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9화 (70/158)

#69.

―밤새 걱정하느라 뒈지는 줄 알았다!

수화기 너머가 쩌렁쩌렁 울리는 통에 이연은 핸드폰을 멀찍이 떨어뜨렸다 붙여야 했다. 훌쩍거리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지만 굳이 내색하진 않았다. 끝없이 이어지던 호된 잔소리는 추자가 팽, 하고 코를 푼 다음에야 비로소 끝이 났다.

―그래도 권 서방이 너 잔다고, 상처 몇 개 빼고는 다친 데 없다고 연락 왔다.

“아…….”

―걱정 마시라고 을매나 자분자분 여염하게도 말하던지.

순간 추자의 목소리가 내숭 부리듯 나긋해지는가 싶더니 다시 사납게 변했다.

―어떤 무정한 가스나는 손가락이 뿌라졌는지 전화 한 통도 없는데!

해가 중천에 뜬 것을 보고 기겁하여 일어난 게 고작 몇 분 전이다. 부재중 전화 수십 통이 쌓여 있는 핸드폰보다도 텅 빈 옆자리가 무서워 그녀는 가만히 얼어붙어 있었다. 때마침 병실로 들어온 권채우가 아니었다면 얼마나 더 그러고 있었을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이연은 그가 제 시야에 무사히 들어온 것을 확인한 후에야 딱딱해진 어깨를 풀었다. 그제야 지잉지잉 울리는 핸드폰 소리가 귀에 들어왔고 그것을 받을 겨를도 생겨났다. 이연은 권채우가 들고 온 웬 쇼핑백을 힐끔대며 말했다.

“금방 갈게요. 오늘이 제삿날이잖아요.”

―하이고, 하마터먼 네 제삿날이 될 수도 있었는데 마 됐다! 내는 신경 쓰지 마라.

“아니에요, 금방 갈게요. 혼자 하지 말고 집으로 오세요.”

이연은 얼른 통화를 마무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움직일 때마다 다리 사이가 쓰라렸지만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었다.

“……어디 갔다 온 거예요?”

“이연 씨 그 꼴로는 밖에 못 나가니까.”

그가 눈썹을 까딱이며 이연의 환자복을 무심코 훑었다. 기껏해야 짧은 눈짓 하나가 속옷도 대지 않은 살덩이를 강하게 만지고 가는 것 같았다.

남자는 연한 살구색의 부들부들한 브래지어와 팬티를 건네주었고, 이연은 그것을 잽싸게 낚아채 등 뒤로 감추었다.

“돈이 어디서 나서요?”

그 말에 권채우는 헛웃음을 삼키듯 슬쩍 표정을 구겼다.

“지나가는 길에 우리 집 주치의란 사람이 보여서 그쪽에 청구했어요. 병원 지하 1층에 생필품부터 해서 없는 게 없던데요.”

“그래도…… 채우 씨는 아직 환잔데. 차라리 나를 깨우지 그랬어요.”

그러자 눈 깜짝할 새 코앞까지 다가온 남자가 이연의 허리를 힘껏 껴안았다.

“어디 가서 그런 순진한 소리 말아요.”

“……!”

뜨거운 입김이 목덜미에 닿는 순간, 어제저녁 내내 시달렸던 다리 사이가 박동하듯 욱신거렸다. 권채우의 체향, 입김, 목소리, 강한 악력 등에 반사적으로 반응하는 제 몸이 숫제 당황스러울 지경이다.

“이렇게 조금만 닿아도 짓눌리는 유두 모양이 눈앞에 선한데. 내가 밤새 물고 빤 젖꼭지를 다른 새끼들이 눈치채고 쳐다보는 걸 무슨 수로 견뎌요”

이연은 눈가가 뜨뜻하게 달아오르자 그냥 널찍한 품에 얼굴을 감춰 버렸다.

“위아래 속옷도 안 입은 이연 씨를 혼자 내보내는 일은 앞으로도 절대 없을 거예요. 대가리에 총 맞은 게 아니고서야, 대체 어떤 남편이 그런 간 떨어지는 짓을 해요.”

그는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이연의 허리를 슬슬 쓰다듬었다.

“채, 채우 씨는 조금 더 누워 있는 게 좋겠어요.”

“같이 누워 주면요.”

