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15년 전, 이연과 추자가 살던 동네가 한차례 뒤집어진 적이 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양복들이 허름한 주택가를 사정없이 들쑤시며 들이닥쳤다. 장독대와 세숫대야를 구둣발로 뻥뻥 차며 짓쳐들어온 무리는 산골 오지 동네를 이 잡듯이 뒤지고 다녔다.
평소 시끄러울 일이 없던 마을은 그렇게 며칠간 이유를 알 수 없는 소란에 시달려야 했고, 그 당시 이연은 홀로 집을 지키고 있었다. 오랜 실랑이 끝에 입원을 하게 된 삼촌과 추자가 한꺼번에 자리를 비운 곳에서.
그 날도 어김없이 적막했던 하루였다.
어디선가 나무를 긁어대는 소리만 아니었다면.
“……제, 제발. 저 좀 도와주세요. 문 좀 열어 주세요……!”
낡아 빠진 대청마루에 앉아 미적미적 숙제를 하고 있던 이연의 몸이 굳었다. 대문을 대차게 쾅쾅 두드리지도 못하고, 그저 손톱으로 조심스럽게 긁기만 하던 한 여인. 그 소름끼치는 소음에 신경이 곤두섰다.
“누, 누가 쫓아오고 있어서요. 제발, 제발 저 좀 숨겨 주세요! 살려 주세요!”
이연은 쥐고 있던 연필도 떨어뜨리고 엉덩이를 뒤로 물렸다.
“죄송해요, 그래도 잠깐만, 정말 잠깐만……, 흐윽……. 제발……!”
터져 나온 울음은 그나마 또렷했던 발음을 단번에 뭉갰다.
이연은 요 며칠 심란한 동네 분위기를 떠올리며 외지인들이 찾는 게 저 여자는 아닐까 생각했다. 욕을 하고 침을 뱉으며 투덜거리던 이웃 어르신들의 성화도 뇌리를 스쳤다.
그러나 벌벌 떨고 있는 여인의 모습에서 도망치듯 나와야 했던 자신의 모습이 겹쳐 보여서.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소녀는 슬리퍼를 주워 신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철컥― 문이 열렸다.
“흐……, 흐윽, 아……!”
입가를 단단히 틀어막은 채 울음을 삼키던 여인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동아줄처럼 내려온 어린 소녀의 교복을 보며 더욱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어쩌지 못하고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불긋불긋 짓무른 눈가와 산발이 된 머리카락, 산속을 헤매고 다녔는지 옷감에 엉긴 바스러진 잎사귀와 더러워진 손. 이연은 어두컴컴한 주위를 휘휘 둘러보며 재빨리 여인을 잡아당겼다.
그 후 여인은 짧게 머물다 갔다. 훗날 큰돈이 사례금으로 들어와 이연을 기겁하게 했지만 이내 성인이 되고, 도시로 나와 시끌벅적한 대학 생활을 시작하면서 그 일은 기억 저편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그러게요…….”
이연은 제사상을 올곧게 바라보며 나직이 읊조렸다.
“아마 잘 살고 있지 않을까요?”
사슴처럼 숨 가쁘게 도망쳐왔던 그 여인은 그토록 그리워하던 어린 아들을 무사히 만났을까.
“분명 아들이랑 잘 지내고 계실 거예요.”
* * *
“채우 씨.”
제사를 마치고 소파에 노곤하게 퍼져 있던 이연은 마당에 나갔다가 들어온 권채우에게 시선을 주었다. 웬 황토색의 서류 봉투가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그게 뭐예요?”
그가 말없이 봉투 앞면을 보여 주자 이연은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주동미가 늘 입고 다니던 잠바의 로고였다.
자연스럽게 봉투를 건네받아 내용물을 꺼내 보니 센터를 설명하는 간략한 카탈로그와 자기 소개서 양식이 눈에 띄었다. 주동미는 우는 얼굴을 휘황찬란하게 그려 넣은 노란색 포스트잇도 함께 보내왔다.
