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2화 (73/158)

#72

한편 이연은 공구 박스를 들고 들어오는 남자를 맞이하며 거실 쪽으로 길을 텄다.

“전화로 말씀드렸다시피 이게 왜 터졌는지 모르겠어요.”

“한번 보겠습니다.”

업체 직원은 옆구리에 끼고 온 접이식 사다리를 펼쳐 놓았다. 그녀가 전화를 건 곳은 2년 전, 주택을 증축하면서 아래층의 전구까지 싹 다 LED로 교체해 주었던 업체였다.

부엌으로 자리를 피해 준 이연은 사다리에 올라가 터진 전구를 확인하는 직원을 이따금씩 쳐다보았다.

그런데 직원은 입매를 딱딱하게 굳힌 채 뜬금없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기 일쑤였고, 그곳에선―

권채우가 살벌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얼굴은 이연이 보기에도 흠칫할 정도여서 거실에 감도는 기묘한 분위기가 쉬이 손에 잡혔다.

“…….”

“…….”

권채우는 여전히 사람을 끌어 내릴 듯이 쳐다보았고, 업체 직원은 그 빤한 시선이 신경 쓰이는지 영 집중을 못 하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직원은 권채우의 시선을 피하기는커녕 의미심장하게 그를 주시하다 시선을 돌리곤 했다. 두 남자의 미묘한 신경전은 그렇게 계속 이어졌다.

이연은 기사님을 배려해 후다닥 권채우의 팔을 잡아당기며 자리를 옮겼다. 그는 처음에 미동도 하지 않다가 힘을 줘 끙끙대는 이연을 발견하고는 그제야 선심 쓰듯 다리를 움직였다.

“채우 씨, 왜 그래요?”

이연이 소근거렸다. 하지만 그는 턱을 악다물고 고개를 젓기만 할 뿐, 속 시원히 털어놓진 않았다. 고갯짓에 맞춰 앞머리가 흔들렸다 가라앉는 모습이 순간 순진한 소년처럼 보였다.

“다른 사람이 불편한 거면 여기에 있어요.”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럼요?”

“그냥…….”

그가 어울리지 않게 말을 끌며 거실 쪽으로 다시 힐끗 시선을 던졌다.

“기분이 좀 묘해서요. 이연 씨는 신경 안 써도 돼요.”

그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이연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더 이상 들려오는 말은 없었다.

한편 장범희는 전등 안에서 터진 도청 장치를 긴급히 회수하고 새 것으로 갈아 끼웠다. 전등이 터진 게 아니라 정확히는 그 안에 심어져 있던 도청 장치가 폭발했다. 전부 장범희가 벌인 짓이었다.

산사태가 일어나고 도련님이 다쳤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그는 각오를 마쳤다.

거리를 두고 감시만 하라는 지침을 깨고, 그에게 접근해 진실을 알려야겠다는 것.

예기치 못한 사고가 언제 어떻게 닥칠지 모르기에 더 이상은 마냥 손 놓고 기다릴 수가 없었다.

‘도련님, 이렇게 늦어지면 안 됩니다. 아직 끝마치지 못한 일이 있으시잖습니까.’

장범희의 얼굴에 뜻 모를 긴장감이 감돌았다.

제 가족을 끔찍이 여기는 장남 권기석은 띠동갑 아래의 막냇동생을 냉정히 쳐 낼 사람이 아니었다. 동생들을 곤란하게 하고 때로는 체벌을 할지언정 핏줄을 죽일 위인은 못 됐다. 그 무엇보다 가족의 결속에 대해 강조받고 자란 남자는 그 굴레와 의무에 대단히 집착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백치가 된 권채우가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래서 송곳니 빠진 짐승처럼 드러누워 있기만 한다면.

장범희의 미간에 짙은 주름이 졌다. 그건 기억을 잃기 전의 권채우가 결코 바라지 않을 일이기도 해서.

장범희는 도련님이 좋아했던 장미꽃을 종종 집 앞에 두고 가는 식으로 그를 자극해 보려 했다.

장미꽃 가시로 너를 찔러 영원히 나를 잊지 못하게 하겠다는 슈베르트의 가곡. 칼질을 하고 손을 새빨간 피로 물들이고 나면 꼭 흥얼거리곤 했던 그 구절이 혹 떠오르지는 않을까.

일종의 신호이자 자극제였으나 별다른 소용은 없었다.

그에 장범희는 직접 나서야 할 때임을 알았다.

사다리에서 내려오자 기다렸다는 듯 오렌지 주스가 내밀어졌다. 이연이 자그마한 트레이에 올려놓은 캔 음료를 그에게 권하고 있었다. 장범희는 일순 멈칫했지만 자연스럽게 고개를 숙이고 받았다.

“죄송합니다. 저희 쪽 제품 결함 같습니다.”

“아…….”

“앞으로도 이상한 점 있으면 언제든지 전화 주세요.”

그가 공구 박스를 열고 도구를 집어넣었다. 이연의 눈길이 그곳에 멈추는 순간이었다.

별안간 그녀의 안색이 눈에 띄게 창백해졌다. 부엌 의자에 심드렁하게 앉아 있던 권채우가 벌떡 일어났다.

“이연 씨?”

그가 예민하게 눈썹을 까딱이며 다가오자 그제야 이연은 아차 싶었다.

“아……! 아니에요. 별 거 아니에요. 그냥, 이상하게 기분이 좀 그래서.”

그녀는 팔뚝을 쓰다듬으며 다가온 권채우의 몸에 어깨를 기댔다. 업체 직원은 태연하게 공구 박스를 닫았지만, 이연은 검고 시멘트색투성이인 도구들 틈에서 저 혼자 붉은 꽃이 자꾸만 아른거렸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장미꽃은 스토킹의 증거였다. 묘하게 뒷머리가 당겼다.

