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이연은 저도 모르게 빳빳이 세우고 있던 상체를 풀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한숨이 빠져나갔다.
“체구가 작아서 초등학교 고학년쯤으로 보였는데…. 나중에 돌아와서 검색해 보니까 유럽에서 데뷔한 것치고 한국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더라고요. 희한하지 않슴까?”
주동미는 다시 생각해도 미스터리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그때 부모님한테 얼마나 타박을 들었던지. 똑같은 검은 머리인데 너는 왜 나이도 많은 게 이 모양이냐고.”
으으, 그녀가 몸서리를 치며 입술을 삐죽였다.
“그런데 우연찮게 우리 후배님도 클래식을 잘 아는 것 같지 말임다.”
집게를 바삐 움직이던 권채우가 우뚝 멈추었고, 이연은 처음 듣는 이야기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채우 씨가요?”
“……아, 원장님 몰랐슴까? 저번에 저희 외삼촌 파티에서―”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세요.”
주동미의 술주정에는 내내 관심도 없던 권채우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러나 이연은 단칼에 잘린 말이 궁금하여 눈싸움 같은 시선을 주고받는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권채우는 성가시다는 듯 무언의 압력을 가하고 있었고, 주동미는 그런 외압에 저항하듯 미간 사이에 힘을 주었다. 그저 구경만 하는데도 경직된 공기가 삐쭉삐쭉 살갗을 찌른다. 이연이 냉큼 남자의 팔뚝을 붙잡았다.
“나도 알고 싶은데.”
“……내가―”
그녀의 말간 눈동자를 보는 순간 권채우는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황당하리만치 재빠른 순종. 주동미는 술맛이 떨어진다는 듯 혀를 찼다.
“저번에 음악 제목을 단번에 맞췄거든요.”
“그랬어요?”
“예, 아마 그래서 그런 걸 거예요.”
권채우의 눈길이 잠시 주동미에게 닿았지만, 그녀는 울리지 않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암호 패턴을 엉망으로 그리는 데 온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연이 고개를 기울이는 듯하더니 불쑥 자세를 바로 했다.
“채우 씨 잠잘 때, 내가 가끔 음악을 틀어 놓거든요. 그러면 잘 자요.”
―울지도 않고. 그 말은 권채우만 눈치 챌 수 있게 입 모양으로 시늉만 냈다. 그러자 무뚝뚝했던 그의 입가가 피어나듯 올라갔다. 이내 남자는 똑같이 목소리를 낮춰 작게 말했다.
“방법이 그것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 우는 남편 뚝 그치게 하는 건.”
“네?”
이연이 기억을 뒤지느라 천천히 눈을 끔뻑이는 동안, 그가 고개를 내려 귓가에 속삭였다.
“섹스하고 자면 나 안 우는데.”
“……!”
순식간에 귓불이 달아올랐다. 그때 테이블 아래로 깍지를 껴 왔던 권채우가 그 손에 와락 힘을 주었다.
“그래서 오늘은 나 울어요, 말아요?”
* * *
“하읏……!”
그는 한 번에 끝까지 들어왔다. 질 내부를 깊숙이 밀어젖히면서. 황홀한 쾌감에 정신을 못 차리는 사이, 차가운 벽에 이마가 쿵쿵 찧었다. 두꺼운 귀두가 정신없이 질구를 들락거리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권채우는 이연의 입술부터 물었다. 그렇게 시작한 스킨십이 종내에는 여기까지 온 것이다.
거실 서랍장에 훌쩍 들어 앉혀져 온몸이 녹아내릴 때까지 진득하게 빨렸고, 테이블이며 소파는 금세 엉망이 되었다. 훌훌 떨어진 옷가지를 밟은 이연은 서서 박히는 자세에 어쩔 줄을 몰랐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남자의 존재감에 심장이 쉼 없이 뛰었다.
“하아…, 응……!”
벽을 짚고서 허리를 뒤로 빼내었다. 그를 더 수월하게 받아들이기 위한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엉덩잇살이 그의 치골에 부딪치고 비벼졌다. 그는 성기를 반절 정도만 빼내며 빠르게 추삽질을 했다.
“오늘도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어요.”
“흐으, 하아…!”
“이연 씨는 안 그랬어요? 나 출근시키고 나무 만져서 좋기만 했어요?”
“흐읏……!”
“나는 진짜, 후…, 죽는 줄 알았는데.”
그의 뜨거운 숨소리가 목덜미에 닿자 오싹오싹 소름이 올라왔다. 그가 거친 손바닥으로 이연의 맨들맨들한 젖가슴을 쥐었다. 탄력 있게 흔들리는 가슴을 주물럭거리고 목덜미에는 이를 세워 긁었다.
그는 느릿하게 성기를 빼냈다가 느닷없이 쾅, 하고 박는 짓거리를 반복했다. 그 타격감에 이연의 엉덩잇살이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권채우는 좌우로 목을 뚝뚝 꺾으며 입맛을 다셨다.
“이연 씨도 그냥 나랑 같이 짐승 잡으면 안 돼요?”
“읏……!”
“그런데 가끔 나는, 덫에 걸린 동물을 풀어줄 때마다 아쉽다는 생각이 들어요. 정작 나는 이연 씨를 그렇게 붙들어놓고 싶은데…!”
그가 불현듯 이연의 긴 머리채를 잡아당겼다. 그녀는 머리끝까지 종처럼 울려 대는 감각에 입술을 깨물었다. 벽에 팔꿈치를 대자 허리는 더욱 유연하게 굴곡이 졌다. 서로가 서로에게 부딪치는 반동 때문에 엉덩이와 허벅지는 따귀를 맞는 듯 얼얼했다. 그럼에도 아프기보다 녹아내릴 듯이 감미로웠다.
