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그는 무릎 위에 올려 두었던 트레이를 협탁에 옮겨 놓고 이연과 눈을 마주치기 위해 상체를 낮게 숙였다.
그러나 고슴도치처럼 온몸에 힘을 준 채 버티는 이연은 그 유순하고 겁 많은 눈동자를 좀처럼 보여 주지 않았다.
“들킬 줄은 몰랐,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요.”
권채우는 바르르 떠는 그녀의 손목을 조심스레 쥐었다.
“이연 씨. 나 좀 봐 줘요.”
그녀가 고집스레 고개를 젓자 불시에 쪽, 하고 손등에 입을 맞췄다. 이연이 움찔하는 게 보였다. 권채우는 그 작은 움직임마저도 가슴이 저릴 정도로 사랑스럽고 기꺼웠다.
“숨고 싶은 거면 제대로 참호 안에 숨든가.”
빼앗겼던 이불이 다시 이연의 몸을 포근하게 감싼다.
그런 그녀를 번쩍 안아 든 권채우가 제 다리 사이에 이연을 가두고 뒤에서 깊이 껴안아 왔다. 권채우의 무게와 온기가 이상한 안도감을 주었다.
“그래서 다른 남자들이랑 날 비교해 본 소감은 어땠어요? 그 결과가 듣고 싶은데요.”
그의 목소리가 맞닿아 있는 상체를 통해 울렸다.
이연은 이불 안에서 꾸물꾸물 움직이며 시간을 끌었지만 권채우는 인내심 있게 기다려 주었다. 조금씩 그 자세가 편안해질 무렵,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냥 아무 생각도 안 들었어요. 그때 창밖에서 권채우 씨를 봤거든요.”
이연은 가깝지 않은 거리에서도 한눈에 들어왔던 남자를 떠올렸다. 시원하게 쏟아졌던 빗줄기, 어제의 습도, 흠뻑 젖은 권채우의 몸 같은 것들이 조금씩 친부모의 잔상을 지워 갔다.
“그냥 얼른 집에 가고 싶었어요.”
“…….”
“권채우 씨 데리고요.”
이연은 다시 입을 꾹 다물었고 권채우는 그녀를 으스러지게 꽉 껴안았다.
“이연 씨도 날 주워 오고 싶었던 거면서, 왜 자꾸 홀대해요? 나 좀 봐 줘요.”
빛 속에서 그를 마주하는 게 너무도 어색했지만 이연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나 뭔가 달라진 것 같지 않아요?”
권채우가 내 거기를 봤다. 권채우가 내 거기를 핥았다.
차마 받아들이기 힘든 그 몇 줄 때문에 창피해서 눈을 오래 맞출 수가 없었다. 얼굴 어딘가에서 뜨끈한 김이 아지랑이처럼 올라왔다.
모두가 이렇게 낮과 밤의 차이를 확연히 느끼며 사는 걸까? 이연은 살면서 한 번도 궁금하지 않았던 것들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그녀에겐 낮과 밤을 구별하는 의미가 딱히 없었으니까. 가히 새로운 경험이었다.
“어…….”
이연은 난데없는 물음에 권채우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정신이 반쯤 나가 있던 어제와 달리 침착하게 제 색을 찾은 담갈색의 눈, 목 끝까지 제대로 단추를 잠근 옷, 단정하게 빗질된 머리, 퍽 순진해 보이는 눈빛이 평소 저만 바라보는 권채우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러나 그 모습 위로, 잔뜩 흐트러져 핏줄을 올올이 세우고 그녀를 벌리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열이 확 오른 그녀가 눈꺼풀을 빠르게 털어내며 헛기침을 했다.
“어……. 조금 잘생겨진 거 같은데요…….”
자신 없이 흘러나온 목소리에 별안간 권채우가 입술을 살짝 벌렸다. 그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는 걸 눈치챈 그녀는 다시 허둥지둥 말을 바꾸었다.
“아니에요? 어, 그럼…… 피부가 좋아졌나?”
권채우는 참지 못하고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애정을 담뿍 담고 그녀를 지긋하게 바라보는 눈빛이 깊고 뜨겁다. 어째서인지 이연은 그 시선 하나가 알몸보다 더 부끄럽다는 생각을 했다.