마침 권채우가 이연의 옆자리에 앉아 얼굴을 붙였다. 떨리는 숨결이 그녀의 솜털을 간지럽혔지만 이연은 심장이 발등에 떨어지는 것 같았다. 채워야 할 무수히 많은 빈칸들이 이연을 벽돌처럼 짓눌러서. 아니나 다를까, 양식을 슥 훑어본 권채우가 무심히 말했다.
“역시 이름, 생일 빼고는 잘 모르겠네요. 나머지는 이연 씨가 채워 주세요.”
“……채우 씨 신분증 새로 발급받았다고 했죠?”
“예.”
“그, 그거 나 좀 보여 줄래요?”
이연은 괜히 부산스러운 척 테이블을 정리하는 시늉을 했다. 이내 신분증을 가져온 남자는 별다른 의심 없이 그녀에게 내밀었고, 이연은 떨리는 손끝을 감추다 처음 보는 그의 증명사진에 곧장 시선이 멎었다.
이건 언제 적 사진일까. 그곳엔 이연이 모르는 권채우가 박혀 있었다. 사나운 눈매를 덮고도 남는 다정한 눈빛은 거기에 없었다. 본연의 날 선 눈매를 그대로 드러낸 차가운 얼굴만이 그녀를 쏘아보고 있었다.
“…….”
그녀는 마른침을 꿀꺽 넘기면서도 그 무정한 얼굴에서 좀처럼 눈길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생일은……’
주민 등록 번호로 시선을 옮긴 이연은 별안간 입술 안쪽을 세게 물었다.
권채우의 생일은 그녀가 산속에서 생매장 현장을 목격하고 권기석에게 잡혀갔던 그날이었다.
이 모든 일의 시작점이 된 하루. 소름 끼치게도 그날의 날짜가 권채우의 생일로 출력돼 있었다.
그녀는 불쑥 식은땀이 나는 기분에 신분증 모서리를 꾹 아프게 눌렀다. 이건 권기석의 은근한 경고일까, 비웃음일까.
“이연 씨, 내 학력은 어떻게 돼요?”
그의 나직한 목소리에 이연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또다시 시작되고야 만 도돌이표 게임이다. 이연은 귓불을 잡아당기며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순간 그녀는 모든 것을 털어놓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지금의 권채우라면, 거짓말에 관련된 모든 속사정까지도 이해해 주지 않을까?
비록 엉킨 게 많지만 우리 둘이라면 잘 풀어갈 수 있지 않을까?
“…….”
그러나 이연의 낯빛은 한없이 어두워졌다.
권채우 씨는 무시무시한 짓을 하고 있었고, 나를 죽이려고 했어요. 그 말이 간신히 되찾은 이 일상을 파괴할까 봐. 게다가 그녀를 깡그리 잊고 살벌하게 노려보던 그때의 설움과 공포가 칼처럼 명치에 박혀 들어서. 이연은 눈을 내리감고 또다시 묻는 것을 택했다.
‘그냥 조금만. 이대로 조금만 더…….’
그에게 빠져들면 빠져들수록 똑같은 고민이 골목의 담벼락처럼 시시각각 들이닥칠 것이다.
그럼에도 이연은 또 같은 것을 선택할 것을 알았다. 겁 많은 이의 회피는 그렇게 업보를 쌓아 갔다.
침묵이 길어지는 사이, 권채우는 소파 등에 뒤통수를 기대며 한숨처럼 말했다.
“내 가방끈이 짧나 보네요.”
“아, 그게…….”
“그래도 고등학교는 졸업했다고 해 줘요.”
이연은 학력 칸을 보고 잠시 입을 달싹이다 더 깔끔할 수 있는 문장을 택했다.
“졸업했어요. 그…… 검정고시로.”
남자는 말문이 막힌 듯 눈도 깜빡이지 않더니 와락 이를 악물었다.
“그래도 퇴학은 아니라고 해 줘요.”
흘끗 본 그의 얼굴에는 어떤 간절함마저 비치고 있었다.
“……그게, 그런 얼굴을 할 정도로 채우 씨한테 중요한 거예요?”
