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안 돼요.”
조급한 마음에 머리를 거치지 않은 말이 바로 나왔다.
그때 현관문이 열리고 깔끔한 차림새의 권채우가 곧장 이연을 찾아 시선을 고정했다.
나쁜 짓을 하다 들킨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심장이 울린다. 그녀가 괜스레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사이, 남자는 이쪽으로 유유히 걸어왔다.
한편 주동미의 얼굴에는 드디어 먹잇감을 발견했다는 듯 화색이 돌았다.
“안녕하심까! 그쪽한테 용건이 있어 왔습니다.”
그녀의 눈동자에 강렬한 욕심과 알 수 없는 피로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권채우는 무표정하게 힐끗 시선을 던지기만 할 뿐, 별다른 말은 돌려주지 않았다. 그 노골적인 무시에 오히려 민망해진 건 이연이었다.
이연이 손바닥을 쥐었다 펴며 입을 달싹이는 순간, 남자의 체향이 훅 가까워졌다.
“몸도 불편한데 왜 나와 있어요.”
그는 집에서 챙겨 나온 카디건을 이연에게 둘러 주고, 거칠거칠하고 뜨거운 손바닥으로 그녀의 목덜미를 은근슬쩍 쓰다듬었다. 그보다 더한 짓을 해 본 사람들만이 공유할 수 있는 살가운 스킨십. 그 사소하지만 짙은 접촉에 그녀는 허리를 바짝 세웠다.
“원장님, 어디 아프심까?”
“아니, 아니에요. 그보다 용건이란 게…….”
이연이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리자 주동미가 아차, 하며 명함을 건넸다.
“다시 소개하겠습니다. 저는 야생 동물 구조 센터 포유류 팀에서 근무하고 있는 주동미이고.”
그녀의 허기 진 시선이 권채우에게 콱 박혔다.
“스카우트하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예상치 못한 말에 이연의 눈이 동그래졌다. 은근슬쩍 팔꿈치로 권채우의 옆구리를 찌르자 그가 마지못해 명함을 받았다. 그러나 남자의 눈빛은 땅에 떨어진 낙엽을 보듯 무심할 따름이었다.
“저번 축하연 때 하려던 말이 그거였거든요. 그때는 안 듣고 계셨었지만.”
자신을 병풍 취급했던 그때가 떠올라 주동미는 턱 밑 어딘가를 긁적였다.
“저희랑 일해 볼 생각 없으십니까?”
주동미는 제 목소리에 눈곱만큼도 귀 기울이지 않는 남자를 보며 애가 닳았다.
그의 시선은 오로지 순하니 예쁘장하게 생긴 소이연 원장에게 한가득 쏠려 있었다. 속눈썹을 한 올 한 올 세기라도 할 작정인지, 미동도 하지 않고 뚫어져라 쳐다보는 게 자못 무서울 정도다.
순간 눈매를 좁힌 주동미는 그 묘한 먹이 사슬을 주시하며 과감하게 굴었다.
“그 체력, 순발력, 기지, 전부 탐이 납니다.”
정말로 보자마자 욕심이 났다. 물론 처음엔 사심이었지만, 엄한 남자한테 목매는 버릇은 없다.
그가 조그마한 여자한테 넋을 쏙 빼고 있다는 건 만날 때마다 증명이 됐으므로.
‘게다가 저건…….’
주동미는 쯧, 하고 남몰래 혀를 찼다.
살점을 뜯어내는 한이 있더라도 한번 문 건 절대로 놓지 않는 도사견이 속성이다. 몰두하고 있는 저 눈빛 좀 보라. 벌써부터 반질반질 살기가 도는 게, 잘못 건드렸다간 끝장이다.
현장 일을 하며 숱한 짐승들에게 물려 본 주동미로선 머리보다 본능이 앞섰다.
그래도―
스물넷에 센터에 취업하여 장장 팔 년째 막내인 자신의 자리를 꼭 저 남자에게 물려주고 싶었다.
산도 많고, 그래서 야생 동물도 많은 화이도는 결정적으로 인력이 턱없이 부족했기에. 화이도에 사는 남자. 아니, 정확히는 섬에 사는, 현재 일자리 없는, 힘 좋은, 젊은 남자……! 이것이 얼마나 귀한 인재인지!