“이연 씨, 나 잠깐만 나갔다 올게요.”

“네? 어디요?”

“그냥 요 앞에요. 마당이 지저분한 게 빗질할 때가 된 것 같네요.”

권채우는 이연의 뒤통수를 살살 쓰다듬어 주며 담백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나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현관문으로 향하는 직원을 쫓는 권채우의 동공이 별안간 싸늘하게 조여들었다.

퍽―!

장범희의 어깨가 담벼락에 부딪치고 목이 졸렸다. 권채우가 팔꿈치로 그의 목을 압박하고 있었다.

“우리, 초면은 아닌 걸로 기억하는데.”

호흡이 딸려 얼굴색이 시뻘게졌던 장범희가 그 한 마디에 확 살아났다. 권채우가 따라오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챈 순간, 놓칠 수 없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타이밍을 재고 있는데 다짜고짜 그가 먼저 덮쳐 왔다.

“도련―”

“거슬리는 것도 한두 번이지, 왜 자꾸 얼쩡거려요.”

“―네?”

예상치 못한 말에 장범희의 얼굴이 설핏 굳었다.

“우리 앞집에 사는 새끼 맞잖아요.”

“……!”

장범희는 속으로 혀를 찼다. 요즘 제 정체를 눈치 채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아졌지? 짐승 같은 촉을 가진 또 한 명의 귀찮은 여자가 연기처럼 머릿속을 스쳤다.

“지난번엔 호텔에서 서빙을 하고, 이번엔 전등을 고치러 온다?”

이쯤 되니 장범희는 조금 억울할 지경이었다. 권채우와 정면에서 마주쳤던 적은 없다. 기껏해야 이 골목길에서 황조윤과 마주친 순간이 몇 초. 파티 홀에선 사선으로 지나쳤던 게 전부다.

그런데도 그 조각난 공간을 이어 붙이기라도 하듯 쉽게 연결하는 귀신같은 감각이 무서웠다.

“내 기억으로는 벌써 세 번째 만남인데 이게 과연 우연일까요?”

권채우는 팔뚝을 더욱 밀어붙이며 잇새로 읊조렸다. 오랜만에 느껴 보는 압도적인 우위였다.

그것이 퍽 반갑고 기쁘기도 해서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더니 권채우의 얼굴이 더욱 사납게 구겨졌다.

“당신 누구야.”

“…….”

“대답해요. 어차피 하던 안 하던 내 아내한테 들러붙는 벌레 새끼는 죄다 밟아 놓을 거지만.”

그제야 장범희는 그가 어떤 오해를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도련님, 그게 아닙니다!”

그가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이내 얼굴을 굳혔다. 머뭇대던 장범희가 입을 열었다.

“제가 보낸 꽃, 받으셨습니까?”

“뭐?”

“그거 보고도 전혀 감이 안 오십니까?”

“…….”

“제 얼굴……, 정말 기억 안 나십니까?”

“이 변태 새끼가 대체 뭐라는 걸까.”

권채우가 불쾌한 듯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장범희는 제 뜻이 곡해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즉시 그의 정강이를 가격한 뒤 팔뚝에서 빠져나왔다. 그러나 어마어마한 반응속도로 권채우가 곧장 팔을 뻗어오자 두 사람은 합을 맞추듯 몇 번의 일격을 주고받았다.

다시 붙잡힌 장범희는 거칠거칠한 담벼락에 이번엔 머리가 부딪쳤다. 팔 한쪽이 가차 없이 꺾인 채 등바닥에 달라붙는다. 그가 이를 사리물고 신음을 참았다.

“수작부리지 말고 꺼져요. 경고는 오늘까지고 한 번만 더 내 눈에 띄면―”

“…윽, 도련님, 제발 정신 좀 차리십시오! 얼른 기억부터 찾아야지 태평하게 뭘 하고 계신 겁니까!”

얼핏 간절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의 목소리에 권채우가 우뚝 굳었다.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도련님이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움직였는지! 여기서 한가롭게 소꿉놀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저 여자에게 속지 마십시오……! 저 여자가 도련님을―!”

“그만.”

권채우가 그의 팔을 더욱 꺾으며 찍어 눌렀다.

“……도련님!”

“듣기 싫으니까 그만해요.”

장범희는 도무지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나직한 목소리는 태연자약하게 이어졌다.

“미안하게 됐지만, 과거는 궁금하지도 않고 관심도 없습니다. 중요한 순간에 내 아내랑 약속한 게 있어서.”

“……!”

장범희의 몸이 한 차례 움칫거렸으나 거기까지였다. 권채우는 아슬아슬하게 뼈가 부러지지 않을 선까지 팔꿈치를 꺾으며 그의 반항을 제지했다. 반사적으로 목줄을 당겨 개를 통제하듯 구는 행동이 퍽 익숙해 보였다.

“그러니 설령 나에 대해 잘 알고 있더라도 일단 그 입은 닥쳐 줬으면 하는데.”

“잠깐, 도련님, 속으시면 안 됩니다. 저 여자는―”

“그만하라고 했어. 그 좆같은 도련님 소리도 그만하고.”

순간 권채우의 목소리에 손대기 힘든 서리가 낀다.

어느새 장범희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최대한 고개를 꺾어 그를 바라보는데 권채우의 눈빛에는 일말의 호기심도, 흔들림도, 감정도 없었다.

눈과 귀를 막은 것 같은 그 견고한 거부에 장범희는 무릎이 풀썩 꺾이는 듯 허탈해졌다.

……권 가(家)의 사냥개들을 총괄하던 그 악귀는 대체 어디로 증발했습니까?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