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소름이 정수리까지 쭉 오싹하게 내달렸다.
이연은 애써 조심히 들고 있던 어항이 부지불식간에 깨져버린 충격에 속으로 비명을 삼켜야 했다.
“안 돼요, 안 돼…….”
극도의 스트레스로 그녀가 현실을 부정하고 있는 사이, 권채우는 현기증이 난 건지 이마를 꾹 누르고 있었다.
“씨발 무슨―”
동공이 위로 빨려 들어가듯 보이지 않다가 다시 제자리를 찾는 게 마치 정신을 잃으려는 신호 같았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눈썹에 힘을 주며 고개를 털어 댔으나 그럴수록 몸은 무겁게 늘어졌다.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말고 한숨 자고 일어나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러는 게 좋겠어요. 지금 권채우 씨, 정상이 아니에요. 정말로, 이, 이건 아니에요. 진짜 이거는……. 이럴 순 없거든요. 아직은, 이렇게는…….”
손톱을 물어뜯자 텁텁한 흙 맛이 혀끝에 번진다. 권채우는 잿빛이 된 안색으로 하염없이 중얼거리는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너…….”
흐릿했던 안광에 이채가 고일 무렵, 자그마한 여자의 손이 그의 시야를 가렸다. 우스울 정도로 간지러운 손바닥이었지만 불현듯 차단기가 확 내려가는 감각에 몸에서 힘이 빠졌다. 어떻게든 눈을 더 떠 보려 했던 권채우는 애초에 몽롱하니 반밖에 없던 의식이 다시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그가 저항하기도 전에 무릎이 먼저 풀렸다. 이연은 무너지는 남자를 얼떨결에 품에 안고 이때다 싶어 그의 머리를 콩콩 두들겼다.
“……우, 우리 이렇게 말고 다시 만나요. 내 남편으로 돌아오는 거예요.”
궁지에 몰려 한껏 오그라든 동공이 좌우로 잘게 흔들렸다.
* * *
구조대가 온 다음부터 상황은 일사천리로 정리되었다.
헬기의 프로펠러 소리가 어렴풋이 들리고, 시커먼 토사를 가르고 진입하는 구조 대원들의 주황색 옷이 눈에 띈다. 그러나 이연은 아무런 감흥도 들지 않았다. 들것에 옮겨져 평평한 산 아래에 무사히 도착했을 때에도 멍하니 넋만 빼놓고 있었다.
2차 토너먼트는 예기치 못한 산사태로 잠정 중단이 되었고 다행히 사상자는 없었다. 산림청 공무원들이 사색이 된 얼굴로 현장을 바쁘게 뛰어다닐 동안, 이연은 앰뷸런스에 막 실려 들어간 권채우를 망연자실하게 쳐다볼 뿐이었다.
“보호자 분, 안 타실 거예요?”
구조대원이 앰뷸런스의 뒷문을 붙잡고 이연에게 물었다. 그러나 이상하게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머리끝까지 갯벌에 고꾸라졌다 나온 몰골로 망부석처럼 서 있으니, 구조대원이 문짝을 놓고 한 발짝 다가왔다.
“보호자 분? 괜찮으세요?”
“…….”
대체 뭐가 잘못된 거지?
‘묻잖아. 너, 누구냐고.’
그 거칠거칠했던 목소리가 뇌리에 깊은 자상을 남겼다. 초면인 듯 낯선 말이 몇 번이고 반복될 때마다 이연은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고 손끝이 떨렸다.
이젠 어떻게 되는 거지? 나는 어떻게 해야…….
차갑고 비릿한 시선은 삽시간에 이연을 절벽 끝으로 툭 밀어 떨어뜨렸다. 죽은 쥐를 보는 듯했던 무심함에 한번 얻어맞고 나니 그를 따라 앰뷸런스에 타는 게 무서워졌다.
맹목적인 애정에 너무 잠겨 있었던 탓일까, 찬물을 뒤집어쓴 기분이 서럽고 얼떨했다.
“―세요? 보호자분!”
