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6화 (77/158)

#76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권채우가 불쑥 이연을 품에 안았다.

별안간 뱀이 기어 오듯 스륵스륵, 알 수 없는 소리가 나더니 바람이 불지도 않았는데 오소소 한기가 들었다. 

이연은 남자의 널찍한 품에 가로막혀 보이는 것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내려 보니, 붉은색의 한복 치마가 시야 끝에 걸려들었다.

“어쩌다가 그 지독한 게 붙어서.”

중후하면서도 낯선 목소리가 이연의 귓가에 에둘러 꽂혀 왔다. 높낮이가 거의 없는 평이한 음성이었지만 이연은 그게 꼭 혀를 차는 것처럼 들렸다.

“보니까 버드나무 가지도 곧 꺾이게 생겼네. 많이 아플 게야.”

“……!”

이질적인 한 쌍의 눈이 그녀를 가로막은 남자를 관통하여 박혀 든다. 보이는 건 권채우의 흰 티셔츠뿐인데 무당의 얼굴이 생생하게 보이는 듯했다. 나이를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던 이목구비가 흐릿하게 떠올랐다.

버드나무 가지…….

이연은 그 말을 곱씹다 말고 혀를 깨물었다. 기껏해야 타인, 그것도 사기꾼일지도 모르는 누군가의 몇 마디 말. 고작 그 정도의 가치인데도 왜 이렇게 물러날 곳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지 도통 모를 일이었다.

“이연 씨.”

때마침 미묘하게 달라진 숨소리를 알아챈 남자가 고개를 숙여 왔다. 이연은 권채우의 옷자락을 쥐고 흔들리기 시작한 감정을 애써 꾹꾹 삼켰다. 

스륵스륵, 치맛자락이 유유히 멀어진다. 이연은 미련 없이 떠나는 무당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가만히 있다 뺨이라도 맞은 기분이었다. 무당의 말 그대로였다. 화가 난다기보다 아파서. 이연은 잠시 숨 쉴 구멍을 찾아 권채우의 품에 코를 박았다. 

그는 구태여 끈질기게 묻지 않고 그저 이연의 뒤통수를 살살 쓸어 주었다.

“집으로 갈까요?”

“……네, 네. 우리 집으로 가요.”

나무는 늘 명쾌한 답이 나오는 반면, 권채우가 엮이면 뭐든 뒤죽박죽이 된다. 마음을 짓누르는 건 보다 무거운 죄책감이다. 입 다물고 그를 기만하고 있는 자신이다. 이연은 공연히 이마를 닦아 내며 떨리는 손을 등 뒤로 감추었다.

이제 감추고 도망치는 건 그만해야 할 때가 온 것 같았다. 근본 원인을 제거하지 않으면 결국 관계도 죽게 될 것이라고. 모두가, 모든 나무들이, 그렇게 말하며 이연의 등을 떠밀고 있었다. 

이해받고 싶다. 받아들여지고 싶다. 이연은 그 강렬한 소망을 디딤돌 삼아 현실을 피하는 데에만 썼던 다리를 한 발 내디뎠다.

“채우 씨, 나……, 심사 다 끝나면 할 말이 있어요.”

“뭔데요?”

“……그냥, 옛날이야기요.”

말을 하면서도 숨이 막히고 시야가 어지러웠다. 그럼에도 눈덩이처럼 불어난 거짓말을 이제는 청산해야 할 때다. 가장 두려운 순간이었으나, 언젠가 한 번은 넘어야 할 산이었다.

“2년 전에 채우 씨 처음 만났을 때요, 내가 말 안 한 게 있어요.”

버드나무 가지가 꺾인다는 것. 그건 사랑하는 이와 헤어진다는 뜻이었으므로.

* * *

먹구름이 낀 자정.

이연은 스탠드만 켠 사무실에 앉아 치료 계획서를 구상하고 있었다. 컴퓨터 모니터에서 나오는 빛이 한껏 집중한 그녀의 얼굴을 비춘다. 조용한 방 안은 그녀가 거침없이 두들기는 키보드 소리로 가득했다.

이내 그녀가 책을 찾으려 고개를 돌리는 순간―

“……깜짝이야!”