어느 순간 센터 사람들은 제 후배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고, 그중 주동미가 가장 필사적이었다.
“물론 기본적인 교육을 받거나 자격증을 따야겠지만, 그런 건 제가 다 도와주겠슴다. 저번처럼 도끼나 말뚝만 들고 따라만 와도 좋슴다. 그냥 그 팔뚝만 갖고 오면 됩니다. 그러면 이 선배가 다 알아서 할 겁니다. 그러니까 그냥……”
체면 구겨지게 애걸이라도 하려던 찰나, 주동미의 눈에 이연이 잡혔다. 송아지처럼 유순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의 말에 집중해 주는 유일한 사람.
멈칫, 주동미의 혀가 굳었다.
두 사람의 수상한 기류를 곱씹어 보던 그녀는 이내 씨익 덧니를 보이며 웃었다.
“원장님은 남자가 어떨 때 제일 멋있습니까?”
“……저요?”
별안간의 지목에 놀란 이연이 손가락 끝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네, 요즘은 가정적인 남자가 대세이긴 하지만, 그게 백수는 아니지 말입니다.”
“그렇죠.”
이연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데 돈을 잘 벌어 와도 그게 불법적인 일이면 또 곤란하고요.”
이연이 한 번 더 격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기왕이면 좋은 일을, 사명감 있게 해내는 남자한텐 뭐든 다 주고 싶은 법 아니겠슴까?”
“오오…….”
이연이 무언가를 깨우쳤다는 듯 깊이 감탄하자 권채우의 표정이 일변했다. 오직 이연만을 담고 있던 시야를 깨부수고 드디어 주동미를 날카롭게 쳐다보았다. 단지 그뿐인 변화에도 주변 분위기가 살얼음처럼 딱딱해졌다.
‘내가 저걸 후배로 부릴 수나 있을까.’
잠시 그런 후회가 스쳤으나 주동미는 도발하듯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그게 사랑받는 남자의 기본 아니겠슴까. 밤에만 강한 남자는 한낱 구경거리지만, 낮에도 훌륭한 남자는 아내의 존경을 받는 법이지 말입니다.”
그러나 곧장 반응이 온 쪽은 기대했던 남자가 아니라 이연이었다.
“그런데 권채우 씨가요. 머리가, 아니, 몸이 많이 안 좋아서요.”
주동미는 그토록 듣고 싶었던 남자의 이름을 알게 됐지만 별다른 감흥은 들지 않았다.
“너무 뛰어다니거나, 무거운 걸 들거나, 위험한 일을 하면…….”
이연이 고개를 돌려 권채우의 눈치를 힐긋 보았다.
“몸 상태가 더 나빠질 것 같거든요.”
새 출발을 하려는 남자에게 다시 도끼니 뭐니 그런 걸 쥐게 해서는 안 된다. 물론 마약 밭에서 권채우의 기질을 더는 부정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지만, 그런 건 위급한 상황에서나 나와 줘야지 일상까지 홀라당 잡아먹히면 곤란했다.
“그리고 조직 생활에도 익숙하지 않을 거고……. 당분간은 제가 집에서 끼고 있어야 될 것 같은데, 죄송해서 어쩌죠.”
참을성이 없어서, 세상 극단적이어서, 남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아서, 일단 흉이 될 만한 말은 최대한 삼갔다.
그런데도 미간을 한껏 좁히고 있던 권채우는 그녀의 상냥한 방패막이에 더욱 얼굴을 굳혔다. 무언가 탐탁지 않다는 듯 팔짱까지 끼고서 고개를 기울인다.
팽팽하게 당겨진 팔뚝과 따가워진 시선이 그녀를 몰아세웠다. 이연은 공연히 제 한쪽 뺨을 쓸어내렸다.
“왜, 왜요?”
“잠깐 헷갈려서요. 이연 씨 치마폭에 싸이는 건 너무 좋은데―”
그녀가 입을 꾹 다문 채로 마른침을 삼켰다.
“나한테 아무런 기대도 안 하는 건, 솔직히 수틀려서.”
“그건……!”
불현듯 그가 이연의 뒤통수를 잡아당겼다. 정면에서 마주친 눈에서 불씨가 피어올랐다.
“난 이연 씨한테 주목을 받고 싶은 거지, 보호받고 싶은 게 아니었나 봐요.”
