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이 가스내야!”
제사상 앞에서 처연한 뒷모습을 보이던 추자가 돌연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마침 과일을 깎고 있었는지 그녀의 손에 들린 과도가 조명을 받아 반짝였다.
“이 거꾸로 수경 재배를 해도 시원찮을 가시내가!”
“악, 추자 씨!”
이연은 곧장 손바닥 두 개를 펼치고 거리를 벌렸다. 울적했던 마음은 어느새 연기처럼 사라진 후였다.
“테레비에서 사망자는 없다 카는데 우리 병원 원장은 도대체가 전화도 안 받고! 아무리 죽는 데엔 순서가 없다 캐도, 내는 니가 싹퉁머리 없게 새치기한 줄 알고 눈깔 돌아 삐는 줄 알았다!”
“죄송해요, 추자 씨. 사실 여기에는 말 못 할 사정이―”
“웃기지 마라! 내를 그냥 똥구멍으로 알았던 기지!”
“진짜로 경황이 없었어요!”
언뜻 추자의 눈에 물기가 고이는 것 같았지만 그건 착각이라 해도 좋을 찰나였다.
평소 주름 관리를 위해 안면 근육은 좀처럼 쓰질 않던 그녀가 콧잔등을 행주처럼 쥐어짜며 달려드는 것이다. 손에 무엇을 들었는지는 까맣게 잊어버린 것 같았다.
기겁한 이연이 방어하듯 두 팔을 치켜드는 순간, 권채우가 부드럽게 끼어들었다.
“장모님 대신 제가 가서 천만다행이었어요.”
어느새 추자의 등 뒤로 다가간 남자가 그녀의 손목을 붙들고 단호하게 과도를 빼앗았다.
“……우리 권 서방.”
추자의 귀신 같던 얼굴이 순식간에 흐물흐물 유해진다. 그 어느 때보다 믿음이 충만해진 그녀는 권채우를 숫제 임금님 용안 대하듯 올려다보았다.
“밥은 뭇나? 이연이 살려 준 은인이 왔는데 제삿밥밖에 없어서 우야노.”
“괜찮습니다.”
그림처럼 웃고 있던 권채우와 밀회하듯 시선이 스치자, 이연이 먼저 고개를 돌렸다. 부싯돌이 가슴에 와 부딪치는 것 같았다.
지금이야 저렇게 착실하고 듬직한 사위 같지만, 그가 얼마나 그악스럽게 제 밑을 애무하고 박아 댔는지를 알면 누구든 혀를 내두를 것이다.
“추자 씨, 저는 그러면 뒷정리라도 하고 있을게요!”
이연은 붉어진 목덜미를 긁으며 쪼르르 부엌으로 도망쳤다. 그녀는 먼저 창문을 열어 자욱하게 낀 기름 냄새를 환기했다. 그리고 소매를 걷어붙이고 싱크대에 담가 둔 프라이팬을 씻으려 하는데 차분한 중저음이 목덜미 위에 내려앉았다.
“이연 씨.”
저 목소리가 얼마나 거칠게 들썩였는지를 기억한다. 그녀의 심장이 가늘게 떨렸다.
“삼촌분은 이연 씨한테 중요한 사람이에요?”
“아…….”
이연은 수세미를 잠시 내려놓고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물을 바라보았다.
“삼촌이 아니었으면 정말로 갈 데가 없었거든요. 삼촌은 늦은 나이에 막 가정을 꾸린 참이었는데도 흔쾌히 날 받아 줬어요. 추자 씨는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예쁘고 정이 많으셨구요.”
그가 말없이 이연의 허리를 껴안아 왔다. 편안한 온기가 등에서부터 진동하듯 퍼졌다.
“그 작은 시골에서 많은 걸 느끼면서 회복했어요.”