입 안이 마르는 통에 잽싸게 화제를 돌려보았지만 별다른 소용은 없었다. 가녀린 목덜미에 얼굴을 내리고 강아지 꼬리 흔들듯 비비적대는 남자 때문에 오히려 더 열만 오르는 것이다.

“……저, 저는 집에 들렀다가 저녁에 다시 올게요.”

“그건 싫은데.”

불현듯 허리를 조이는 힘이 강해진다. 그에 이연이 머뭇거리다가 그의 등을 토닥였다.

“채우 씨는 강철이 아니에요. 살아 있는 사람이란 말이에요. 지금이야 젊다지만 나이 들어 골병 들어요. 회복기가 지겨울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이 시기를 무시하진 말아 줘요.”

“…….”

“그리고 다친 사람이, 그 밤에……, ……까지 했으니.”

“뭘 해요?”

권채우는 설교를 하느라 자그마하게 핏대가 올라온 이연의 목에 밭은 입맞춤을 남겼다.

“…부었는데 계속 했잖아요.”

웅얼거리는 목소리에 작은 원망이 서린다.

“그건 내 어깨가 부었다는 말이에요, 아니면 이연 씨 구멍이―”

“둘 다요!”

그녀가 남자의 등짝을 한 대 퍽 때렸다.

권채우는 방울처럼 터지는 웃음을 참기가 힘들었다. 

이 여자의 모든 것이 다 좋았다. 식물인간을 버리지 못한 책임감도, 놀려 먹기 좋은 순진함도, 어설픈 섹스도, 전부 다 사랑스러워 품 안에서 절대로 놓고 싶지가 않았다. 권채우가 잃은 기억이 무엇이든 그 과거가 하나도 아깝지 않을 정도였다. 자신이 더 큰 것을 얻었다고 확신했다.

“누구 한쪽이 부었다고 좆을 그냥 빼 버리는 건 머저리 같은데요.”

“……채우 씨, 세상에는 매너라는 단어가 있어요.”

별안간 그가 빈틈없이 밀착하고 있던 몸을 떼고 이연을 내려다보았다.

“매너보다 매일 하는 게 더 중요해요, 나한텐.”

당황한 그녀가 눈만 깜빡이고 있자 권채우는 상체를 숙여 눈높이를 맞춰 왔다.

“이연 씨는 싫었어요?”

한낮의 햇빛을 받아 더 연해 보이는 홍채가 영롱하게 빛났다. 이연은 잠시 하려던 말도 잊고 꽃가루처럼 퍼져 있는 호박색 동공을 정신없이 바라보았다.

“……싫, 진 않았지만 하고 나면 아파요.”

“그건 내가 아다같이 굴어서 그래요?”

돌연 권채우의 미간에 주름이 잔뜩 잡혔다.

“비교하고 싶진 않은데……, 나 많이 형편없어졌어요?”

“…….”

이연은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했고, 그는 짐짓 불안한 얼굴이 되었다.

“안 그래도 아는 게 없어서, 내가 요령도 없이 너무 개새끼처럼 박아 대기만 했죠. 이연 씨가 원한다면 매너, 그거부터 배울게요. 열 번 박을 거 다섯 번 박고, 다섯 번 할 거 세 번으로 줄이면, 하…. 괜찮아져요?”

남자는 꼭 욕설이라도 내뱉는 듯한 얼굴로 눈을 질끈 감았다.

“그게 아니에요!”

이연이 얼굴을 붉히며 외쳤다.

“그게 아니라, 채우 씨 때문이 아니라……!”

“아니라?”

“그냥……, 그게 너무 크니까 나는 좀 살살 했으면 해서…….”

“역시, 나가지 마요.”

방금 전까지 초조하게 굴었던 권채우가 돌연 시선을 꽂아 넣고 입맛을 다신다.

“그게 안 되면 나도 퇴원할게요.”

* * *

결국 VIP실을 고작 하룻밤 모텔처럼 사용하고 나온 두 사람은 집으로 향했다.

오늘은 추자의 세 번째 남편, 즉 이연의 먼 친척이었던 삼촌의 기일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추자의 남편들 중, 그녀가 유일하게 챙기는 제사상이기도 했다. 벌써부터 대문 밖으로 전 부치는 냄새가 솔솔 풍겨오는 게 양심도 없이 군침부터 돌았다.

