도 권채우였다.
“이연 씨, 잘 지냈어요?”
“채, 채우 씨…….”
그가 천천히 다가왔다. 변하지 않은 다정한 미소를 보는 순간 목이 메어왔다.
한편, 뒷짐을 진 남자는 한쪽 손에 웬 거미줄 같은 은실을 칭칭 감고 있었다.
손가락과 손등을 단단하게 옭아맨 줄이 팽팽했다. 그러한 상태로 주먹을 꽉 쥐자 억세게 감긴 줄이 살갗을 파먹는다. 피가 통하지 않아 검붉게 변한 손등 위로 얇은 은실이 날카로운 빛을 냈다.
“우리 정말, 오랜만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