“응, 흐응…….”
평소라면 닿지 않았을 곳까지 길쭉한 페니스가 깊이 침투한다. 뒤에서 뻗어 나온 손이 젖가슴을 한가득 주무르고, 기둥은 푹푹 젖은 구멍을 쑤셔 대고, 애액은 엉키며 찰진 소리를 낸다. 이연은 벽지를 조금 긁었다.
그때 갈급해 보이는 권채우가 그녀의 턱을 제 쪽으로 돌렸다. 절절 끓고 있는 눈빛과 마주친 것도 잠시, 입술이 강하게 부딪쳤다. 그는 능숙하게 점막을 훑고 도톰한 입술을 빨아 당겼다. 혀 아래에 고인 침까지 모조리 앗아간 남자는 뜨거운 입 속을 질척하게 휘저었다.
“하아…….”
이연은 더욱 빠듯하게 목이 꺾였다. 이내 권채우가 입술을 떼자 얇은 실선이 늘어났다 끊어졌다.
흐트러진 그녀의 눈동자가 다소 둔하게 움직인다. 그는 땀이 배어 나오는 그녀의 등허리에 콧대를 딱 붙이고는 허리를 들썩였다. 눈가도, 입술도, 목덜미도 전부 불그스름한 모습이 봉오리처럼 예뻤다.
“이연 씨, 하아, 이연 씨.”
이연의 골반을 잡고 짓쳐 들어갈 때마다 복근이 두드러지고, 손등부터 팔뚝까지 힘줄이 바짝 섰다. 깊은 곳까지 퍽퍽 찔러 대는 귀두는 끝 모르게 커졌다.
예민한 내벽을 짓누르듯 비벼 대는 힘에 그녀는 파르르 떨었다. 발가락 어딘가가 곱아들었다. 죽을 것 같았다.
“하윽……!”
“요즘은 하루하루가 너무 아깝고 소중해서, 흣….”
별안간 남자는 이연의 가슴이 벽에 짓눌리도록 밀어붙였다. 그는 빠진 성기를 다시 꽂아 넣으며 야들야들한 귓불을 강하게 빨아들였다. 성기가 쑥 빠져나갔다가 다시 안을 찌른다.
“불안할 때가 있어요.”
그가 이연의 유두를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 허리를 쳐올렸다.
“이연 씨, 우리 이렇게만 살아요. 아무런 걱정 없이, 씹질 하면서.”
“하응……!”
“나는 이연 씨만 있으면 돼요. 다른 사람들은 필요 없어요. 나는 이연 씨가 하는 말만 믿어요.”
이연은 우는 아이처럼 팔뚝에 얼굴을 박고 연신 흐느꼈다. 권채우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그동안 요령 좋게 감추어 왔던 표정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오직 이연에게만 고정된 시선이었으나 초점이 흔들렸다.
‘저 여자에게 속지 마십시오……! 저 여자가 도련님을―!’
그는 이연의 허리를 두 팔로 단단히 옭매며 고개를 가볍게 털었다. 그러나 어쩌지 못하고 얼굴을 거칠게 일그러뜨린 남자는 끝끝내 안개처럼 스미는 불안을 떨쳐 내지 못했다.
* * *
“제때 말을 안 하니까 문제가 되는 기지.”
추자는 오글오글 구겨진 나뭇잎 끝을 보며 혀를 끌끌 찼다.
정원수로 심어진 금목서(물푸레나뭇과의 상록 소교목)를 바라보니 삼분의 일 가량의 나무가 오그라들고 말라 죽어 있었다. 나무를 진찰하던 이연이 착잡한 얼굴로 굽혔던 허리를 폈다.
“이거 약물 중독이네요.”
사인은 반벨 농약에 의한 중독이었다. 제초제는 워낙에 흔히 쓰이는 터라, 나무가 살짝 시들시들해 보인대도 충분히 회생할 수 있을 거라 착각하는 데서 문제는 발생한다.
“추자 씨, 질산 칼슘이랑 칼륨 갖고 왔죠?”
손이 빠른 추자는 이미 보조 가방을 뒤적이며 약품을 꺼내 놓고 있었다. 동시에 혼잣말처럼 탄식을 이어 갔다.
“백날 기다려 봤자 병만 깊어지는 기지…….”
순간 이연이 멈칫했다.
“후딱 말해야 우리 같은 사람들이 뭐라도 해 볼 수 있는 거 아이겠나.”
“…….”
그러자 밤새 해쓱해진 이연이 별안간 손톱을 물어뜯으며 추자의 곁을 서성이기 시작했다.
추자는 그런 이연을 별스럽게 쳐다보다가 울긋불긋 난리가 난 자국들을 발견했다. 긴 머리를 자연스럽게 틀어 올린 그녀의 가녀린 목이 화려하다. 참 집요하게도 씹어 놓았다는 생각에 추자는 괜히 머리가 아파 왔다.
“……제가 만약, 다 털어놓으면 어떻게 될까요?”
이연의 입에서 맥락 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못 알아들을 리 없는 추자였다.
“권 서방한테?”
“……네.”
추자의 직선적인 눈빛이 그대로 꽂혀 왔다.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시선을 주고받았다.
“감당할 수 있겠나.”
“자신은 없어요.”
이연에게 있어 진실은 곧 파탄이었다. 배신감에 타들어 갔던 이모와 이모부, 그리고 사촌들을 떠올려 본다면―. 역시 짤막한 상상만으로도 한기가 몰아닥쳤다.
그럼에도, 이연의 깊은 응달에 이끼처럼 끼어 있는 감정을 눈치채고 먼저 손을 내밀어 준 사람은 권채우 뿐이어서.
“그래도 그 사람한테만큼은 이해받고 싶다는 욕심이 생겨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