“칭찬은 고마운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까 눈 주변이 깨끗했어요.”
“……네?”
동그랗게 뜬 눈이 반질반질 예쁘다. 권채우는 별안간 고개를 내려 그녀의 입술을 빨아들였다. 열 오른 살덩이를 휘감고 문대는 순간 남자는 그대로 녹아내렸다. 처음부터 달궈져 있던 혀는 어디를 건드려도 따뜻한 크림처럼 곧장 흐물흐물해졌다.
“운 흔적이 없던데요.”
“……!”
돌이켜 보니 새벽녘에 몰래 나올 때에도 권채우의 흐느낌은 듣지 못했었다. 그녀는 정말로 놀란 듯 이마를 바짝 당겨 올렸다. 저도 모르게 함박웃음을 짓자 그 표정을 권채우가 지그시 바라보았다.
“이연 씨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요?”
“……글쎄요?”
이연이 진지한 얼굴로 고심하고 있자 그는 의미심장하게 미소 지었다.
“나는 알 것 같은데.”
* * *
권채우가 지켜보는 데서 샌드위치를 해치운 그녀는 부랴부랴 자리를 피해 두 시간을 내리 사무실 안에만 박혀 있었다. 방문 밖에서는 권채우가 설거지를 하거나, 청소기를 돌리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보이지 않아도 그의 동선이 눈에 선했다. 바깥이 미치도록 신경 쓰였지만 이연은 아직 그의 얼굴을 태연하게 볼 자신이 없었다.
“악몽도 섹스는 비껴가나 봐요.”
그의 짓궂은 목소리가 귓가에 딱 붙어 버린 모양이다.
다행히도 남자는 사무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지 않았고, 이연은 마음껏 귀를 문지르며 생각을 돌리려 애를 썼다.
2차 토너먼트를 하루 앞둔, 평범하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그렇게 숨 막히는 오전을 보낸 이연은 결국 마당으로 나가 화단을 정리하기로 했다.
먼저 눈에 거슬리는 잡초부터 뽑고 호스로 시원하게 물을 뿌려 주고 있을 때였다.
“소이연 원장님 계심까―!”
가문비 나무병원의 대문이 활짝 열렸다. 파티 홀에서의 세련된 모습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다시 펑퍼짐한 잠바 속에 파묻힌 주동미가 마당 안에 발을 들이고 있었다. 이연과 곧장 눈이 마주친 그녀의 얼굴에 씩 미소가 감돌았다.
“안녕하심까!”
성숙하면서도 장난스러운 눈빛, 군기가 잡힌 건지 껄렁한 건지 모를 말투. 단조롭게 뻗어 나가던 물줄기가 순간 삐끗했다.
“……안녕하세요. 그런데 주동미 씨가 여기는 어쩐 일로…….”
이연이 수도꼭지를 잠그며 말끝을 흐렸다.
아니나 다를까,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주동미는 역시나 누군가를 찾는 듯했다. 이연은 부지불식간에 안색이 어두워졌지만 이 또한 사회생활임을 잊지 않았다.
“그때 그 직원분은 아직 출근 전입니까?”
“아니요, 안에 있긴 한데…….”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주동미의 표정이 여름날처럼 밝아졌다.
“그분께 용건이 있어서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이연은 괜히 말랑거리는 호스만 꾹꾹 눌렀다.
“그러면 제가 잠깐 들어가도 되겠슴까?”
이연이 곧장 대답을 하지 못하는 사이, 주동미가 난감하다는 듯 관자놀이를 마구 긁었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꼬셔야 되는데…….”
그녀의 나지막한 혼잣말에 이연의 낯이 설핏 굳어졌다.
“……저기, 주동미 씨.”
이연이 작은 목소리로 그녀를 잡자 주동미의 시선이 자연스레 이쪽을 향했다.
“제가 그때 확실하게 말을 못 한 게 있어요.”
바지 옆선을 꽉 붙잡은 그녀가 어렵사리 입을 달싹였다.
사소한 것에서부터 중요한 것까지, 이연은 언제나 사실 그대로를 말하는 게 무서웠다.
