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알아들었으면 다시는 내 눈에 띄지 마세요.”
장범희는 독기가 사라진 그의 모습에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피만 보면 애새끼처럼 눈이 돌아 현장을 휩쓸던 사람이 정중하게 이야기하는 꼴이 낯설다 못해 소름이 끼쳤다.
권채우는 미련 없이 자리를 떠났고, 장범희는 저릿저릿한 팔을 돌려 보며 조용히 얼굴을 찌푸렸다.
지이잉- 핸드폰이 울렸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 그러나 이제는 눈에 익은, 퍽 진절머리가 나는 번호다. 아니나 다를까, 화면을 켜 보니 실수처럼 하룻밤 몸을 섞은 이후, 며칠 새 계속되고 있는 누군가의 문자였다.
『내 이름은 잊어도 내 몸매는 잊을 수 없을 텐데.』
장범희는 일그러진 미간을 긁으며 권채우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았다.
정말 되는 일이 하나 없었다.
* * *
“진짜 이름값 못하는 남자라니까요?”
지글지글 고기 굽는 냄새가 올라오는 삼겹살집.
“나무 원장님, 그거 아심까? 호랑이는 교미를 백 번 합니다.”
“네? 쿠, 쿨럭!”
물을 마시던 이연의 입에서 도로 물방울들이 튀어나왔다.
“그런데 이름에 떡하니 호랑이를 박아 둔 남자가 초식남도 아니고, 그렇게 담백하게 구는 게 말이 됩니까?”
“어, 글쎄요…….”
“말이 안 되는 검다, 말이 안 돼요!”
주동미는 들고 있던 잔을 격하게 흔들다 손등으로 넘쳐흐른 술을 혀로 핥아 올렸다.
이연은 목덜미를 벌겋게 물들이고 혀가 꼬이기 시작한 주동미를 거쳐 둥글게 뭉쳐 있는 빈 소주병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어쩌다 이 상황까지 오게 됐는지 지난 몇 주를 천천히 되짚어 보았다.
예기치 못한 사고로 심사가 잠정 중단되었던 <가문비 나무병원>과 <미 병원>에게 새로운 토너먼트 주제가 뜬 건 산사태가 벌어진 지 3주나 지난 시점이었다.
재심사의 내용은 ‘신령목’이라 불리는 귀신 들린 나무를 치료하는 일이었고―
“미칫나, 이것들이! 그기 어떤 나문데!”
추자는 테이블을 쾅쾅 내리치며 눈을 매섭게 치켜떴다.
“……우리가 너무 과하게 겁먹는 건 아닐까요?”
“태평한 소리는 하덜 마라!”
문제는 이 나무를 치료하려 했던 수많은 나무의사들에게 설명할 수 없는 불운이 빈번하게 닥쳤다는 것이다.
자녀들의 시험 불합격부터 이혼, 투자 사기 등으로부터의 심리적인 타격과 교통사고, 추락 사고 등의 신체적인 손상까지. 화이도에 사는 나무의사라면 모를 수 없는 괴담이었다.
“이건 절대 하면 안 된대이. 떨어지는 액운 밑에 일부러 낯짝 딜이미는 기다!”
이연은 찻잔을 어루만지며 테이블의 나뭇결을 의미 없이 바라보았다.
“다른 병원 놈들은 지들끼리 모여 안도했다 카든데. 승질이 나서 몬 살겠다!”
그제야 이연의 얼굴도 어둑해졌다. 하지만 고심해 본들 답은 나오지 않았다. 이상하게 산사태 때부터 난감한 케이스만 맡는 것 같단 생각이 들었지만 쓸데없는 고민은 넣어 두었다.
오백 년이 넘은 신령목 옆에는 서낭당이라는 작은 신당이 있다. 그만큼 신성시되는 한 마을의 수호신을 살리기 위해 주민들은 큰돈을 모아 무당에게 굿을 부탁했지만, 별다른 차도를 보진 못했다.
오히려 과하게 부풀려진 이상한 괴담 때문에 나무는 적절한 치료 시기를 놓치고, 지금은 고사 직전이라는 것이다. 이연은 산림청이 잘도 이 골칫거리 케이스를 들고 왔다 싶었다.