권채우는 그녀의 가냘픈 등을 지붕처럼 푹 덮고 정수리에 턱까지 갖다 대었다. 이연은 덮쳐 오는 무게에 한순간 휘청댔지만 그녀를 단단히 잡아 주는 골격 안으로 완벽하게 끌려갔다. 숨 막히는 안락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잘 보여야 할 사람이라는 거네요.”
“이미 돌아가셨는데요?”
“그런 건 아무 상관없어요. 나는 이연 씨 남편으로서 익혀 두려고 하는 거니까.”
“뭘요?”
이연은 다시 설거지를 시작했으나 권채우는 좀처럼 떨어질 기미가 없었다.
“살생부요.”
“……!”
프라이팬을 닦던 손이 그대로 미끄러졌다. 죽일지 살릴지 적어 둔다는 그거……요?
“이 경우는 제가 감사해야 할 쪽이네요.”
나른한 하품에 잠긴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렸다. 이연은 기가 막혀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벙찐 얼굴만 바라보았다. 정말 이 남자와 엮인 이후로 감정의 온갖 굴곡을 다 겪고 있다. 이런 황당함까지도.
“채우 씨, 저기, 나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에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늘어져 있던 몸을 곧추세운 그가 사뭇 날카롭게 반응했다. 그 은근한 서슬에 이연은 어깨를 바짝 굳혔다.
“채우 씨가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어요.”
“이게 왜 무리인지 모르겠어요.”
“어…….”
“이연 씨가 보기엔 내 행동이 과해 보여요?”
과하지, 너는 처음부터 전부 과했어요. 하지만 이연은 고개를 저었다. 그 행동에 숨은 이면을 이제는 조금 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애초에 그런 사람을 세뇌시킨 자신의 책임도 있었다.
“그것보다는, 걱정이 되니깐 그렇죠.”
그가 웬일로 조용하자 이연은 보다 솔직해지기로 했다.
“부모님이 같은 날에 사고로 돌아가셨어요. 그게 사고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요.”
“…….”
권채우는 숨을 죽이고 이연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마음 같아선 몸을 돌려세우고 싶었지만, 급하게 굴었다간 들어야 할 말도 듣지 못할 것 같아 그저 딱딱하게 멈춰 서 있기만 했다. 이연을 강하게 껴안고 있던 팔조차 일순 느슨하게 풀었을 정도로 조심스러웠다. 그럼에도 유리창에 어룽어룽 비친 이연을 단 한 시도 놓치지 않았다.
“나는 근본이 없어요. 늘 없다고 생각하고 살았거든요.”
“…….”
“그치만 이제 좀 생기려고 하는데―”
이연이 불시에 몸을 돌려 권채우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채우 씨가 다치면 말짱 도루묵이에요. 그러니까 제발 몸 좀 사려요.”
그녀의 타오르는 눈빛에 남자는 순간 흉곽이 조여들어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설명할 수 없는 전율에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서고 눈앞이 다 화끈거렸다. 동시에 딱딱한 껍질 아래 그녀가 평생을 부정해온 속내가 어렴풋이 읽히는 것도 같았다.
“이연 씨.”
그가 항복하듯 이연을 껴안으며 그녀의 어깨에 턱을 끼웠다.
“……알겠어요, 그렇게 할게요. 그런데―”
권채우는 목울대에서 끓는 듯한 소리를 내더니 눈을 내리감았다.
“부모가 한날한시에 죽었다고 해서 이연 씨까지 그럴 필요는 없어요.”
“……!”
돌연 이연은 뒤통수를 거하게 맞은 듯 멍하니 굳어 버렸다. 누군가가 쫓아오듯 입이 마르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러나 생각이 산산이 흩어지는 와중에도 권채우의 목소리는 들불처럼 빠르게 번졌다. 어둑하게 쌓여 있던 덤불을 순식간에 재로 날려 버리는 것이다.
“우리한테는 그게 정답이 아니니까.”
권채우가 그녀의 뒤통수를 느릿하게 쓰다듬었다.