친부모가 야반도주를 하고 없다는 것. 함께 사는 가족이 자신을 전혀 사랑해 주지 않는다는 것. 지탄을 받을 만한 출생이라는 것. 좁은 동네에 사는 동안 아무도 이연을 상종해 주지 않았다는 것까지.
그 많은 이유들이 이연을 두루뭉술하고, 얼버무리길 잘하며, 사람과 진심으로 대면하기를 주저하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녀는 감춰야만 그나마 평범하게 살 수 있었으므로.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변할 리 없는 과거가 무거워 어깨가 굽고 손바닥이 축축해졌다.
그럼에도 이연은 처음으로 가져 본 어떤 것을, 옛날처럼 무력하게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인생의 중요한 분기점마다 그녀를 훼방 놓던 지긋지긋한 사촌들이 불쑥 떠올라서.
“사실 그 사람은 제 직원이 아니에요. 직원이 아니라……”
잠깐 숨을 들이마시는 사이, 주동미가 눈을 큼지막하게 키웠다.
“잠깐만요, 직원이 아닙니까? 나무 병원 직원이 아니라고요?”
별안간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밀고 눈을 마주쳐 오는 주동미의 기세에 움찔하고 말았다. 콧구멍이 커지고 이글이글 타는 눈빛이 부담스러웠다.
“……네, 직원은 아닌데요, 대신에 제……, 제 남……이에요.”
이연이 고개를 숙이고 웅얼거리자 주동미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지금 뭣……. 남근이요?”
“네?!”
괴상한 물음에 이연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 사람이, 원장님 남근이라고요? 와아―!”
“…….”
이연은 상대의 에너지에 완전히 압도되었다. 그녀가 멍하니 시선을 보내는 사이, 주동미는 제자리에서 펄쩍펄쩍 뛰었다.
“원장님 세상 순하게 생기셔서는. 알고 보니 내 과였슴까? 진짜 그렇게는 안 봤는데, 너무 반갑지 말입니다!”
주동미는 무해하기 짝이 없는 이연을 쭉 훑어보더니 이내 악수를 청했다. 얼떨결에 그 손을 맞잡은 이연은 거북이처럼 눈만 느릿하게 끔뻑일 뿐이었다.
“역시 이 시대의 여자라면 남근 하나쯤은 갖고 있어야죠.”
“……!”
이연이 입을 떡 벌렸다가 수습하듯 재빨리 다물었다. 이 사람 뭐, 뭐지? 리틀 추자 씨인가?
“남자는 데리고 사는 거 아님다. 그냥 바지 속에 넣어만 두세요.”
이연은 그녀의 박력에 밀려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다, 다시 아차차, 가로젓기를 반복했다.
주동미는 추자와 비슷하면서도 근본적으로 완전히 달랐다. 추자 씨는 가만히 있어도 남자가 꼬였던 도화살인데다 상처를 감수하면서까지 끝끝내 제 품으로 남자를 거두어들였다면―
주동미는 네 발 달린 암놈으로 스스로 사냥을 나가 수컷을 자빠뜨리기만 하지, 책임지지는 않는 것 같았다.
“우리 원장님은 술 잘하심까?”
“아니요. 잘 못해요…….”
“와아―! 그럼 맨정신에 그런단 말임까? 나는 술 없으면 흥이 잘 안 나는데.”
이제 주동미는 박수를 치며 좋아라 했다.
“이 코딱지만 한 섬에서는 나랑 생각이 맞는 또래가 없어서 외로웠는데, 이렇게 가까이에 남근을 당당하게 말하는 원장님 같은 분이 계시다니. 사실 감동했슴다. 저 물도 술처럼 마실 수 있으니까 맞춰 드리겠슴다. 언제 날 잡고 당장 손목부터 꺾죠.”
주동미가 소주잔을 꺾는 시늉을 하며 은근히 눈짓을 보내왔다. 이연은 또래의 그런 살가운 접근이 어색하여 오히려 뻣뻣이 굳어 있었다.
그때 주동미가 다시 속 터지는 말을 해왔다.
“그럼 그 남자분은 제가 빌려 가도 됨니까? 부탁입니다. 원장님, 저한테 제발 그분 좀 주십시오!”