상체가 크게 들썩이면서 의자 바퀴가 뒤로 굴러갔다. 귀신이라도 본 듯 이연이 펄쩍 뛰자 문설주에 기대 있던 권채우의 입꼬리가 무겁게 축 처졌다. 큰 키가 왜인지 굽어 있고 훤히 드러난 목선이 가련해 보였다.

“……어,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요?”

“좀 됐어요.”

“그럼 나 부르지 그랬어요.”

“언제쯤 눈치채 주려나 오기가 생겨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어…….”

“그런데 이연 씨 눈치 빠르네요. 조금만 더 늦었으면 뭐라도 입에 물어야지 싶었는데.”

이연은 확연히 짙어지는 남자의 눈빛에 허둥지둥 책을 정리했다. 저런 눈이 되면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이연은 그의 신호를 밀어내듯 말했다.

“먼저 자고 있으라니까 왜 나왔어요?”

“잠이 안 와요.”

이연이 반사적으로 탁상시계를 힐끔거렸다. 새벽 두 시. 이연은 눈을 크게 뜨고 그를 타박했다.

“그래도 어떻게든 자야죠, 내일 출근이잖아요!”

“침대에 혼자 무슨 재미로 누워요.”

그가 투정 부리듯 문설주에 이마를 비비적거리다 돌연 이연을 홱 쳐다보았다. 몸은 징얼대고 있는데 흐트러진 앞머리를 뚫고 쏘아지는 눈빛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어서. 이연은 저도 모르게 의자 팔걸이를 꽉 붙잡았다.

“내, 내 말은 그냥 수면을 하라는 거죠…….”

“이연 씨 없으면 그런 것조차 하기 싫어요. 혹시 나 방해돼요?”

“…….”

그의 물음에 아주 잠깐 대답할 타이밍을 놓치자 권채우가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그는 피곤이 쌓인 얼굴을 한 차례 쓸어내리며 문지방에서 미적거렸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어쩐지 서운함이 비치는 듯도 하여 이연이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그는 이미 터덜터덜 자리를 뜬 후였고, 이연은 팔만 내민 채 얼어붙었다. 머쓱하게 다시 자리에 앉은 다음에도 권채우의 마지막 얼굴이 신경 쓰여 집중이 되지 않았다.

그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홱 들어 올리자 권채우가 그녀의 몸빼 바지 두 개를 달랑 내민 채 서 있었다.

“이연 씨, 골라 봐요.”

“네?”

“나도 이연 씨 도와주고 싶어서요. 심사 날에 입고 갈 거라도 좋으니까―”

그가 재촉하듯 몸빼 바지를 흔들었다.

“왼쪽, 오른쪽?”

“……오른쪽이요.”

이연은 왜인지 목구멍이 간지러운 기분에 성대를 한 번 조였다 풀었다.

“그렇죠, 아무래도 이게 더 고급스럽죠.”

이연은 민망함에 얼굴을 가렸으나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 후로도 권채우는 자주 찾아왔다. 겉으로는 전혀 차이점이 없어 보이는 밀짚모자를 가져와 장단점을 설명한다거나, 흙으로 더러워진 운동화를 서슴없이 들고 온다거나, 가제 손수건을 비교한다거나. 이연은 모니터를 보고 있다가도 힐끔힐끔 문가를 쳐다보았다. 어느새 그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텀블러 두 개를 가져온 그가 물었다.

“어떤 게 좋아요?”

그리고 이연은 그 어느 때보다 환한 웃음을 참지 못하고 대답했다.

“나는 채우 씨가 제일 좋아요.”

남자는 숫제 얻어맞은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더니 이마에서부터 셔츠 위로 보이는 쇄골까지 순식간에 새빨개졌다.

* * *

이연은 아침 일찍부터 권채우의 살뜰한 배웅과 입맞춤을 받으며 집을 나섰다. 새벽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함께 골랐던 것들이 눈에 닿을 때마다 푸시시 웃음이 나왔다. 

그게 꼭 소풍가기 전의 설렘 같았다는 걸 그는 알기나 할까. 막상 어릴 적에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건 던데. 

그러나 몽글거렸던 기분도 잠시, 이연은 말문이 막혀 얼굴을 굳히고 섰다. 

“내가 마 못 산데이! 그걸 지금 말하면 우야는데!”

추자가 심사 담당자의 팔을 흔들며 눈을 희번덕거렸다.