“이연 씨한테 매 순간 잘 보이고 싶어서 안달난 거 몰라요?”
그가 눈을 감은 채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손등에 바짝 선 핏줄이 푸릇푸릇했다.
“대체 이연 씨는 나의 어떤 점을 보고 혼인 신고까지 감행한 거예요?”
이연은 벽난로처럼 이글거리는 남자의 눈을 빤히 쳐다보다가 저도 모르게 툭 내뱉었다.
“……얼굴?”
그러자 권채우가 헛숨을 터트리며 눈썹을 까딱였다.
“학력, 능력, 성격, 집안, 다 미달인 남자를 선택한 이유가 고작 그거라고요?”
“고작이 아니에요.”
이연이 눈에 힘을 주었다.
“가끔은요, 그게 전부처럼 느껴질 때도 있어요.”
권채우는 그 말이 황당하기도 하고, 걱정스럽기도 하여 오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질척한 미소가 새어 나오려는 것을 멈추지 못했다.
“특기나 취미 같은 건 내가 쓸 수 있겠어요.”
“뭔데요?”
그녀가 궁금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자 권채우는 고개를 비딱하게 기울였다.
“특기는 아내 괴롭히는 사람 쥐어패기, 취미는 아내 뒤꽁무니 쫓아다니기. 좋아하는 건 소이연, 싫어하는 건 가끔 나무, 잘하는 건 일편단심 좆 세우기, 못하는 건 열 번에서 다섯 번으로 줄이는 매너―”
“잠깐, 잠깐만요!”
이연은 꼬리에 꼬리를 물듯 술술 이어 가는 남자의 말을 냉큼 잘랐다. 그녀는 조금 사색이 되었다.
“설마 진짜 그렇게 쓸 건 아니죠?”
“내 말이 거짓말 같아요?”
“……아니요, 아니니까 더 문제죠!”
이연은 뭉근하게 붉은 기가 도는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 앙증맞은 표독스러움에 권채우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와락 웃음을 터트렸다. 그가 커다란 손을 뻗어 이연의 부푼 뺨을 붙들어 당겼다. 코로 깊이 그녀를 들이마시며 입술을 집어삼켰다.
“읏……!”
짤막한 접촉에도 추락하듯 몸이 뚝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빨아 당기고, 윗입술을 살짝 깨물고, 서로의 호흡을 훔쳐 갔다. 콧방울을 비비며 가볍게 입술 표면을 문지르다가도 어느새 정신없이 물고 빠는데 혈안이 되어 갔다.
살짝 눌린 콧대에서 억눌린 신음이 샜다. 감로수를 마시듯 턱이 벌어졌다 다시 닫히기를 여러 번. 치아 안쪽에서만 애타게 노닐던 뜨끈뜨끈한 혀가 단번에 꼿꼿해져 밀고 들어왔다. 순식간에 키스가 깊어졌다.
그 순간, 펑―! 하고 천장에서 전구가 터졌다. 화들짝 놀란 이연이 천장을 힐끔대며 좀처럼 집중하지 못하자 그가 얼굴을 구기며 입술을 뗐다.
“이연 씨가 좋아하는 얼굴은 여기 있는데 한눈팔 새도 있어요?”
권채우의 험악한 표정에 이연은 변명처럼 천장을 가리켰다.
“저, 저거 LED인데 왜 갑자기…….”
“지금 그게 중요해요?”
재차 눈살을 찌푸린 그가 막무가내로 입술을 덮쳐 왔다. 이연은 불도저 같은 힘에 밀려 그대로 소파에 드러눕게 되었고, 그 바람에 금방이라도 파스슷 떨어질 듯 금이 간 전구가 선명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아슬아슬한데……!’
그녀가 전보다 더 시선을 떼지 못하자 결국 한숨을 내쉰 남자가 두 손을 들었다.
“……조금 있다가 두고 봐요.”
잠시 후, 딩동― 초인종을 누르고 남색의 야구 모자와 조끼를 입은 A/S 기사가 들어왔다.
장범희와 권채우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