“아, 네!”
퍼뜩 정신을 차린 그녀는 구급대원의 의심쩍은 눈을 피해 후다닥 차에 올라탔다.
현재 권채우의 보호자는 저였다.
아직 무엇 하나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지만, 이연은 아직 권채우를 만나지 못했다. 좁은 굴 안에서 그토록 갈구했던 그 남자를,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권채우 씨……. 제발 돌아와 줘요.”
앰뷸런스의 문이 닫혔다.
* * *
“별다른 문제는 없습니다. 상처도 잘 꿰맸고 의식은 곧 돌아올 겁니다.”
“……감사합니다.”
주치의가 고개를 까딱 숙이고 나가자 이연이 털썩 주저앉았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응급 베드에 권채우를 옮긴 의사는 가장 먼저 영안실로 향했다. 의사이지만 식물인간의 간병인이기도 했던 그는 권채우를 호스로 깨끗이 씻어 내는 일부터 했다.
그가 치료를 받는 동안, 마찬가지로 이연도 VIP실에서 샤워를 마쳤다. 축축 늘어졌던 진흙 덩어리 옷은 버리고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나오니, 어느새 눈앞에 권채우가 그림처럼 누워 있었다.
“…….”
괜히 가까이 갔다가 예전처럼 침대에 눌리기라도 하면 어떡해?
이연은 침대에서 멀찍이 떨어진 소파에 앉아 젖은 머리만 수건으로 꾹꾹 쥐어짰다. 그럼에도 연신 힐끗힐끗 그를 향하는 시선은 멈출 수가 없었다.
새카만 토사가 온 얼굴에 치덕치덕 발려 있어 알아볼 수도 없었던 때와 달리, 지금은 이목구비 하나하나가 이연이 알던 그 권채우여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가, 다시 멀어졌다가, 그렇게 병실 안을 서성거리기를 몇 시간.
별안간 뒤척이는 몸짓에 얇은 이불이 사르륵 소리를 냈다.
“……!”
흠칫, 이연은 그 즉시 굳고 말았다. 고요히 닫혀 있던 남자의 눈꺼풀 아래로 눈동자가 움직인다. 이곳은 병실일 텐데 왜인지 허리까지 늪이 차오르는 것만 같다. 그만큼 숲속에서와 똑같은 반응이었다.
이연은 고르지 못한 호흡으로도 숨을 죽였다.
그리고 권채우가 눈을 뜨는 순간—.
“…….”
“…….”
눈꺼풀을 정확히 두 번 깜빡이고 명징해진 남자는 침대 끝자락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 이연을 곧장 찾아냈다.
그녀는 침대 프레임을 꽉 붙든 손에 힘을 주었고, 남자는 그런 그녀를 말없이 응시해 왔다. 천천히 움직이는 시선은 가장 먼저 이연의 상체와 하체를 확인했고, 다시 이연의 얼굴로 돌아와 자잘하게 난 생채기들을 훑었다.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숨 막히는 정적이었다.
“이리 와요.”
이윽고 침묵을 깨부순 이는 낮게 잠긴 음성으로 요구부터 하는 권채우였다. 하지만 이연은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오히려 그를 경계하듯 쳐다보자 그 눈빛 어딘가가 심상치 않았는지 권채우가 미간을 좁혔다.
“왜 그렇게 멀리 서 있어요? 모르는 사람처럼.”
“…….”
두 다리는 여전히 고집스럽게 뿌리 내려 있었다.
“이연 씨.”
그러나 보채듯 부드럽게 부르는 제 이름을 듣는 순간 왈칵 눈물이 났다. 그녀가 무너지듯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러자 안면을 딱딱하게 굳힌 권채우가 다급히 침대 밖으로 몸을 일으켰다. 절로 얼굴이 찌푸려졌지만 아픈 티는 찰나였다. 능숙하게 표정을 정리한 남자는 맨발로 이연에게 다가갔다.
“이연 씨.”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 다정한 부름 하나가 얼마나 간절했던지.