“어쩔 수 없죠, 그래도 하는 수밖에. 제가 언제 나무 가리는 거 봤어요?”
이연의 담백한 대꾸에 추자의 얼굴이 흐려진 것도 잠시―
“사람은 가려도 나무는 가리면 안 되는 건데.”
곧장 부연하는 말에는 헹, 하고 코웃음을 쳤다.
“하모, 그랬지. 백해무익한 식물인간이 있다고 질색팔색을 하던 기 엊그젠데. 아주 인륜을 부서뜨리는 놈팽이라고 나까정 거짓말재이로 만든 게 엊그제래이. 그랬던 가시내가 그래 홀라당 배가 맞나.”
이연은 상체를 움찔 떨며 찻잔을 황급히 들어올렸다.
“하모, 사람은 가려도 나무 기둥은 거리면 안 되제.”
추자는 짓궂게 낄낄댔고, 애연은 애써 찻물을 들이켜며 민망한 표정을 조금이라도 가려보고자 애썼다.
“우리 권 서방은 늦나?”
“큼…! 오늘 회식이래요.”
“아, 오늘이 그날이가.”
그리고 또 하나의 소식이라면 권채우가 야생 동물 구조 센터에 인턴으로, 즉 주동미의 직속 후배로 들어갔다는 점이다.
그는 부상당한 동물들의 구조와 이송에 대한 지원 업무를 맡았고, 현장 출동과 자격증 공부로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다. 그 탓에 함께 하는 시간도 조금씩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아침 점심 저녁, 삼시 세끼를 함께 먹는 일상은 놀랍게도 변하지 않았다. 그가 점심시간만 되면 꼬박꼬박 이연을 보러 달려왔기 때문이다.
조직 생활에 이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인지 알고 있기에 처음엔 기함을 하고 돌려보냈지만, 그는 학습력이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사흘…….
나중이 되자 이연은 숫제 점심시간이 무서워졌다. 긴장을 하고 있노라면 어김없이 문이 열리고 “이연 씨.” 하고 애가 타는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
게다가 밤이면 밤마다 심술을 부리느라 이연의 허리만 부서지듯 갈리는 나날이 이어지고 있었다.
어느 날은 밤새도록 이연을 놓아주지 않고 꿰뚫다가 한숨도 자지 않고 출근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이건 뭔가 잘못됐다. 얼추 구색을 갖춘 맞벌이 부부가 됐지만 어딘가가 잘못됐다……!
그러던 찰나 주동미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 것이다.
“원장님, 따―악 이번 한 번만 회식 자리에 참석해줄 수 있으심까?”
“……네?”
“상전 같은 권채우 씨 때문에 지금껏 환영회 한번을 못 했슴다. 공식적인 핑계가 있어야 다들 어깨에서 힘도 빼고, 포식도 하고 그러는 건데. 그놈은 팀장님 호통도 안 먹히는 또라, 아니 변종임다. 그러니 우리 원장님께서 불쌍한 저희의 핑계가 되어 주십사……! 이렇게 부탁드림다!”
이연은 시계를 확인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추자 씨, 저 다녀올게요.”
남편의 원만한 사회생활과 자신의 컨디션을 위한다는 마음으로.
그녀는 흔쾌히 주동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진짜 이름값 못하는 남자라니까요?”
지글지글 고기 굽는 냄새가 올라오는 삼겹살집.
“말이 안 되는 검다, 말이 안 돼요!”
여러 쌍의 눈들이 이쪽을 향한다. 호기심과 경악이 뒤섞인 각각의 눈빛이 이연과 권채우, 그리고 다시 이연에게 꽂혀 들었다. 센터 직원들의 관심은 생각보다 투명했다.
이연이 저도 모르게 어깨를 굳히자 마침 젓가락을 탁 내려놓은 권채우가 눈을 치떴다. 그 사나운 눈초리에 선배들은 파스스 침대 밑으로 사라지는 미물처럼 시치미를 딱 뗐다.
이연은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이 남자의 평판이 어떤지 눈에 훤히 보이는 듯해서. 버릇없이 자란 게 전부 제 잘못처럼 느껴졌다.
