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나도 줄 게 있어요.”
목구멍 바로 아래에서 신물이 일렁이는 통에 목소리가 억눌렸다. 제 전부를 갖다 바쳐도 아깝지 않을 아내에게 느끼는 이 비정상적인 신체 반응. 죄책감이 느껴질 만큼의 강한 반발력이었다.
그러나 권채우는 별것 아니라는 듯 이를 악물었다. 아무래도 요즘 직장에 적응하느라 알게 모르게 몸에 무리가 갔었나. 그것 말고는 돌연 두드러기처럼 올라오는 이 거부감엔 별다른 이유가 없었다.
그는 납득되지 않는 현상에 휩쓸리지 않고 그동안 쌓아 온 애정을 붙들고 버텼다.
“채우 씨, 이게 뭐예요?”
“선물이에요.”
그는 가까스로 표정을 추스르며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권채우가 내민 것은 손바닥 안에 자그맣게 들어오는 목각 공예품이었다. 이연은 선물을 받아보자마자 눈을 커다랗게 떴다.
“와……!”
소담한 꽃잎이 하나하나 생생히 피어 있는 꽃 한 송이였다. 권채우는 이연의 반응을 살피느라 겨드랑이 부근에 두 팔을 끼워 넣고, 입술을 안으로 말아 문 채였다.
그러나 놀라울 정도로 예쁜 목각은 보면 볼수록 어딘지 엉성한 데가 있었고, 그 서투른 면을 발견할 때마다 이연은 조금씩 가슴이 뛰었다.
“혹시……, 직접 만든 거예요?”
“이런 것밖에 못 줘서 미안해요.”
이연의 입이 반쯤 벌어졌다가, 다시 제 손안에 들어온 꽃으로 시선을 내렸다.
“……꽃은, 절대 안 줄 거라면서요.”
그녀가 잠긴 목소리로 묻자 남자는 입꼬리가 미미하게 움직였다 사그라진다. 오늘따라 그의 미소가 유난히 짧다는 생각을 했지만 이어지는 말에는 사소한 단상들까지 전부 날아가 버렸다.
“그래서 나무에 새겼어요. 절대 시들지 말라고.”
이상하게 그와 눈을 마주하는 게 쑥스러웠다. 이연은 한눈에 봐도 작업이 쉽지 않았을 조각품을 애틋하게 매만졌다.
“채우 씨, 근데 염료는 어떻게 입힌 거예요?”
이연은 선홍색으로 옅게 물든 꽃잎을 가리키며 물었다.
“피예요.”
“……네?”
잘못 들었나 싶어 그녀가 귀를 쫑긋 세웠다.
“조각하다가 상처가 났는데 피가 좀 스몄어요.”
그가 눈썹 끝을 꾹꾹 누르며 시선을 피했다. 이연이 재빨리 그의 손바닥을 펴 보자 원래도 거칠거칠했던 살갗에 최근에는 보지 못했던 상처들이 자잘하게 퍼져 있었다.
“……동물들이 할퀸 거라고 했잖아요!”
“크게 다를 점은 없어 보여서.”
“진짜 그거뿐이에요? 또 숨기는 거 없어요?”
권채우가 눈짓으로 색이 물든 꽃잎을 가리켰다.
“그거, 반쯤은 고의였다고 말하면 이연 씨 무서워할 거예요?”
“……어, 네. 못 들은 걸로 할게요.”
이연은 두 손으로 목각을 소중히 감싼 채 심장 쪽으로 끌어당겼다. 가지가 잘리고 볼품없어진 신목, 그러나 새롭게 치유될 나무 앞에서 두 사람은 그렇게 오래도록 머물렀다.
* * *
“채우 씨, 자요?”
뒤늦게 씻고 나온 이연은 그녀를 기다리다 잠든 것으로 보이는 남자를 살짝 흔들었다.
신경 쓰였던 심사도 끝났겠다, 이제는 눈 딱 감고 낱낱이 고하는 일만 남은 것이다. 이연은 마음먹은 용기가 전부 사라지기 전에 얼른 관계를 바로잡고 싶었다.
오늘은 꼭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채우 씨, 먼저 자면 어떡해요. 우리 오늘 얘기하기로 했잖아요.”
곤히 잠든 그의 눈썹을 한 차례 쓸어 주며 목에서 힘을 뺐다. 그렇게 강제력이 빠진 발음은 금세 뭉그러지는 투정이 되었다. 이연은 피로가 비치는 그의 안색을 걱정스레 바라보며 이불을 덮어 주었다.
“그럼 오늘은 푹 자고 내일 얘기해요.”
그녀도 반대쪽 이불을 들추고 그의 옆자리로 쏙 들어갔다. 평소 같았으면 그녀의 온기를 귀신같이 알아챈 그가 재깍 팔을 열어 꽉 안아 주었을 텐데. 웬일로 곯아떨어진 그는 이연이 침대로 올라오든지 말든지, 관심도 없다는 듯 그저 숨만 쉬고 있었다. 오히려 이연이 그의 팔을 벌리고, 틈새에 자리를 잡고, 허리를 세게 끌어안았다. 그제야 귀가를 한 것처럼 마음이 포근해졌다.
‘일단은 우리가 어떻게 만났는지부터 설명할게요…….’
내일 해야 할 말을 정리하다 보니 조금씩 눈이 감겼다.
열어둔 창밖에서 들리는 풀벌레 소리, 권채우의 포근한 향, 딱딱하지만 너른 품, 어느새 침실에 배어 있는 두 사람만의 체취, 침대 반절을 차지하고 있는 무게, 어둠 속에서도 무섭지 않은 상대의 기척.