집 앞에 도착하고 보니 일렬로 쭉 놓인 돌멩이들이 개미 떼처럼 발밑을 스쳤다. 이연은 개중 톱사슴벌레와 물방개가 그려진 귀여운 돌멩이들을 주머니 속에 챙겨 넣었다. 남들에겐 그저 우연처럼 보일지 모를 이 장난스러운 나열도 이연의 눈에는 짙은 걱정으로 비쳤다. 

그게 규백이 나름의 표현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작은 아이도 이렇게나 제 마음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데…….

“진짜 이건 아니에요.”

이연은 자신을 뒤따라온 커다란 덩치를 탐탁지 않게 쏘아보았다.

“채우 씨는 더 쉬어야 한다고요, 무리하면 진짜 큰일 난단 말이에요!”

그녀는 권채우의 깨진 이마를 연신 힐끔거리며 입술을 축였다. 누구는 별것 아닌 부상이라 말하겠지만, 갑작스러운 균열을 몸소 경험한 이연으로선 그 상처가 마치 손상된 전깃줄처럼 느껴졌다.

찰나간의 만남은 정말 생각지도 못한 한 방이어서.

이연은 두려움을 폭탄 조끼처럼 입고 있었다. 그녀를 죽이려 했던 남자가 돌아올지 모른다. 

그 막연했던 예감이 실체를 드러냈던 순간. 이연의 모래시계는 더욱더 가파르게 쏟아졌다.

“이연 씨도 나한테 그랬잖아요. 어디든 데려가 달라고. 나도 그런 마음이에요.”

“그거랑―”

“이거랑 다르다는 소리는 하지도 말고요.”

“……그치만 채우 씨는 내 말을 단번에 깠잖아요!”

이연이 숨을 씨근덕거리자 그가 퍽 단호하게 일축했다.

“나는 살려고 그랬어요.”

별안간 색색 불만스럽게 새어 나왔던 숨이 뚝 그쳤다.

“안 그러면 내가 죽을 것 같으니까. 이연 씨를 우선한다는 건 나한테 그런 의미예요.”

그가 어쩐지 피로한 듯 인상을 쓰며 이연의 손을 강하게 붙잡아 왔다.

“그냥 매 순간, 본능적으로 당신을 구하고, 당신을 좇아요. 그게 지금처럼 이기적으로 보일 때도 있겠지만, 이미 내 세상의 기준이 이연 씨인 걸 어떡해요. 가엾게 여겨 줄 순 없어요?”

“…….”

하지만 그녀가 미동도 하지 않자 시원스레 뻗은 권채우의 어깨가 축 내려간다.

“역시 내가 어설프게 좆질하는 아다여서―”

“집에 들어가면 무, 무조건 누워만 있기예요!”

손에서 시작된 불이 금세 심장까지 옮겨붙었다. 그 뜨거움에 놀란 이연이 후다닥 대문을 열고 먼저 뛰다시피 걸어갔다.

이따금씩 따끔거리는 얼굴의 생채기만 아니라면 어제의 일은 꿈인 양 현실감이 없었다. 지역 뉴스에선 화이도의 산사태 소식이 하루 종일 들려오고, 구조 작업에 투입될 군인들을 태운 지프차는 연신 도로를 가로질렀다. 그런 소란한 상황 속에서도 이연의 감정이 기복 없이 잔잔할 수 있는 건―

“이연 씨, 같이 가요.”

완벽하게 되찾은 일상 때문일 것이다.

집 안으로 들어오자 조촐하지만 다정한 제사상이 눈에 들어왔다. 추자는 전통에 얽매이기보다 추억으로 상을 한가득 메우고 있었다.

삼촌이 좋아했던 밍밍한 커피, 솜씨 나쁜 추자가 다 태워 먹었던 김치전, 설익은 밥, 낡은 시집. 그리고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삼촌이 끝까지 놓지 않았던, 이제는 나이 들어 버린 한 여인의 미소까지.

“추자 씨, 저 왔어요.”

매년 돌아오는 기일이었지만 이연은 항상 추자의 표정이 묘하다고 생각했다. 짧은 날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여자의 얼굴은, 도대체가 사랑이 뭔지 이연을 혼란스럽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러나 처음으로, 이연은―

추자의 그런 얼굴에서 제 미래가 엿보이는 듯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