“가장 아팠다고, 그게 가장 대단한 일이 되는 것도 아닌데. 그딴 거 부러워하지 마요.”
“……!”
이연은 이상하게 코끝이 찡해서 고개를 푹 수그렸다.
그녀가 내내 증오했으며 동시에 갈구해 온 그것.
‘위험하든 급한 상황이든, 그런 거 상관없이 날 떼어 놓지 말라고 하면, 세상 물정 모르는 여자 같아요? 그래도…… 그게 어디든 날 데려가 달라고 하면, 그래 줄 수 있어요?’
한편 권채우는 음습한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고 있었다. 호시탐탐 그녀의 전부를 노리고 있는 남자에게 저런 비틀린 결핍이 얼마나 먹음직스러워 보이는지.
외톨이 소이연이 앞으로도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을 생각을 하자 아래가 뻐근히 당겨왔다. 그러니 더더욱 빛 속에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죽은 부모 따위는 얼씬도 못하게. 그녀를 쥐고 흔들 수 있는 건 오로지 그 자신뿐이어야 했으므로.
“진짜로 대단한 건 이연 씨 하나예요.”
그는 이연을 으스러지게 안으며 재차 속삭였다. 내 눈에는 소이연이 제일 예쁘고 위대해요. 나무도 살리고 나도 거둬 준 소이연이 세상에서 제일 야하고 훌륭해요.
하나하나 우스운 말들뿐이었지만 이연은 눈물이 찔끔 났다. 더는 파고들 틈이 없음에도 권채우의 품을 들이박듯이 안았다. 그러자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탐스러운 열매처럼 떨어졌다.
“눈 밑은 꺼먼데 피부는 반들반들 윤기가 난대이.”
추자는 제사상 앞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이연을 빤히 보며 말했다.
“네?”
그녀가 괜스레 제 얼굴 한쪽을 쓸어내리자 추자의 눈이 옳다구나 하며 얇아졌다.
“여자가 된 기지.”
“……!”
추자의 입가에 슬쩍 음흉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연은 붉어진 얼굴로 입만 벙긋거리다 머쓱하게 시선을 피했다. 조용히 낄낄 웃던 추자는 이내 이연의 손등을 토닥여 주었다. 장난스럽던 그녀의 얼굴이 어느새 자애롭게 펴져 있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추자 씨의 마음이 느껴졌다.
‘점마 잘하드나?’
‘추자 씨!’
‘인자는 니도 나무만 접붙이는 게 아이고 밤마다 몽딩이로―’
‘그만요!’
그렇게 눈이 마주쳤던 두 사람은 각자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추자는 웃음을 참기 위함이었고, 이연은 뜨거운 콧김이 어지럽게 새어 나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윽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 잔을 바라보던 추자가 서서히 얼굴을 굳히며 운을 띄웠다.
“……여적지 사무치는 건, 집에서 편히 가고 싶다던 사람을 내가 어거지로 입원 시켜가 병원에서 죽게 한 거. 꽃 좋아하고 즈그 집 처마가 그렇게나 예쁘다고 하던 양반을, 내 욕심 때문에 집에도 못 가게 한 거. 그기 내 천추의 한이다.”
간암 말기였던 삼촌은 병마와 싸우면서도 매일 밤 추자에게 시를 읊어 주던 낭만적인 사람이었다. 매번 다른 시구를 빌려 사랑을 고백했던 삼촌이었지만 막상 죽는 그 순간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연아, 근데 그 사람은 잘 지내는지 모리겠네.”
“……누구요?”
“네 삼촌 병원비 대 준 사람 말이다.”
“아……!”
별안간 이연은 서랍 맨 밑바닥에 간직하고 있던 클래식 CD를 떠올렸다.
“참말 그 사람 아니었으면 눈앞이 깜깜했을 텐데……. 아들은 잘 만났는지 모리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