장장 며칠 동안 밤을 꼴딱 새 가며 추자와 치료 계획서를 작성하고, 내과 및 외과 수술을 시뮬레이션으로 수십 번 연습한 후, 심사 당일 신령목 앞에 도착한 상황에서 심사관이 한다는 소리가―

“……미 병원 원장님이 불참을 해요?”

“네.”

“운전 도중 낙석 사고를 당하신 모양입니다. 전치 2주로 목 깁스를 하셨다고 저희도 방금 전 연락을 받은지라. 그래도 부전승은 적용되지 않습니다. 가문비 나무병원은 이대로 심사 진행하시겠습니까?”

심사관은 간신히 추자를 떨쳐 내고 괜스레 넥타이를 목 끝까지 꽉 조였다.

“그 말, 진짜예요?”

“네?”

“사실 여부는 확인하신 거예요?”

“먼저 기권 의사를 밝히셨기 때문에 굳이 하지는 않았습니다.”

“…….”

그러나 만약, 아주 만약에, 그녀의 추측대로 신목을 치료해야만 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괴담이라는 핑계를 이용한 것이라면……. 이연은 개미 떼처럼 모인 구경꾼들을 둘러보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주민들의 적대적인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이연과 추자가 본격적인 준비를 위해 작업 현장을 정돈하고 있는 사이, 별안간 소주병이 날아와 바닥에 부딪혔다.

“……!”

“……!”

순식간에 공기가 팽팽해졌다. 날카로운 파열음을 내며 산산이 부서진 유리 조각이 햇빛을 받아 위험스레 번뜩였다. 이연은 하던 일을 멈추고 그대로 얼어 버렸다.

“이, 이, 정신 나간 것들이―! 우리 신령님 수형이 조금이라도 변하기만 해 봐라, 비싼 나뭇잎에 흠이라도 냈다간 봐! 그랬다간 하늘에서 천벌이 내려올 것이야! 감히, 어떻게 감히……!”

며칠 전 굿판이 벌어졌던 곳에서 보았던 어르신이 콧등을 시뻘겋게 물들인 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비싼 나뭇잎이라니, 이번엔 퍽 진심이 느껴지는 호통이었다.

지난 며칠간 이연이 알아본 바에 의하면, 신목에서 떨어지는 나뭇잎으로도 장사를 한 모양이었다. 땅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잡은 나뭇잎에 소원을 빌어 적으면 이루어진다는 식의. 

지금이야 그런 것에 홀리는 사람이 별로 없을 테지만 불과 이, 삼십 년 전만 해도 호황이었다고 들었다. 아마도 그때 가장 수혜를 본 주민들이 저 어르신 세대가 아닐까 싶다.

게다가 이 신령목을 고치기 위해 모인 찬조금이 자그마치 1억이었다는데 대체 그 돈을 어디에 썼는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으로선 노인들 주머니를 야금야금 털어 군청과 무당과 나무의사가 사이좋게 나눠 먹었다고 해도 그리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추자 씨, 괜찮아요?”

“대가리가 깨진 것도 아이고 고작 쐬주병에 놀라면 계추자가 아이제.”

“다른 방법이 없어요. 지금이 아니면 이 나무는 죽을 거예요.”

이연은 마른침을 삼키며 온갖 불만에 가득 찬 얼굴들을 훑어보았다. 토너먼트를 찍고 있는 카메라, 농성이라도 벌일 기세인 주민들, 자기들끼리 속닥거리는 군청 관계자들. 그들은 냉정한 채점표를 이연에게 창처럼 겨누고 있었다. 순간 손끝이 떨렸지만 바지를 꽉 움켜쥐었다.

“저 사람들은 오늘 신목이 잘려 나가는 걸 보게 될 거예요.”

이윽고 수술을 시작하기 전, 이연은 짤막하게 눈을 감고 신목에게 기도를 올렸다.

부디 버텨 주세요. 상처를 치유하는 힘은 당신의 뿌리에서 나올 거예요.

‘만약 잘못되면……, 저는 이사를 가야 할지도 몰라요.’

이연은 이제 딸린 식구가 있는 어엿한 가장의 입장에서 현실적인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흔들리면 권채우도 흔들린다. 이연은 당당하게 심호흡을 한 뒤 사다리를 힘껏 들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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