어느 순간 당연해진 이 모든 것들을 하나씩 누리자 전신이 노곤하게 풀어졌다.
‘미리 미안해요. 내일 상처 주게 될 지도 모르겠어요…….’
이연의 정신은 점차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았다.
따르르르― 따르르르―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알람이 시끄럽게 울려 댔다.
이연은 인상을 찌푸리며 남자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보통 알람이 두 번 울리고, 딱 세 번째 되는 지점에서 권채우가 몸을 뒤척이며 알람을 끄곤 했다.
그러면 다시 고요가 찾아오고, 이연을 한번 으스러지게 안고, 침대에서 나가기 싫다는 듯 여린 목덜미에 입술을 찍으면서 앓는 소리를 낸다. 그렇게 두 사람의 아침이 시작되는 것이다.
따르르르― 따르르르― 따르르르―
그런데 오늘은 조금 달랐다.
“……채우 씨.”
이연이 칭얼대듯 더욱 얼굴을 박으며 은연중에 그를 재촉했다. 그러나 평소에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예민하게 구는 남자가 오늘따라 조용해도 너무 조용했다.
무언가 이상했다. 왜인지 간담이 서늘해지는 기분에 이연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누가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것도 아닌데 저절로 눈이 떠졌다.
역시나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눈을 감은 채 고르게 숨을 내쉬고 있는 권채우였다. 이연은 직접 알람을 끄고 오늘따라 무겁게 가라앉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 이른 장마가 시작되려는지 하늘에는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채우 씨……. 일어나요. 이러다가 늦겠어요.”
“…….”
“채우 씨……!”
“…….”
이연이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그럼에도 남자는 미동도 없었다. 셔터처럼 꽉 닫힌 눈꺼풀이 바르르 떨리지도, 미간이 움찔하지도 않는다. 이게 과한 생각인 줄 알면서도 이연은 순간 몸속 어딘가가 차갑게 얼어붙는 듯했다. 손이 후들거렸다.
“채우 씨……. 권채우 씨……!”
권채우의 뺨까지 툭툭 두들기면서 흔들어보았다. 그 움직임에도 남자는 좀처럼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나무토막을 흔드는 느낌에 손바닥에서부터 소름이 돋았다. 야속한 마음에 그의 널찍한 상체를 솜방망이 같은 주먹으로 연달아 쳐 보기도 했으나 결과는 똑같았다.
“무, 무슨…….”
그러자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이연은 문득 손가락 끝이 빳빳해지는 듯해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펴며 정신을 차렸다.
너무 호들갑 떨지 마. 단순하게 생각해. 이연은 심호흡을 하며 평정을 되찾으려 애를 썼다. 사람이라면 늦잠을 잘 수도 있어.
그런 건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다. 그러니 권채우가 아침잠에 짓눌려 쉽게 일어나지 못한다고 해서 과하게 겁먹을 필요는 없었다.
“채우 씨, 좀 일어나 봐요. 대체 무슨 꿈을 그렇게 깊게 꾸는 거예요? 조금 있다 출근해야죠. 지금 이렇게 미적대다가 주동미 씨한테 잔소리 들어요. 그때 가서 왜 안 깨워 줬냐고 내 탓 해 봤자 이미 늦어요.”
이윽고 차가운 물에 수건을 적셔 온 이연이 불시에 그의 목덜미를 닦으며 자극을 주었다. 그럼에도 남자는 손가락 하나 까딱이지 않았다. 그의 눈, 손발, 눈썹 라인을 꼼꼼히 닦으며 마사지하듯 주물러도 봤으나 더 이상은 무리다. 이연은 습격처럼 밀려 들어온 불안을 차마 이겨 내지 못하고 결국엔 무릎을 꿇었다.
“권채우……! 일어나, 일어나라고요!”
눈앞이 뿌예지고 숨이 딸렸다.
“채우 씨!”
“…….”
“……흐으.”
이연은 아무리 불러도 응답 없는 남자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그러나 손아귀에는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뭐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이연은 엉킨 머리카락을 대충 넘기며 그의 옆자리에 다시 누웠다.
“내가, 내가 뭔가 잘못한 게 있어요? 내가 요즘 바빠서, 혹시 그래서…….”
권채우는 클라인-레빈 증후군 환자다. 그러나 이연이 곁에 있으면 규칙적인 아침을 맞이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어쩌면 방심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무슨 이유에서건, 이연의 효과가 다하는 상황도 충분히 예측 가능한 일이었는데.
“내가 뭔가, 뭔가를 놓쳤어요?”
이연은 모래처럼 빠져나가는 권채우를 허망하게 끌어안았다. 그를 깨우는 방법으로는 이런 것밖에 모른다. 그녀는 텅 비어 버린 것을 끌어모으고, 끌어모았으나 종국에 남는 건 고요와 껍데기뿐이었다.
결국 그녀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졸음기가 가득한 목소리 끝에 하품이 묻어 있다. 그러자 누가 밀어 넘어뜨리기라도 한 듯 왈칵 눈물부터 터져 나왔다.
“선생님……!”
―……소이연 씨? 아침부터 무슨 일이시죠?
이연의 다급함을 읽어 냈는지 의사의 어투가 단번에 또렷해졌다. 그러나 말보다도 울음이 먼저 밀려드는 통에 이연은 잠시 입술을 꾹 누르고, 핸드폰을 멀찍이 떨어뜨렸다. 가까스로 흐느낌을 잘게 쪼개 삼켰으나 표정은 속절없이 무너졌다.
“권……, 흐윽, 채우 씨가……. 안 일어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