“……!”
잠시 숨 쉬는 걸 잊을 정도로 강하게 압박해 오는 눈빛이 진지했다. 권채우는 그 자세 그대로, 주동미에게 통보했다.
“아내랑 상의해 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그건 이 집에서 그만 나가 달라는 축객령이기도 했다.
규백이에겐 식충이라는 소리나 듣고, 권기석에겐 경제적으로 눌리는데, 잘 알지도 못하는 여자가 다짜고짜 속을 긁기까지 한다. 게다가 하나뿐인 아내는 예나 지금이나…….
그때 주동미가 멍한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아내요? 누가 말임까? 설마…… 원장님이요?”
이연이 삐거덕, 삐거덕 고개를 돌려 가까스로 웃어 보이자 주동미가 입을 떡 벌렸다.
“남편이었습니까?!”
남근은 좋아했으면서 남편이란 말에는 숫제 기겁을 하고 펄쩍 뛴다. 주동미의 얼굴이 점점 사색이 되어 굳어지는 게 실시간으로 보였다. 이연은 괜히 머쓱한 기분에 땅바닥만 툭툭 건드렸다.
‘원장님, 대체 왜 그러셨슴까!’
저, 저, 저거 눈빛이며 하는 짓이 딱 봐도 쉬운 놈은 아닌데……!
‘순한 사람은 순한 사람끼리 만나야 하는 거 아님까?’
그러나 주동미는 이미 부부라는 사람들을 이간질하는 취미는 없었으므로 그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걸음을 돌릴 뿐이었다.
이윽고 대문이 쾅, 닫히자 마당에는 적막이 돌았다.
“이연 씨, 내가 창피해요?”
“네?”
손님이 사라지자 권채우는 보다 노골적으로 물어 왔다.
“차라리 뚜렷한 능력도, 직업도 없는 내가 창피한 거라고 해 줘요. 그게 아니라면―”
어디가 아프기라도 한 듯 얼굴을 찡그리며 말하는 그의 엄포에 입 안이 다 말랐다.
“다른 이유가 짐작이 가서, 속이 꼬일 것 같으니까.”
권채우는 떨리는 이연의 눈동자를 단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싹 먹어 치웠다.
진실은 하나였다. 소이연은 예나 지금이나 그를 믿지 않는다는 것.
“날 싸고도는 것도, 여기에 가둬 두려는 것도 좋아요. 불만 없어요.”
그가 남은 한 손으로 이연의 뒷덜미를 잡고 나무라듯 힘을 주었다.
“대신, 그 이유가 애정이었어야죠. 적어도 나를 믿기는 해야지. 이연 씨는 나를 물가에 내놓으면 악어 비늘이라도 끔찍하게 돋는 줄 아나 봐요.”
“……!”
“어제 약속했잖아요. 노력해 보겠다고. 내가 알아서 버리고, 알아서 묻을 거라고. 그 말이 쉽게 들렸어요? 빈말로 들렸나?”
이연은 지금 권채우가 무엇을 지적하는지 알 것 같았다. 기억이 날까 봐, 기억을 찾을까 봐, 그것을 미리 걱정하고 그 후를 믿지 못하는 이연을 나무라는 것이다. 하지만―.
‘아니야, 그게 아니라……. 질투가 났어요.’
이연은 붉어진 얼굴로 바지를 구기듯 잡았다.
“그렇게 평생 불안에 떨면서 살 거예요? 그걸 매 순간 봐야 하는 남편 속은요. 이연 씨는 내 말의 무게를 전혀 모르는 것 같아요.”
그는 서늘한 눈으로 이연을 질책하며 미간을 구겼다.
“설령, 과거의 내가 돌아온대도, 우리가 왜 변하겠어요. 내가 이연 씨한테 이렇게나 목을 매는데. 대체 뭘 무서워하는 거예요.”
뭉근하게 오른 화를 삭이던 남자가 동시에 서러움을 내비치는 순간이었다. 심장이 쿵, 하고 요란하게 떨어졌다. 그런 얼굴을 정면에서 보이다니 반칙이라는 생각밖엔 들지 않았다.
“미안해요……!”
뺨 위로 홍조를 드리운 이연이 냉큼 외쳤다.
“내가 옹졸해서……, 그릇이 간장 종지만 해서 내가 비겁하게 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