한편 주동미는 반쯤 풀린 눈으로 여전히 서러움을 토해 내고 있었다.
“나처럼 육감적인 여자를 눈앞에 두고, 그렇게 내외 떠는 인간은 보지를 못했슴다! 명색이 범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슴까! 이거 팔자 태만 아님까? 범은 범답게 굴어야지!”
권채우는 선배의 술주정에 찡그린 얼굴을 구태여 감추지 않으며 고기가 구워지는 족족 이연의 앞 접시에 날라 주었다.
분명 남편의 원만한 사회생활을 위해 참석한 참이었는데, 이건 내조가 아니라 흡사 데이트를 온 것 같다. 이연은 쭈뼛쭈뼛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채우 씨, 저기 가서 선배들이랑 얘기도 하고, 술잔도 섞고 그래야 하지 않아요?”
이연이 조심스럽게 그를 부추겼다. 그러자 권채우가 가늘게 눈을 떴다.
“이연 씨는 남들이랑 술잔 섞어 봤어요?”
그는 이연에게 “나 그쪽으로 가고 있어요.”라는 전화를 받았을 때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낯선 장소에서 그녀를 만난 반가움은 찰나였다. 이렇게 북적북적하고 연기가 자욱한 곳에 이연을 오래 두고 싶지 않았다.
“내 아내가 구경거리 된 것도 거슬려 죽겠는데, 그 말은 더하네요.”
그때 권채우가 테이블 밑으로 깍지를 껴 왔다.
“섞긴 뭘 섞어.”
은근히 짙어지는 눈빛과 서늘한 목소리. 다리 사이가 별안간 욱신거렸다. 머리보다도 먼저 반응하는 몸이 당황스러워 이연이 흠칫 손을 빼려고 할 때였다.
“원장님, 그거 아심까?”
주동미가 꽃받침을 한 채 두 사람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느슨하게 풀린 동공은 이곳이 아닌 저 너머의 무언가를 더듬듯 흐리멍덩하게 움직였다. 그 모습이 짐짓 무섭기도 했지만 이내 꼬부라진 혀는 기어코 놀라운 말을 뱉어 내었다.
“저거, 저거, 어디서 많이 봤다 했더니, 내가 어디서 봤는 줄 아심까?”
“……!”
가볍게 던져진 그 말에 심장이 뚝 떨어져 구른다.
……권채우를, 예전에 본 적이 있다고?
시끄럽던 고기집의 소음이 멀어지고, 엉망으로 뛰는 그녀의 맥박 소리만이 사각지대를 꽉 메꾸었다. 마른침을 한 번 삼키는 데에도 체감상 오랜 시간이 흐르는 것 같았다.
“머리 싸매고 고민하다가 최근에 떠올랐슴다.”
주동미는 이따금씩 눈에 힘을 주며 권채우를 향해 흐늘거리는 삿대질을 해 댔다.
“고등학교 방학 때 가족끼리 유럽 여행을 간 적이 있슴다. 그때 오스트리아 빈에서 봤던 어린 애가 있었는데, 그 애랑 무―지 비슷하게 생겼슴다. 역변 안 하고 그대로 컸다면 딱 요렇게 자랐을 검다. 물론 동일 인물일 리는 없겠지만.”
그녀가 픽, 하고 비웃듯 웃음을 흘렸다.
“그 애는 엄청 대단했지만 저놈은 오늘도 사슴 둘러업고 산 탔지 말입니다. 그런데도 참 많이 닮았슴다. 나이도 직업도 이렇게나 다른데.”
“……어린 애요?”
이연이 의아한 듯 물었다. 손끝이 순간적으로 차가워졌지만 권채우의 악력 때문인지 금세 녹아내렸다. 오히려 꽉 잡힌 손바닥 사이에 습기가 돌았다.
“물론 평범한 꼬맹이는 아니었슴다. 그 애 얼굴부터 내는 소리까지, 한번 들으면 잊을 수 없을 만큼 워낙에 강렬했어서.”
주동미가 가볍게 어깨를 추어올리며 말했다.
“첼리스트였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