“진짜……. 진짜 맞죠? 권채우 씨. 내, 내 남편 맞죠?”
이연은 힘없이 두 손을 내리고 권채우의 눈에 고인 애정을 허겁지겁 받아 마셨다. 흘러내리면 다시 차오르고, 또 차오르는 눈물 때문에 시야가 뿌예졌지만 시선은 결코 떨어지지 않았다.
“멧돼지도 잘 잡고, 사람도 잘 때리고, 칼도 잘 쓰는 그 사람 맞죠?”
권채우의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지만 이연은 정신이 없었다.
“도, 도시락도 잘 싸고, 꽃꽂이도 잘하고, 나랑 같이 꽃물 빨아먹었던 그 사람 맞는 거죠?”
“내가 이연 씨 남편이 아니면 누군데요?”
미간을 구기고 이연의 의심을 단호하게 일축하는 그의 목소리가 은근히 날카롭다.
“이연 씨는 나 말고 다른 놈이랑 꽃 빨아 본 적 있어요?”
“……네? 아, 아니요?”
“그런데 왜 사람 속 뒤집어지게 만났던 남자를 구별이라도 하는 것처럼 굴까.”
오롯이 이연만 담고 있는 눈동자에 질척한 질투가 스몄다.
“그치만…….”
아까는 나를 모르는 사람처럼 봤단 말이에요……. 그러나 그 사실을 입 밖에 내고 싶지가 않아서, 이연은 쓴 물을 삼키듯 목구멍 뒤로 꿀떡 넘겨 버렸다.
“권채우 씨가 사라졌을까 봐, 내가 얼마나 마음 졸였는데요.”
이연은 팔을 들어 엉망으로 눈가를 문질러 닦았다.
권채우가 억지로 그녀를 굴속에 밀어 넣고 휩쓸려 가던 순간이나, 비몽사몽간에 뜬 눈으로 또 다른 권채우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던 순간. 어느 쪽이든 이연이 감당하기엔 버겁기만 한 일이었다.
살인마 권채우는 더 이상 ‘진짜’가 아니었다. 이연의 팔을 아프지 않게 붙잡아 내리고 붉어진 눈가를 살살 닦아 주는 눈앞의 이 권채우야 말로 ‘진짜’가 됐는데.
“잃어버릴까 봐, 정말 깜짝 놀랐단 말이에요. 정말…… 이렇게 다 끝나는 줄 알았어요.”
그녀는 권채우의 소매를 붙잡고 늘어졌다.
“위험하든 급한 상황이든, 그런 거 상관없이 날 떼어 놓지 말라고 하면, 세상 물정 모르는 여자 같아요? 그래도…… 그게 어디든 날 데려가 달라고 하면, 그래 줄 수 있어요?”
“…….”
그가 설핏 한쪽 눈매를 일그러뜨렸다. 그녀를 이토록 불안하게 만든 게 꼭 제 탓 같아서. 덥석 이연을 품에 안고 보았다. 추위를 타는 듯 발발 떠는 몸이 애처롭다. 남자는 콧날을 거칠게 찡그리며 제 온기를 전부 전해 줄 요량으로 그녀를 더욱 깊숙이 끌어당겼다.
“이연 씨.”
“대답해요. 데려가 줄 거예요?”
“같은 일이 벌어져도 나는 똑같이 행동해요.”
“……!”
이연이 몸을 바르작거리자 그가 힘으로 눌렀다. 그녀의 뒤통수를 제 가슴 쪽으로 꽉 붙이고 부탁하듯 읊조렸다.
“미안해요. 내가 유일하게 살리고 싶은 사람이 이연 씨라.”
“흐…….”
이연이 숨을 씩씩거리자 별안간 따뜻한 손길이 그녀의 등을 자분자분 토닥여 왔다.
“그래서 그런 부탁은 못 들어줘요.”
“……권채우. 채우 씨.”
이연이 울먹이며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럼 옷 벗고 나 안아 줘요.”
순간, 등을 토닥이던 그의 손길이 우뚝 멈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